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린이 다이어리 85
※ 이른 아침 오사카성 공원에서 바라본 천수각 모습
"다니마치욘초메, 다니마치욘초메"
전철 안에서 역 이름이 방송된다. 우리나라로 치면 "이번 정차역은 다니마치욘초메역입니다. 내리실 문은~"의 내용이겠지만, 일본어가 짧은 관계로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은 역 이름인 "다니마치욘초메"다.
시간은 오전 6시 30분이 좀 안 됐다. 이 이른 시간에 홀로 전철을 타고 다니마치욘초메역을 찾은 이유는 오사카 러닝 성지로 불리는 '오사카성' 산책로를 달리기 위해서다. 일요일 아침이라 그런지 지하철은 한산했다.
구정연휴를 맞아 오사카에 놀러 왔다가 새벽 러닝을 위해 오사카성 공원을 찾았다.
달리기에 재미 들리고 나서 해외 러닝 코스를 찾아보다가 오사카성 산책로에 대한 블로그를 우연히 알게 되었다. 예전에 오사카를 방문한 적은 있지만 오사카성을 가보진 않았다. 하지만 오사카성은 과거 일본 전국시대에 풍신수길로 더 유명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건축하고, 그의 아들이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전국 시대를 통일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저항하며 버틴 곳이 오사카성이다. 나중에 찾아보니,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건축한 오사카성은 허물어지고 후대에 다시 세워진 것이 현재의 오사카성이지만, 오사카성은 전국시대 정점에 섰던 권력의 상징이자 몰락한 세력의 처절했던 저항의 역사의 현장이었다.
사진으로 본 천수각은 흰색 바탕에 초록색 지붕으로 덮였고 곳곳에 금색 장식이 된 깔끔한 느낌의 성이었다. 그리고 오사카성을 둘러싼 연못인 해자까지 웅장할 것 같았다. 그런 오사카성을 둘러싼 산책로 코스가 왠지 근사할 것 같았다. 나도 어지간한 달리기에 중독된 듯하다. 좋은 코스를 발견하면 그 코스를 달리고 싶어 나도 모르게 엉덩이가 들썩 거리니 말이다. 그 후 오사카성 달리기는 나의 버킷리스트가 됐다. 그리고 이른 아침 나 홀로 오사카성을 달리기 위해 이른 아침 오사카성을 찾았다.
한 손에 구글맵을 킨 스마트폰을 들고 설레는 마음으로 다니마치욘초메역에 내렸다. 구글맵에 따르면 9번 출구로 나가 오사카 역사박물관을 지나면 오사카성 공원이 나온다. 행여나 길을 잃을까 스마트폰을 꼭 쥐고 출구에 나왔다. 날이 제법 밝았다. 굳이 스마트폰으로 지도를 볼 필요가 없었다. 저 멀리 도로 건너 2명의 러너가 달리고 있었다.
'그래. 러너들만 쫓아가면 오사카 성에 가겠구나!' 실제로 그랬다.
러너들을 따라가니 금방 오사카성 공원에 도착했다. 공원 입구에 산책로 지도가 세워져 있었다. 블로그에서나 보던 그 지도다. 오사카성 산책로는 '짧은 코스(Short Course)'와 '긴 코스(Long Course)' 두 개가 있었다. 짧은 코스는 오사카성을 둘러싼 안쪽 해자 주변으로 도는 코스로 2.9km다. 긴 코스는 바깥 해자 밖으로 도는 코스로 3.5km다(오사카성을 보호하는 긴 연못인 해자가 안쪽, 바깥쪽 2개가 형성되어 있다). 짧은 코스를 돌고 긴 코스를 돌면 약 6km, 적당한 거리다.
기온은 약 10도. 2월인데 한국보다 기온이 10도가량 높았다. 바람막이, 얇은 긴팔 티셔츠, 얇은 긴 추리닝 바지면 충분했다. 딱 달리기 좋은 기온이다. 매주 주말 실외 달리기를 한 탓에 기온에 대한 감각이 있었다. 10도 정도면 사실 반팔티에 바람막이만 입고 달려도 된다.
아스팔트 바닥에 짧은 코스 스타트 지점을 알리는 표시가 보여, 따라 달렸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공원 지도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고 달릴 걸 그랬다. 무작정 바닥에 사인을 보고 냅다 달렸다. 꿈에 그리던 오사카성을 달린다는 설렘에 마음이 급했다. 왼쪽으로 넓은 해자를 끼고 달렸다. 일본의 성은 우리나라 성과는 확연히 달랐다. 전국시대에 내전이 심했어서, 성의 방어가 필수적이었다. 그래서 높은 성벽 주변으로 넓은 해자가 형성되어 있었다. 공격하는 입장에서는 해자를 건너 성벽을 올라야 하는데, 그냥 봐도 해자를 건너 성벽에 오르기 힘들어 보였다.
