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픽션이 듬뿍 담긴 캐릭터 열전 / 중드 리뷰
사실 삼국지에 대해 잘 모르고 크게 관심은 없었는데, 지인의 추천으로 보게 된 작품이에요. 영화 ‘광해’와 초반 설정이 비슷해요. 후한 말 황제 유협에게는 숨겨진 쌍둥이 동생 유평이 있었고, 자신이 황실 핏줄인지도 모르고 살던 유평은 승하한 유협을 대신해 한헌제가 되는 스토리예요. 후한 멸망 전 격변의 시기를 실제로 겪은 한헌제는 극중에서 유협이 아닌 유평인거죠.
후한 말을 시대배경으로 하지만 역사적 사실에 픽션이 듬뿍 담긴 드라마였어요. 그리고 그 픽션들은 대부분 로맨스였습니다. 그래서 재밌었냐 하면 재밌기도 했고, 아니기도 했어요. 유평과 복수의 로맨스는 비교적 재밌었는데, 사마의와 당영의 로맨스는 뒤로 갈수록 흥미를 잃었습니다. 그리고 주인공들뿐만 아니라 조비, 곽가 등 주변인물들의 심경 변화에도 로맨스가 꽤 큰 비중을 차지하죠.
삼국기밀에서 인물들을 움직이는 동력에는 역사적인 사실도 중요하지만 로맨스 또한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극적이고 드라마틱한 재미를 위해서 역사에 픽션을 많이 버무리고, 원작 소설과도 달리 각색을 많이 거친 것 같아요. 원작 소설에서는 사마의와 당영의 로맨스는 없다고 하더라구요. 그리고 로맨스보다는 정치적인 이야기가 더 많다고 해요.
이 드라마는 역사 속 실존인물과 가상의 인물들이 뒤섞여 있고, 실존인물들에게도 픽션이 많이 가미되어 있어요. 하다못해 주인공인 유평도 가상의 인물이죠. 그렇지만 큰 틀에서 보면 역사가 스포기 때문에 캐릭터들에게서 느껴지는 감정은 아예 새롭게 창조된 가상의 캐릭터를 볼 때와는 달랐던 것 같아요.
일단 우리는 한헌제가 후한의 마지막 황제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극 내내 보여지는 주인공의 고군분투가 결국 성공적으로 끝맺지 못할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픽션으로 창조된 한헌제의 서사 때문에 주인공을 응원하게 되지요. 그래서 이 괴리에서 느껴지는 시청자들의 박탈감을 해소하기 위해 또 다른 픽션을 가미해서 역사적 사실과는 다른 결말을 주기도 합니다. 그리고 한헌제에게 부여한 서사가 역사와는 다를지 몰라도 극 안에서는 꽤 그럴듯하고 설득력 있어요. 마지막에는 시청자들도 한헌제에게 감화되는 느낌이에요.
그리고 한헌제 역할을 세상 지켜주고 싶은 마천우 배우가 연기하다보니 황후와 사마의가 목숨 바쳐 한헌제를 지키려는 게 이해가 되더라구요. 그렇지만 처음에는 좀 답답합니다. 저런 난세에, 저런 권력싸움과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신념을 지키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차라리 작은 희생을 치르더라도 대의를 이루는 게 맞는 거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들어요. 그렇지만 한헌제는 처음부터 끝까지 선량함과 도의를 지키고, 그래서 대의를 포기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역사가 스포가 되다보니, 한헌제가 그렇게 대의를 포기할 때마다 안타까워요. 저때 조비를 구하지 않았다면, 저때 조가네 자식들을 죽였으면 역사는 달라졌을까 이런 생각이 들거든요.
