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견뚜기 Aug 31. 2024

여수행 KTX 산천 507호에서

이야기

※ 사진은 KTX 산천 열차. 출처 네이버.


나는 비행기보다 기차 여행이 더 좋다.

비행기가 하늘을 날아 목적지까지 빨리 간다는 장점이 있지만, 기차가 주는 묘한 안정감이 있다.


8월 마지막 주말을 여수에서 보내기 위해 KTX 산천 507 여수엑스포역행 열차를 탔다. 서울역에서 9시 45분 출발이다. 도착은 13시 3분. 약 3시간 넘게 걸린다. 출발 시간 맞춰 8호차 자리에 앉자, 서서히 기차가 이동했다.

출발이다.

요란스러운 굉음을 내며 날아오르는 항공기와는 사뭇 다르다. 게다가 항공기 이코노미석보다 KTX 일반석 좌석이 조금 더 여유롭다. 창밖으로 서울의 도심 풍경이 빠르게 스쳐 지나간다. 여수로 향하는 여정이 시작됐다.


산천 507호는 용산, 광명, 천안아산, 오송, 공주, 익산, 전주, 남원, 곡성, 순천, 여천을 경유해 여수엑스포역 도착이다.


경로를 보니 문뜩 여수 위치가 궁금해졌다. 이름은 익숙한데, 정작 여수가 한반도에서 어디에 위치했는지 가물 가물했다. 중고등학교 때 공부했던 한국지리 지식은 이미 20년이 넘은 지식이라, 여수라는 지명 외에는 다른 정보는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궁금하면 네이버 검색에 의존할 수밖에. 여수는 한반도 남쪽 해안가에 위치했다. 옆으로 남해, 통영 거제 등 익숙한 이름의 도시들이 위치해 있다. 이른바 남해안이었다. 내 기억에 최근 방문한 남해 바다는 부산, 포항 정도였다.


"다음 역은 오송, 오송역입니다. 내리실 분은 미리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한 시간 정도 지나자 오송역에 근접했다는 방송이 나왔다. 평소 업무 때문에 세종시를 방문하기 위해 월 1회는 들리는 곳이 오송역이다. 오송이라는 지명이 이제는 익숙하다.


오송역은 나에게 일과 관련된 기억뿐이다. 일로 인해 정부 기관과 협의를 위해 세종시를 방문한 기억과 일로서 만난 여러 사람들이 떠올랐다.


이제 오송역을 지나면 미지의 세계다. 일의 영역을 벗어난 곳으로 간다. 괜스레 해방감이 든다.


'휴우! 이제부터 진짜 휴가구나!'

왠지 긴장이 풀리는 것 같았다.


앞으로 산천 507호가 들르는 지역에는 어떤 기억이 있을까? 문뜩 궁금해졌다.


다음역은 공주다. 공주에 대한 특별한 기억은 없었다. 유명 메이저리거 박찬호 선수가 공주 출신이라는 것과 얼마 전 일 때문에 만난 정치권 인사가 공주 출신이었던 것 같았다. 아마도 삼국시대 백제랑 연관이 있었을까?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다음은 익산이다. 여수에 오기 전에 산천 507호가 익산까지만 고속이라는 말을 들은 터였다. 익산까지만 고속이면 나머지 지역은 어떤 속도로 달릴까? 속도의 변화가 크게 체감이 될까? 내심 기대했는데 막상 열차가 익산역을 출발하니 별반 차이를 느낄 수 없었다. 그리고 예전에 알았던 국토부 출신의 고위 공직자가 익산 출신이라 익산 총선, 지방선거에 출마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새록새록 난다. 선거에서 떨어진 그분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으려나. 여전히 정치권 진입을 위해 준비하고 있겠지?


익산 다음 역은 전주다. 그래도 전주는 기억할 거리가 전 역들보다 많았다. 우선, 전주한옥마을, 초코파이, 그리고 한정식이 생각나며, 새삼 KBS 예능 프로그램인 '1박 2일'이 대단한 프로그램이었다 생각이 든다. 전주 하니 '1박 2일'에서 저녁 복불복 게임을 하는 장면이 떠오른다. 문제는 내 기억의 장면이 전주 에피소드인지 확실치 않다는 것. 아무렴 어떨까? 내 기억이 잘못되었다 해서 내 삶에 미치는 영향은 없으니깐.


