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나의 20대에게

눈부신 용기와 의연함의 기록

by 키위

서랍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한 낡은 상자를 조심스럽게 열어본다. 손때 묻어 닳아버린 짙은 초록색 여권 표지를 가만히 쓸어내린다. 빳빳했던 종이가 어느새 부드럽게 구겨질 만큼 수많은 국경을 넘나들었던 찬란한 흔적을 마주한다. 출입국 도장으로 빈틈없이 빼곡한 페이지를 한 장씩 넘기며 거침없이 과감했던 20대의 생생한 숨결을 고스란히 불러온다.


문득 뇌리를 스친 엉뚱한 질문 하나와 영화 속 환상에 기대어 훌쩍 여행을 계획하던 무모한 용기가 눈부시게 빛났다. 거창한 오지 탐험은 아니었어도 밤을 지새우며 일정을 짜던 가슴 뛰는 설렘은 세상을 모두 가진 듯 충만했다. 캐리어 하나에 당장 필요한 옷가지와 풋풋한 로망을 욱여넣고 공항으로 향하던 발걸음은 늘 구름 위를 걷듯 가벼웠다. 낯선 언어와 이질적인 공기가 맴도는 미지의 세계를 향한 순수한 열망이 온몸의 감각을 날카롭게 깨웠다.


불안하고 흔들리던 이십 대의 한가운데서 세상을 향해 거침없이 문을 열어젖혔다. 알 수 없는 미래를 향한 막연한 두려움을 낯선 공기와 새로운 풍경으로 남김없이 씻어내려 애썼다. 언어가 완벽히 통하지 않는 타국 한복판에 덩그러니 떨어져도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씩씩하게 길을 찾아 헤매었다. 지도 하나에 의지한 채 복잡한 미로 같은 골목을 뚫고 나가며 세상의 거대한 크기를 온몸으로 가늠했다. 엉뚱한 버스정류장에 잘못 내려 방향을 잃은 순간조차 목적지에 닿기 위한 값진 과정으로 정면 돌파하며 상황을 의연하게 타개했다. 두려움보다 호기심이 앞서던 그 시절의 단단한 마음가짐이 현재의 삶을 지탱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로 자라났다. 책상 앞에 앉아 수백 번 상상하는 일보다 직접 두 발로 땅을 디디고 부딪히는 찰나의 경험이 훨씬 위대함을 온몸으로 증명해 냈다.


런던의 화창하고 눈부신 하늘과 브라이턴의 새하얀 절벽과 초록빛 들판을 쉼 없이 누비던 20대 중반의 여름을 또렷하게 기억한다. 홀가분한 차림으로 템스강 변을 따라 하염없이 걸으며 온전한 자유를 깊게 들이마셨다. 블라디보스토크의 서늘하고 매서운 바람을 맞고 하마사키의 조용한 바닷가를 거닐며 다채로운 세계의 굴곡을 가슴 깊이 새겨 넣었다. 공항에 발을 딛자마자 억센 호객꾼을 따라 엉겁결에 시내로 향하던 황당한 순간마저 유쾌한 에피소드로 치환하며 상황을 주도했다. 비가 그친 밤하늘 아래 화려한 조명으로 빛나는 금각교를 눈에 담고 십 년 지기 벗과 작은 컵라면 하나로 무사한 하루를 축하하며 찬란한 마침표를 찍었다. 시카고의 거대한 마천루가 뽐내는 압도적인 위용과 뉴욕의 화려한 번화가를 지나 콜럼버스의 한적한 거리까지 끝없이 씩씩한 발걸음을 이어갔다. 이름조차 생소한 골목길을 굽이굽이 돌아나가며 매 순간 새롭게 태어나는 듯한 벅찬 환희를 만끽했다.


낯선 여행지에서 마주한 예기치 못한 난관 앞에서도 결코 도망치지 않았다.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여행의 변수들을 삶이 던지는 유쾌한 농담으로 기꺼이 받아들였다. 서툰 언어로 길을 묻고 짧은 눈인사를 나누며 사람과 사람이 맞닿아 만들어내는 따뜻한 온기를 실감했다. 완벽하지 않아서 더욱 아름다웠던 실수투성이의 여정은 스스로를 지켜내는 법을 가르쳐준 훌륭한 학교였다. 예상치 못한 소나기를 만나 처마 밑에서 비를 긋던 순간조차 한 편의 영화처럼 낭만적인 기억으로 아로새겼다. 거창한 목적이나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한 번듯한 기록이 결코 아니다. 그저 낯선 풍경 속에서 찬란하게 빛났던 과거의 조각들을 활자로 붙잡아두고 싶은 간절한 마음뿐이다.


흐릿해가는 기억의 끝자락을 단단히 움켜쥐고 영원히 바래지 않는 문장으로 정성껏 기록한다. 외부의 얄팍한 시선이나 거창한 평가에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오직 스스로 좋아서 쓰는 투박하고 진솔한 도시 여행기다. 텅 빈 활자 위를 채워가는 까만 글자들에 풋풋했던 청춘의 땀방울과 벅찬 감탄사들을 빈틈없이 꾹꾹 눌러 담는다. 타인의 기준에 억지로 맞추지 않고 오직 고유한 속도로 지난날의 눈부신 발자취를 차분히 복원해 낸다. 지난 시간의 파편들을 주워 모아 하나의 온전한 문장으로 꿰어내는 과정 자체가 스스로를 단단하게 세우는 거룩한 의식이다. 즐거움으로 묵묵히 채워나가는 이 소박하고 진실한 기록들이 주저하며 서성이는 누군가에게 작고 단단한 용기로 가닿기를 소망한다.


떠나고 싶지만 차마 발을 떼지 못하는 이들에게 일단 부딪혀보라는 묵직한 응원을 보낸다. 결과를 미리 재단하지 않고 누구보다 과감하게 세계를 껴안으려 했던 이십 대를 향해 깊고 진한 애정을 보낸다. 두려움 없이 낯선 문을 열어젖히고 문제를 해결하던 그 시절의 에너지를 현재의 삶 구석구석으로 눈부시게 끌어들인다. 길 위에서 겪어낸 수많은 감정과 깨달음을 모아 오직 스스로만 빚어낼 수 있는 고유한 서사를 기어코 완성한다. 영원히 바래지 않을 기억 속의 풍경들을 향해 다시 한번 벅찬 마음으로 경쾌한 발걸음을 내디딘다. 빛나는 용기와 의연함으로 무장했던 지난날의 여행이 활자를 넘어 누군가의 얼어붙은 마음을 다녹여주리라 굳게 믿는다.


화, 금,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