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이 현실의 온도를 입을 때

런던, 어느 눈부신 여름날의 도시

by 키위

초록빛 나뭇잎이 무성하던 여름날, 오랜 친구와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다 문득 엉뚱한 질문 하나를 허공에 던졌다.



"우리 영국으로 여행 갈래?"



실없는 장난처럼 툭 내뱉은 한마디가 마른 장작에 불을 붙이듯 마음속 깊은 곳의 오랜 열망을 단숨에 깨웠다. 화면 속에서 수없이 동경했던 마법사의 은밀한 골목과 천재 탐정이 누비던 안개 낀 거리를 향해 거침없이 비행기 표를 끊어버렸다.


오랜 벗과 단둘이 떠나는 첫 여행이라는 사실에 가슴 뛰는 설렘 하나로 훌쩍 짐을 꾸렸다. 캐리어 안에는 당장 필요한 옷가지와 함께 영국이라는 나라를 향한 풋풋한 로망을 가득 욱여넣었다. 일상에서 벗어난다는 해방감과 미지의 세계를 향한 막연한 두려움을 동시에 안고 런던행 비행기에 가볍게 몸을 실었다. 좁은 좌석에 앉아 십여 시간의 기나긴 비행을 견뎌내며 머나먼 타국을 향한 부푼 기대를 온몸으로 감당했다. 구름을 뚫고 날아가는 내내 머릿속으로는 수백 번도 넘게 런던의 거리를 상상하며 벅찬 감정을 조용히 다스렸다.


기나긴 여정 끝에 드디어 낯선 대기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 막연했던 상상은 비로소 생생한 현실로 모습을 바꿨다. 우중충할 거라 짐작했던 영국의 잿빛 하늘 대신 눈부시게 화창한 여름 햇살이 이방인을 뜨겁게 환대했다. 텁텁한 공기를 단숨에 밀어내는 맑고 청명한 바람을 깊게 들이마시며 기나긴 비행의 피로를 말끔히 씻어냈다.




무거운 짐을 풀기 위해 향한 핌리코 거리에는 새하얗게 칠한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끝없이 늘어서서 동화 같은 풍경을 선사했다. 오랫동안 마음속 깊은 곳에 품어온 낭만이 입체적인 부피를 입고 눈앞에 와르르 쏟아지는 경이로움을 온몸으로 만끽했다. 평범한 주택가 골목조차 마치 정교하게 꾸민 영화 세트장처럼 다가와 발걸음을 뗄 때마다 연신 탄성을 내뱉었다. 낡은 벽돌과 반듯한 창문들이 빚어내는 이국적인 조화를 감상하며 드디어 상상 속의 무대에 올랐음을 선명히 자각했다.


본격적인 일정을 시작하기 위해 영국의 랜드마크인 붉은색 이층 버스 맨 앞자리에 재빠르게 자리를 잡았다. 덜컹거리는 진동을 고스란히 느끼며 버스 창문 너머로 쉴 새 없이 스쳐 지나가는 화려한 도시의 윤곽을 가만히 응시했다. 템스강 변을 따라 웅장하게 솟아오른 빅벤과 오랜 역사를 품은 웨스트민스터 사원 그리고 넓게 펼쳐진 트래펄가 광장의 위용을 두 눈에 꽉 채워 넣었다.


평면적인 모니터 안에서만 존재하던 납작한 풍경 속으로 직접 걸어 들어가 낯선 도시의 역동적인 공기를 흠뻑 들이마셨다. 드디어 진짜 런던 한가운데 도착했다는 벅찬 감동이 가슴을 두드렸다. 수백 년의 시간을 묵묵히 버텨온 거대한 건축물들 사이를 지나가며 이방인으로서 거대한 세계 한가운데 툭 뛰어든 짜릿한 해방감을 실감했다. 활자로만 존재하던 지식에 생생한 숨결을 불어넣으며 시선이 닿는 모든 곳을 정성껏 눈에 담았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목요일 저녁의 코벤트 가든은 거리 공연과 수많은 사람의 활기찬 발걸음으로 뜨겁게 들끓었다. 타인의 얄팍한 시선에 얽매이지 않고 고풍스러운 상점들이 가득한 거리를 자유롭게 누비며 일탈을 즐겼다. 어둠이 짙게 깔린 밤에는 화려한 조명으로 빛나는 리시움 극장에 앉아 웅장한 무대 연출이 돋보이는 뮤지컬 <라이언 킹>을 관람했다. 배우들의 폭발적인 가창력과 압도적인 퍼포먼스에 넋을 잃고 빠져들며 예술의 도시가 뿜어내는 깊은 매력을 스펀지처럼 흡수했다.


출발한 시점부터 무려 스물네 시간 이상 눈을 뜬 채 시차라는 물리적 한계와 치열하게 사투를 벌였다. 쏟아지는 졸음을 억지로 쫓아내면서도 결코 눈부시게 빛나는 찰나의 순간들을 단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한계에 다다른 체력마저 여행이 건네는 특별한 선물로 기꺼이 껴안으며 첫날밤을 수놓았다.




어딘가로 훌쩍 떠난다는 것은 결국 안전하고 익숙한 일상을 과감히 벗어나 미지의 변수들과 정면으로 부딪히는 일이다. 화면 너머로 막연히 동경하던 환상을 직접 두 발로 밟고 서서 거칠고 차가운 현실의 질감을 찬찬히 쓰다듬는다. 피곤함마저 기분 좋은 훈장으로 여기며 낯선 도시의 템포에 씩씩하게 발을 맞춘다. 타국의 이질적인 공기와 낯선 사람들의 웅성거림조차 아름다운 배경 음악으로 삼아 내면의 굳은 빗장을 스르르 풀어낸다.


두려움보다 호기심이 아득히 앞서는 마음가짐으로 이방인의 감각을 남김없이 빨아들인다. 티 없이 맑은 런던의 밤하늘 아래서 앞으로 펼쳐질 길고 진한 여행의 서막을 힘차게 열어젖힌다. 머릿속의 흐릿한 상상이 눈부시고 완벽한 현실로 탈바꿈하는 마법 같은 시간을 가슴에 되새긴다. 오랫동안 꿈꿔왔던 무대 위에서 가장 나다운 모습으로 거침없이 활약할 내일을 약속한다.


화, 금,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