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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걱정을 안고 살까?

걱정 인형을 늘 안고 자는 이유

by 키위

한때 소셜 미디어에서 생활기록부를 열람하고 인증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MZ 세대에 편입하고 싶었는지 혹은 추억 여행을 하고 싶었는지 모르겠으나 왜인지 알 수 없는 호기심이 발동해 중학교 생활기록부를 열어 보았다. 중학교 생활기록부는 빈칸 없이 빼곡했다. 영어 말하기 대회, 미술 실기 대회, 과학 경진 대회와 같은 교내외 대회 수상과 환경 정화 활동이 주를 이루는 봉사 활동, 그리고 수(秀)를 자랑하는 성적표로 전적이 화려했다. 고등학교 생활기록부도 펼쳐 보았다. 그런데 웬걸, 활자로 빼곡한 중학교 생활기록부와 달리 고등학교 생활기록부는 공백이 무색하게 초라했다. 기억을 환기하며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는 왜 걱정을 품고 살까?’ 아니 ‘나는 언제부터 걱정을 품고 살았을까?’



고등학생 때부터 걱정 인형을 안고 잠을 청했다. 외국어 고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가세가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해외로 수학여행을 가는 친구들을 뒤로하고 교실에서 보충 수업을 들어야 하는 상황이 서러웠다. 경제적으로 마음껏 지원을 받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용돈은 고사하고 문제집을 살 돈조차 없었다. 부모님의 별거로 학교를 자퇴하고 싶었다. 꿈을 펼칠 생각도 없이 돈 걱정이 앞섰다. 방황이 길었다. 정신 차리고 수능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나 수능을 망쳤다. 재수하고 싶었지만 한사코 반대하시는 부모님의 성화에 못 이겨 결국 지방 국립대에 입학했다. 되돌아보면 그때의 나는 참으로 가엾고 나약했다.


돈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성적 장학금을 받으려고 과에서 1등을 놓치지 않았다. 과외비로 생활비를 충당했다. 해외에서 수학하고 있는 고등학교 친구들을 선망하며 교환학생이라는 꿈을 꾸었다. 혼자서 영어 시험을 준비했다. 새벽 6시부터 자정까지 30분 단위로 일정을 소화했다. 마침내 미국에서 교환학생으로 공부할 기회가 생겼다. 그러나 학기당 천만 원이라는 목돈이 우리 가족에게 없었다. 피나는 노력으로 자격이 주어졌음에도 돈 때문에 포기를 해야 했다.


교환학생을 향한 간곡한 마음이 하늘에 전달되었을까?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었다. 며칠 뒤 본교와 자매결연을 맺은 뉴질랜드의 어느 학교에서 1년 학비 면제라는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 아메리칸드림을 뒤로하고 오클랜드행 비행기에 탑승했다. 그리고 뉴질랜드는 잿빛에 가려진 삶을 낭만으로 꽃피우게 했다.


귀국하자마자 또다시 돈이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그럼에도 꿈을 잃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러나 돈이 뭐길래 차선책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핑크빛으로 생기가 돌던 꽃잎들은 바래지고 하나둘씩 떨어졌다. 꿈꾸는 것조차 사치였다. 내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게 인생이라더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나 안 풀릴 수 있나 싶었다. 결국 계획 없이 흘러가는 대로 살기 시작했다.


계획대로 살지 않는다고 해서 걱정거리가 없다는 것은 아니었다. 어느새 무언가를 시도할 때마다 걱정부터 앞서는 게 습관이 되었다. 돈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절망하는 상황이 반복될까 봐 또는 남들이 정의하는 ‘실패’라는 단어 앞에서 무릎을 꿇게 될까 봐 하며 차일피일 도전을 미뤘다. 인생에서 99% 일어나지 않을 최악의 시나리오를 상상하며 끙끙 앓는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다. 기어코 누군가가 보다 못해 이런 말을 툭 던졌다.



“너는 걱정에 중독되었어.”



그 말을 듣고 머리가 띵했다.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리며 ‘이래서 안 돼’, ‘저래서 안 돼’라고 결론을 내렸다. 시도조차 두려워 놓쳐 버린 기회들이 분명히 있었을 텐데 말이다. 사실 차선책도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때 그 선택조차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내가 없었을 것이다. 생각이 전환되었다. 정신을 차리기로 했다. 결과가 어떻든 시도라도 해 보기로 했다. 남들과 비교하지 않고 중심을 단단히 세우기로 했다. 주어진 환경에서 묵묵히 최선을 따르기로 했다. 스스로를 폄하하지 않기로 했다. 마음이 가는 대로 살기로 했다.


이제는 무엇이든 잠깐의 생각을 거치고 행동으로 옮기려고 노력한다. 사서 걱정하지 않으려고도 하지만 아직은 시간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이전보다 가벼워진 나 자신을 발견한다. 온갖 걱정으로 잠을 설치던 지난날을 보낸다. 걱정거리 하나라도 마음속 파도에 쓸어 보내고 잠을 청한다. 온화한 얼굴로 푹 잔다.


마침내 걱정 인형을 놓아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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