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인정하는 방법
“너는 참 자기 객관화를 잘하는 사람이야.”
어느 날 친구에게서 뜻밖의 칭찬을 들었다. 순간 당황스러웠다. '정말 그럴까?' 문득 오래된 일기장을 펼쳐보듯 지나온 시간을 되돌아보았다. 시간을 렌즈 삼아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우리는 살면서 얼마나 많은 '나'를 발견할까? 과거와 현재의 '나'는 얼마나 같고 다를까? 때로는 타인의 시선이 '나'를 더 잘 보여줄지도 모른다. 자기 객관화는 고요한 밤, 진실을 비추는 거울과 같다. 욕망과 편견에 가려진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일은 전혀 쉽지 않다. 그럼에도 묻는다. 자기 객관화는 무엇일까?
진정한 성장은 자신을 직면하는 용기에서 비롯된다. 그 용기는 내가 잘하는 것과 못하는 것을 인정하는 데에서부터 시작된다. 해외에서 직장 생활을 하던 중 팀장 승진 제안을 받았다. 한국에선 친구들이 하나둘 승진하던 때라 '그래, 나도 때가 됐지' 싶었다. 팀장 자리가 주는 무게는 까맣게 모른 채 말이다. 물론 책임감 하나는 남부럽지 않았다. 남에게 민폐 주는 건 딱 질색이라 맡은 일은 어떻게든 해냈다. 하지만 팀장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사원들 사기를 북돋우며 윗선의 요구까지 충족시켜야 하는 중간 관리자. 극 내향인인 내겐 너무나 버거운 일이었다. 사실 사회생활 내내 가면을 쓰고 상사의 비위를 맞추는 데 질릴 대로 질린 터였다. 부조리를 마주하면 팀원들 편에 서서 싸웠지만, 결국 윗선의 뜻대로 되는 판국에 자괴감이 들곤 했다. 그렇게 9개월을 버티다 퇴사했고 비로소 깨달았다. 나는 묵묵히 맡은 일만 잘 해내는 사람이었지, 사람들을 설득하고 관리하는 팀장은 내게 맞지 않는 옷이었다는 걸. 나이를 먹고 경력이 쌓였다고 저절로 팀장이 되는 건 아니었다.
지나친 겸손이 오히려 화를 부를 때가 있다. 누군가 칭찬을 건네면, "에이, 아니에요." 하며 얼굴을 붉히곤 했다. 어느 순간, 작고 초라한 내가 서 있었다. 자신감과 자만심을 명확히 구분하지 못했다. 나는 좁은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집순이이지만, 인연을 소중히 여기며 자연스럽게 관계를 이어간다. 친구들은 종종 내게 말한다. "따뜻한 마음 덕분에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라고. 이것이 스친 인연에도 닿았던 걸까? 퇴사 후, 팀원들이 결혼 소식을 듣고 축하하고 싶다며 먼저 결혼식에 초대해달라고 연락해 왔다. 생각지도 못한 제안이었지만 감사한 마음이 더욱 컸다. 사람들에게 얼마나 진심으로 다가갔는지 느낄 수 있는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포근한 담요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감싸는 공감 능력이 내 안에 있다. 이전에는 이러한 면모를 별것 아닌 것으로 치부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이러한 성격은 나 자신을 사랑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자기 객관화가 시작되니 나를 알아가게 된다. 나는 급행열차보다 풍경을 감상하며 잠시 멈추는 관광열차에 가깝다. 그동안 불안함에 휩싸여 조급한 선택을 해왔지만, 이제는 한 걸음 물러서서 신중하게 결정하는 습관을 들인다. 가끔은 예민한 성격에 몸살이 오지만, "그럴 수 있지"라며 상황을 유연하게 대처하려 힘쓴다. 이 같은 깨달음은 날 것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는 용기이자 자신을 존중하고 가치 있게 여기기로 하는 다짐과 같다.
자기 객관화로 나를 탐구한다. 그동안 타인의 평가와 사회적 기준에 갇혀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싶은지 끊임없이 되뇌었다.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일은 쉽지 않았다. 때로는 불편한 진실과 마주해야 했고, 한때 믿었던 내 모습이 허상이었음을 인정해야 했다. 능력 밖의 일을 끙끙 앓으며 이어가거나 누군가의 진심 어린 덕담을 스스로 의심하기도 했다. 하지만 일련의 과정으로 나는 단단해진다.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일을 선택하고 타인의 잣대에 기대기보다 스스로 중심을 잡는다.
자기 객관화는 나를 인정하는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