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가신 어머니께서 초록색을 좋아하셨다. 체력이 약해 늘 피곤해하시던 당신께서 초록색을 보면 피로가 풀리는 것 같다고 하셨다. 문제는, 그 초록 사랑이 내 생활에 까지 이어졌다.
초등학교 때였던 것 같다. 나와 내 동생의 겨울 파카는 초록색이었다. 처음에는 초록색과 옅은 갈색 안감으로 앞뒤를 바꿔 입을 수 있는 오리털 파카였다. 그다음 해엔 그냥 초록색 파카였다. 그 외에도 초록색 옷이 있었다. 올 겨울도 초록색이냐고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았다.
초록색. 그 당시 생각해 보면 튀는 색이었던 것 같다. 보통은 어렸을 때는 남색, 베이지색, 하늘색 등 무난한 색상의 옷을 사서 입히는데, 초록색은 왠지 이질적이고 눈에 확 튀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살짝 촌스럽다는 느낌이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초록색에 대한 설명하기 어려운 거북함이 마음 한켠에 자리 잡았다. 싫어하진 않지만, 굳이 선호하지는 않는 색이 초록색이었다.
그 후 어머니께서 초록색 옷 사주겠다 하시면, 어린 시절 기억이 나서 질색을 하곤 했다.
그렇게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거쳐 군대에 갔더니 초록 얼룩무늬 군복을 입고 26개월을 지냈다. 그 당시는 심지어 군대에서 나눠준 속옷도 국방색(짙은 연두색)이었다.
초록이 군대의 기억과 합쳐져, 초록을 좋아할 수 없었다.
그 후 바쁘게 사회생활을 하며 색에 대해 특별한 감흥 없이 지내왔다.
그랬는데!!
나이 50을 앞둔 2024년 봄부터 갑자기 초록이 눈에 들어온다. 단순히 인공적인 초록색이 아니다. 자연의 초록이 흑백 화면에 초록색을 입힌 것처럼 선명하게 다가왔다.
퇴근길 강변북로를 타고 일산으로 가다가 상암동 공원길을 지나면서, 주말에 일산호수공원을 달리면서, 심지어 일본 홋카이도 삿포로에 놀러 가서도 초록만 눈에 띄었다.
나무에, 풀밭에, 공원에서, 거리에서, 곳곳에 초록이 눈부신 햇살을 받아 반짝인다. 고개를 들어 나무를 바라보면 받는 햇살을 양에 따라 짙은 초록, 새 파란 초록, 익숙한 초록, 연두색이 서로 어지럽게 얽히고설켰다. 그런데 그 모습이 어지럽기는커녕 청량함을 준다.
일본 홋카이도 삿포로시에 위치한 홋카이도대학 교정의 명소 중 하나인 '은행나무 가로수길'에 파란 은행 나뭇잎들이 가득 피었다.
살랑살랑 부는 봄바람에 나뭇잎들이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춤을 추기 시작하면, 초록의 매혹적인 춤사위에 매혹되어 멍하니 서서 바라보기 일쑤다. 청량함의 춤사위가 아름답고 유혹적이다.
그리고 함께 뿜어 나오는 피톤치드향까지 어우러지면 마음이 개운하다.
여름철 뜨거운 햇빛을 피할 수 있게 초록 양산으로 만든 그늘 밑은 천국이다. 뜨거움을 피하면서 느끼는 그 시원함은 갈증에 물 한 모금과 같다.
어째서일까? 갑자기 눈 커플에 자연의 색 초록이 씐 까닭은.
어느 날 갑자기 흑백 화면에서 갑자기 나타난 초록이 아니다. 평상시에도 자주 볼 수 있는 초록이다. 그리고 매년 겨울이 가고 봄이 오면 보는 초록이다. 그런데도 올해 유독 초록이 눈에 밟힌다.
남자가 나이가 들면 꽃을 보인다던데, 나도 그런 것일까? 물론 그럴 나이긴 하다. 군말 없이 인정!
곰곰이 생각해 봤다.
아마도 삭막한 겨울을 두 눈으로 생생하게 지켜봐서일까?
매주 주말 일산호수공원을 달리기 시작한 지 올해로 2년째다. 특히 겨울철 새벽에 일어나 어두컴컴한 호수공원을 달리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곤 한다. 나뭇잎이 다 져서, 앙상하게 뼈만 남은 나무들 사이를 달리다 보면, 겨울의 적막함과 삭막함을 새삼 느끼게 된다. 생동감이라고는 전혀 없이, 앙상하게 뼈만 드러낸 나무들이 겨울의 혹독함을 견뎌내고, 봄이 오면 어떤 모습으로 변할까 하는 상상을 하며 달렸다.
일산호수공원을 달리면서 좋아하게 된 구간이 있다. 봄이 찾아오고, 여름이 되면 자전거 도로를 따라 풍성하게 핀 나뭇잎이 우거진, 마치 숲길 같은 길을 달리는 것을 좋아한다. 그리고 그 나무들이 뿜어내는 생명의 숨결인 피톤치드향을 맡으면 마음이 청량해진다. 겨우내 그리웠던 그 내음. 그 길을 달리는 것 자체가 즐겁다.
일산호수공원에서 내가 좋아하는 길로 자전거 도로 양쪽으로 가로수 나무들이 잎을 피워 마치 숲길을 달리는 것 같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면 내가 기억하는 그 초록이 돌아오리라는 기대를 안고 겨울을 지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