그리고 얼마 전 부친상을 당한 지인 L의 고향이 전주였다. 작고하신 선친이 서울에서 1년 가까이 투병 생활을 하시면서, L의 어머니가 전주에서 올라와서 고생하신다며 걱정하던 L의 얼굴이 떠오른다. 일로 만났는데, 묘하게 정이 가는 친구다.


곧이어 남원이다. 내 기억 속의 남원은 내가 모시는 임원의 고향이었다. 몇 달 전 부친상을 당해, 임원의 고향이던 남원으로 문상을 다녀왔다. 그러고 보니 산천 507호가 처음이 아니었다. 하여튼 내 위 임원으로 오자마자 임원의 아버님이 돌아가셔서, 더 적극적(?)으로 남원까지 문상을 다녀왔다. 역시 사회생활은 쉽지 않다.


남원에 대한 첫인상은 춘향이의 도시치고 한적하다는 것이었다. 남원이 주는 명성에 걸맞지 않게 도시가 관광지로 개발되지 않았다. 다른 도시라면 춘향이를 내세운 관광지와 남원 추어탕 집이 곳곳에 있을 법한데, 상권이 활성화되지 않았던 것 같다.


다음역인 곡성은 영화 '곡성'이 기억에 다였다. 게다가 공포 영화를 좋아하지 않아서 영화도 보지 않았다. 그 외에 곡성에 대한 기억은 없었다.


순천은 드라마 '응답하라 1994'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주인공들이 서울 출신 동기들과 술자리에서 출신 지역 가지고 옥신각신하다가 서울 출신 동기가 순천 고추장이 유명하지 않냐는 질문에 다들 발끈해 이구동성으로 "그건 순창!!!"하고 외치던 장면이 떠올랐다.


여천은 처음 들어봤다. 정말 국내 여행을 안 다닌 티가 너무나도 났다. 심지어 여천은 KTX 정착역임에도 불구하고 처음 들어봤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와중에 어느새 여수에 도착한다는 방송이 나왔다.


그나마 종착지인 여수에 대한 기억은 다른 지역보다는 나았다.

여수 하면 가수 장범준의 '여수 밤바다'가 가장 먼저 떠올랐다. 화려한 조명 불빛이 가득한 바닷가 야경일까? 아니면 칠흑같이 어두운 밤바다의 모습일까? 대체 여수 밤바다의 모습이 어떻길래 아련하고도 애절한 멜로디가 나올 수 있었을까?


그다음으로는 얼마 전 읽었던 역사학자 임용한 박사의 '임진왜란' 책이 떠올랐다. 임진왜란 발발 당시 이순신 장군이 여수 좌수사로 근무 중이었다. 전란 속에서 불세출의 전쟁 영웅의 전설이 여수에서 시작됐다.


마지막으로 10여 년 전 서울에서 언론사 생활을 정리하고 GS칼텍스로 내려간 친구 K가 떠올랐다. 사실 나에게 여수 하면 K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한번 보러 가야지하고 마음만 먹지만, 내가 워낙 여행을 즐기지 않아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미적거리다 보니 어느새 10년이 지났다. 하지만 자주 보지는 못하더라도 가끔 안부만 주고받아도 의지가 되고 위안이 되는 친구다. 여수에 내려간다니 여수 현지인이 추천해 주는 맛집, 관광 명소를 잔뜩 소개해 줬다. 심지어 서울에 사는 가족들 보러 가는 일정까지 하루 늦췄다고 한다. 고마우면서도 이제야 내려가는 것이 미안했다. 그 친구를 만나면 "반갑다 친구야!"를 외쳐 볼까?


산천 507호가 지나쳐 온 지역들에 대한 이미지 대부분 사람들에 대한 기억이다. 실제 아는 사람이든, TV를 통해 접했던 누군가에 대한 기억이 남아 있었다. 결국 우리의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여러 가지 단순한 정보보다는 사람 간의 인연, 관계에 대한 기억이 아닐까? 그래서 사람에 대한 기억이 오래되어도, 사소해도, 중요하지 않아도 머릿속에 더 오래 남아있는 것 같았다. 이번 여수에서는 함께한 여자 친구와 어떤 기억을 만들어 돌아갈지 기대가 됐다.


"이번 역은 이 열차의 종착지인 여수엑스포역, 여수엑스포역입니다."


<끝>

매거진의 이전글 초록에 푹 빠졌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