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이턴, 어느 낯선 길 위에서 배운 것
런던의 번잡함을 뒤로하고 오직 세븐 시스터즈 단 한 곳만을 품기 위해 탁 트인 대자연을 자랑하는 브라이턴으로 경쾌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빅토리아 역에서 출발하는 브라이턴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한 시간 남짓 달려 도착하자마자 다시 버스로 갈아탔다. 차창 밖으로 쉴 새 없이 스치는 이국적인 풍경에 취해 신나게 떠들며 여행이 주는 홀가분한 해방감을 마음껏 만끽했다.
새로운 풍경이 건네는 설렘에 흠뻑 취해 원래 목적지였던 세븐 시스터즈 정류장을 지나쳐 바로 그다음 정류장에 내리고 말았다. 허둥지둥 버스에서 내려 게일리스 농장이라는 낯선 이름표를 단 사유지를 마주했다. 완벽하게 짰다고 자부했던 꼼꼼한 계획이 보기 좋게 어긋나버린 순간이었다. 그러나 정류장에 덩그러니 남은 막막함조차 여행이 건네는 유쾌한 변수로 껴안으며 당황스러운 마음은 금세 진정되었다.
엉뚱한 곳에 내린 덕분에 세븐 시스터즈로 가는 여러 코스 중에서 흔히 걷지 않는 한 시간 반짜리 코스를 걷기 시작했다. 끝없이 뻗어나간 거칠고 투박한 허허벌판을 눈앞에 두고 압도적인 공간을 만끽했다. 푸릇푸릇한 초록빛 잎사귀가 무성하게 드리웠다면 훨씬 더 예뻤을 길에서 아름다운 하늘을 위안 삼아 힘차게 걸음을 옮겼다.
때마침 드넓은 들판 한가운데서 평화롭게 풀을 뜯어 먹는 하얀 양 떼를 우연히 마주했다. 정해진 길로만 반듯하게 걸어갔다면 결코 만나지 못했을 소박하고 따뜻한 풍경이었다. 매서운 바닷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면서도 불평을 늘어놓기보다 뜻밖의 선물을 발견한 듯 입가에 환한 미소를 머금었다. 발이 푹푹 빠지는 거친 비포장도로를 씩씩하게 걸으며 도시의 딱딱한 시멘트 바닥에서 도무지 느낄 수 없던 날것 그대로의 흙냄새를 들이마셨다.
오랜 시간 거친 바람을 뚫고 걸은 끝에 드디어 세븐 시스터즈의 장엄한 자태와 정면으로 마주했다. 선물처럼 맑게 갠 날씨 덕분에 깎아지른 듯 솟아오른 새하얀 절벽은 유난히 더 창백하고 시리도록 눈부신 빛깔을 띠었다. 압도적인 대자연 앞에서 벅찬 경이로움으로 어떤 화려한 수식어조차 무의미해졌다.
하얀색 장벽과 짙푸른 바다가 맞닿은 풍경을 바라보며 현실 세계를 벗어나 천국에 도착한 듯한 착각에 빠져들었다. 거세게 부서지는 파도 소리를 배경 음악으로 삼아 꿀맛 같은 휴식을 취했다. 대자연이 기꺼이 내어주는 품에 안겨 가쁜 숨을 고르며 가슴에 겹겹이 안고 있던 걱정들을 바닷바람에 남김없이 날려 보냈다. 맑은 하늘 아래 완벽한 휴식을 허락해준 운명에 감사했다.
본래의 경로를 벗어나 낯선 길을 헤매었던 그날의 실수를 가장 완벽한 하루를 완성하는 묘수로 승화했다. 효율과 속도만 따지며 남들이 닦아놓은 안전한 포장도로만 고집했던 좁은 시야를 들판에서 보기 좋게 깨뜨렸다. 보편적인 길을 선택하지 않은 덕분에 뻔한 오직 스스로만 간직할 수 있는 낭만적인 풍경을 눈동자에 담았다.
세븐 시스터즈를 배경으로 단단한 추억을 남긴 것만으로도 밀려오는 행복을 만끽했다. 치밀하게 세워둔 계획이 어긋났다고 불안해하거나 좌절하는 대신 우연이 이끄는 방향으로 기꺼이 발걸음을 내딛는 용기를 배웠다. 여행지에서 불쑥 마주하는 모든 예측 불가능한 상횡들은 삶을 더욱 풍성히 만들었다.
어긋난 정류장이 뜻밖에 안겨준 그날의 새하얀 절벽을 찬찬히 떠올리며 정해진 경로를 훌쩍 벗어나는 일에 더 이상 막연한 두려움을 품지 않는다. 때로는 길을 잃고 한참을 헤매는 시간조차 진짜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임을 믿는다. 완벽히 제어할 수 없어도 씩씩하게 웃어넘기며 낯선 길을 탐험하는 이방인의 여유를 즐긴다.
획일적인 정답을 강박적으로 좇기보다 엉뚱한 곳에서 우연히 발견하는 작은 기쁨들을 정성껏 주워 모으며 지도를 그려 나간다. 눈부시게 시리던 세븐 시스터즈의 하얀 절벽을 튼튼한 닻으로 내리고 거칠게 흔들리는 일상을 지탱한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기나긴 삶의 여정에서도 두려움 없이 기꺼이 길을 잃을 준비를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