초행길이라 잠시 멈춰 서서 해자를 구경했다. 달리기도 중요하지만 오사카성의 풍경도 기억에 담고 싶었다. 옆으로 다른 러너들이 지나갔다. 관광 모드라 천천히 달렸다. 바닥에는 짧은 코스를 알려주는 이정표가 곳곳에 보였다. 그런데 아뿔싸. 짧은 코스가 오사카성을 가까이서 돌 것이라고 예상하고 천수각으로 향하는 성 안쪽통로로 들어가 버렸다. 나중에 보니 짧은 코스는 안쪽 해자 주변을 도는 코스였다. 사실 오사카성을 가까이서 보고 싶었던 마음이 컸다. 성 안쪽으로 들어가니 저 멀리서 체조를 하는 한 무리의 어르신들이 보였다. 일산호수공원에서도 자주 보던 익숙한 풍경이었다. 나라는 달라도 공통점이 있구나 싶었다. 사실 태극권인지 체조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리고 천수각 앞에 도달했다. 높은 돌담 위에 하얀 천수각이 솟아 있었다. 뭔가 건물이 깔끔하고 세련된 느낌이었다. 그리고 밖에서 오르기 쉽지 않겠다 싶었다. 예전에 읽었던 일본 전국시대를 배경으로 한 소설 '대망'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군대가 오사카성을 점령하는데 애를 먹었는지 이해가 됐다. 성위의 공격을 피해 성안으로 오르기란 불가능해 보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 짧은 코스 사인이 안보였다. 그래서 천수각 주변으로 눈에 띄는 길을 따라 달렸다. 마침 앞에 커플 러너가 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들어보니 한국인 커플이었다. 대화를 들어보니 이들도 초행길이었다. 나를 비롯해 다른 한국인 러너들이 찾은 것을 보면, 러너들이라면 한 번은 들리는 곳이 이곳, 오사카성이 달리기 성지가 맞긴 한가보다.
"어디로 가야 해? 이 길이 맞아?" 이들도 나처럼 길을 잃은 모양이다. 왠지 위안이 됐다.
커플의 대화 소리를 듣고 괜히 따라가다가 멋쩍어 질까 싶어 그들과 반대 방향으로 달렸다. 짧은 코스를 따라 성 주변을 돌고 출발지점에 와서 스마트 와치를 확인했는데, '아뿔싸' 달리기 모드가 안 켜져 있었다. 달린 기록이 저장되지 않았다.
아쉽지만 잠시 숨을 고르고 스마트 와치 달리기 모드를 켜고 긴 코스 이정표를 따라 다시 달렸다. 오사카성 공원 바깥쪽으로 달리는 러너들이 보였다. 거리가 있어서인지 짧은 코스보다는 긴 코스가 러너들이 더 많았다.
'러너들을 따라가면 길을 잃진 않겠지!'
또 길을 잃었다. 그냥 바깥쪽 해자를 따라 달렸어야 하는데, 앞선 러너들이 해자 안쪽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또 따라 들어갔는데 표지판을 찾을 수 없었다. 공원 안에 들어가니 스타벅스가 보였다. 우리나라 경주에서도 그렇고, 교토에서도 그렇지만, 스타벅스와 전통 양식 건물의 만남은 볼 때마다 새로운 느낌이 든다. 이것이 스타벅스 문화의 유연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두리번, 두리번거리다가 저 멀리 가는 러너들을 따라 달리니 다시 사인이 나왔다. 그 후 쭉 사인을 따라 달렸다.
짧은 코스를 돌고, 긴 코스를 돌았더니 마지막에는 힘이 부쳤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길만 잘 따라가면 이정표가 잘 되어 있어 스마트폰을 꺼낼 필요가 없어 좋았다. 오사카성 공원 코스는 전체적으로 쾌적했다. 긴 코스와 짧은 코스 길이 넓은 편이었다. 게다가 새벽이어서 인파가 없어 쾌적하게 달렸다.
이번 오사카성에서는 다른 러너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겨울인데도 반바지를 입고 뛰는 러너들도 보였다. 그리고 참 달리는 자세가 다양하다 싶었다. 유독 일본이라서 그럴까? 다른 사람들의 자세에 눈이 갔다. 자세가 이상한 것 같아도 다들 나보다 빨랐다. 체력을 더 키워야겠다.
오사카성은 오사카의 대표적인 러닝코스로 꼽힌다. 오사카에 관광온 러너들을 위한 러닝 베이스도 운영하고 있는데, 이곳에서 러닝화, 운동복 그리고 러닝 후 샤워까지 할 수 있는 시설이 구비되어 있다고 한다. 아쉽게도 이용하진 못했다. 그리고 얼마 전 열린 오사카 마라톤 대회가 열려 코스를 살펴봤다. 오사카성이 출발점, 결승점이 될 정도로 오사카에서 상징적인 곳이었다.
다만 오사카성 코스는 생각보다 감동이 크진 않았다. 너무 기대를 했던 것 같다. 일산호수공원을 달린 것처럼 오사카성을 둘러싼 공원을 달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달리고 나니 후련했다. 다른 블로거에서 오사카성의 야경이 멋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이번에는 새벽 달리기로 만족하기로 했다. 괜히 무리했다가 여행지에서 탈 날 수 있다.
그래도 "버킷 리스트 목록을 하나 지웠다."는 생각에 흐뭇함이 밀려온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