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의 산책과 오후의 홍차

런던, 타국의 속도에 발을 맞추며

by 키위

여행자의 어설픈 티를 훌훌 벗어던지고 현지인처럼 말끔히 차려입은 채 숙소 밖을 나섰다. 눈부시게 맑고 화창한 날씨 속에서 낯선 산책을 시작했다. 거리 곳곳에 매달린 사랑스러운 꽃바구니를 눈에 담으며 지친 마음을 다독였다. 티 없이 쾌청한 하늘 아래서 붉은색 전화 박스를 배경으로 멈춰 선 순간을 사진으로 남겼다.


늘 시간에 쫓기며 바쁘게 걸음을 재촉하던 한국에서의 조급함을 런던의 거리에 툭툭 털어냈다. 도처에 깊게 스며있는 여유로움을 온몸으로 들이마시며 굳어있던 어깨를 내렸다. 정해진 목적지 없이 그저 발길이 닿는 대로 고풍스러운 골목을 굽이굽이 돌아나갔다. 이층 버스의 둔탁한 엔진 소리와 사람들의 경쾌한 발걸음 소리가 완벽한 화음처럼 다가왔다.


허덕이던 일상을 완벽하게 지워내고 온전히 현재의 감각에만 집중했다. 낯선 도시의 너그러운 속도에 억지스럽지 않게 발을 맞추며 진짜 여행의 묘미를 서서히 알아갔다. 맑은 공기를 가르며 낯선 풍경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행위 자체를 거룩한 치유의 과정으로 받아들였다.


초록빛 나무가 끝없이 길게 늘어선 그리니치 공원 한가운데를 걸었다. 탁 트인 공원 꼭대기에 올라 도시 전체의 전경을 굽어보고 천문대에 들러 시간의 참된 의미를 물었다. 거대한 자연과 오랜 역사를 한꺼번에 품어내는 공간에서 좁았던 시야를 한 뼘 더 넓게 확장했다. 발걸음을 돌려 트래펄가 광장에 우뚝 선 근엄한 사자상 앞으로 향했다. 좋은 일이 생길 거라는 미담을 떠올리며 사자상을 정성껏 쓰다듬고 행운을 조용히 기원했다.


내셔널 갤러리 안에서 조용히 명작을 모사하는 노인의 뒷모습을 한동안 응시했다. 화려한 색채와 섬세한 질감을 재현하려 애쓰는 열정에 깊은 감동을 음미했다. 파리 못지않은 예술의 도시가 뿜어내는 깊은 매력에 푹 빠져들며 발걸음을 조금 더 늦췄다. 차분히 가라앉은 미술관의 공기를 마시며 위대한 화가들이 남긴 치열한 붓 터치를 경이롭게 마주했다. 시대를 초월하여 빛나는 예술 작품으로부터 위로를 으며 내면의 빈곤함을 채웠다.




오후의 정점을 찍기 위해 하이드 파크에 자리한 켄싱턴 궁전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과거 왕실의 휴식처였던 넓은 공원을 거닐며 범접하기 힘든 고귀한 분위기를 마주했다. 오랑저리 식당으로 이어지는 신비로운 길목을 걸으며 마치 동화 속으로 직접 걸어 들어간 듯한 짜릿함을 온몸으로 느끼기도 했다. 단정하게 가지를 뻗은 나무 사이를 지나 마침내 따스한 햇볕이 내리쬐는 창가 자리에 앉았다.


정교하고 화려한 찻잔에 진하게 우려낸 홍차를 조심스럽게 따르며 오랫동안 꿈꿔왔던 순간을 맞이했다. 입술 끝에 닿는 쌉싸름하고 깊은 향기를 음미하며 낯선 여행지에서 바짝 얼어붙었던 긴장감을 순식간에 허물어뜨렸다. 삼단 트레이를 가득 채운 달콤한 디저트를 한 입 베어 무는 순간, 온몸의 세포를 깨우는 듯한 황홀함을 맛보았다. 스콘에 크림과 잼을 듬뿍 바르며 일상에서 누리지 못했던 사치스러운 기쁨을 남김없이 만끽했다.


입안에서 사르르 녹아내리는 달콤함으로 단순히 미각을 자극하는 일을 넘어 지친 영혼을 어루만지는 위로를 경험했다. 창밖으로 일렁이는 푸른 녹음과 찻잔 위로 피어오르는 하얀 김을 번갈아 바라보며 세상의 모든 평화를 끌어안은 듯한 벅찬 감동에 휩싸였다. 화려한 왕실의 자취가 서린 공간에서 이방인의 허름한 겉옷을 벗어던지고 잠시나마 귀족이 된 듯한 기분 좋은 착각에 빠져들었다.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복잡한 상념들을 따뜻한 찻잔의 온기로 흔적 없이 녹여냈다. 차를 마시는 느릿하고 우아한 행위 자체를 바쁘게만 달려온 지난날을 향한 가장 눈부신 보상으로 여겼다. 영국에 다시 오면 반드시 이곳에 들러 달콤한 위로를 다시 맛보겠다는 다짐을 마음속 깊은 곳에 새겼다.




해 질 녘의 낭만을 찾아 밀레니엄 브리지를 천천히 가로질렀다. 템스강의 잔잔한 물결을 따라 다리를 건너며 현대 미술관인 테이트 모던을 마주했다. 미술관 앞에서 웅장한 세인트 폴 대성당을 등지고 기타를 튕기는 영국의 한 청년을 운명처럼 발견했다. 발걸음을 멈추고 버스킹 공연에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화려한 랜드마크를 아다니는 일보다 길 위에서 우연히 마주친 음악 하나가 영혼을 어루만졌다. 낯선 이방인과 현지인이 음악이라는 보편적인 언어 아래서 하나로 어우러지는 마법 같은 찰나를 경험했다. 서늘한 강바람마저 포근하게 다가올 만큼 따뜻하고 낭만적인 밤의 선율에 취했다. 계획표에 없는 마주침으로 여행의 눈부신 묘미를 자각했다.


치열하게 살아내야 한다는 강박을 내려놓고 산책이 주는 해방감을 체득한다. 거창한 목적지 없이 발길 닿는 대로 거리를 누비고 향긋한 홍차 한 잔에 세상을 모두 가진 듯 환히 미소를 짓는다. 완벽한 계획을 비워낸 자리에 예기치 못한 아름다운 풍경과 우연한 음악을 채워 넣으며 내면의 빈 공간을 다진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스스로 정한 리듬으로 남은 여정을 당당하게 걸어 나갈 힘을 얻는다. 예술과 낭만이 흐르는 런던을 거대한 캔버스로 삼아 이십 대의 찬란한 여정을 그려 나간다. 발자국을 늘려가며 어제보다 한결 단단해진 스스로를 끌어안는다. 찬란하게 부서지던 여름날의 햇살을 가슴 속에 품는다.


화, 금,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