시골 유생이었던 유평이 점점 황제의 위엄을 갖추고, 자신만의 신념을 지키며 변화해가지만, 한헌제 캐릭터의 변화는 그렇게까지 드라마틱하진 않아요. 아마도 선량함과 도의를 지키려는 한헌제 캐릭터의 색깔이 쭉 유지되서 그런 것 같아요. 오히려 극 안에서 드라마틱하게 변화하는 건 한헌제의 주변 사람들입니다. 황후나 사마의가 그렇고, 반대편이라 할 수 있는 조비, 곽가, 심지어 조조마저 그러하죠. 그리고 이런 변화를 위해 인물들마다 서사를 부여합니다. 그래서 삼국기밀은 역사와는 다를지라도 매력적인 캐릭터들의 열전처럼 느껴졌어요.
그리고 이 과정에서 서사를 가장 많이 부여받은 건 조비입니다. 그러나 실제 역사상 인성적 문제가 많았던 조비를 극 안에서 설득력 있는 캐릭터로 만들려다보니 서사를 너무 많이 부여한 게 흠이었어요. 단건차 배우의 연기력으로 설득시키고자 하지만, 그래도 시청자들은 조비의 심경변화를 따라가기 힘듭니다.
황후에 대한 흠모, 황제에 대한 동경, 아버지의 인정과 애정에 대한 갈구, 형제들에 대한 자격지심, 왕월을 사부로 두며 익힌 권법 등이 한데 모여 어디로 튈지 모르는 캐릭터가 됩니다. 그래서 어느새 한헌제를 제거하려하고 가장 큰 적으로 생각하는 조비로 변해있는데, 단건차 배우가 연기하다보니 그렇구나 하게 되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그러나 이러한 변화를 통해 조조가 인품이나 능력이 뛰어난 조식이 아닌, 자신과 가장 닮아 있는 조비를 후계자로 택하는 지점은 흥미로웠어요.
극중 여러 변곡점에서 급격하게 변화하는 조비보다 오히려 아주 조금씩 미세하게 캐릭터의 색깔이 변화하는 곽가 캐릭터가 매력적이었어요. 삼국기밀은 이 사람이 빌런인가 싶으면, 그 뒤에 더 큰 빌런이 나오고, 또 그 사람 뒤에 더 큰 빌런이 나오는 식의 구성이에요. 극 초반 만총이 빌런인가 싶은데, 만총 위에 곽가가 있죠. 그래서 곽가가 빌런인가 싶으면, 조조가 등장하는 식이에요. 그리고 이런 구성에서 캐럭터가 입체적이고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건 곽가입니다.
만총보다 더 위험하고 무서운 놈 같던 곽가는 한헌제를 만나면서 점점 입체적으로 변하고, 조조가 등장하면서는 더 다면적인 캐릭터로 변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와 달리 조조 앞에서의 곽가 눈빛을 잊을 수가 없더라구요. 늘 다른 이를 여유 있게 보던 곽가가 조조 앞에서는 여유가 없어지고 경계하면서도 충성하고 존경하는 게 느껴졌거든요. 그렇지만 그런 곽가가 점점 조조를 대하는 것처럼 한헌제도 대하게 되죠. 그리고 이러한 변화를 왕양명 배우가 섬세하게 표현합니다.
그리고 삼국지연의에서조차 가상의 인물이었던 초선이 곽가의 정인으로 나와요. 처음 등장할 때만 해도 설마 그 초선이 이 초선이야 했는데, 맞더라구요. 그리고 초선의 정체를 알면서도 마음에 품고, 초선의 죽음으로 인해 최후를 맞는 설정 때문에 곽가라는 캐릭터가 꽤 로맨틱한 캐릭터가 되어 버려요. 사실 삼국기밀의 남캐들이 다 그렇긴 하죠.
가장 픽션스러운 로맨스는 사마의와 당영의 로맨스라고 생각했는데, 드라마 보면서는 원작에 이 설정이 없다는 걸 몰랐어요. 근데도 뭔가 서브커플을 위해 만들어진 로맨스라는 생각은 들었습니다. 아마도 마지막 당영의 죽음으로 인해 사마의가 극적으로 변화하는 설정을 위해서인 것 같은데, 사실 그 드라마틱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유평과 사마의의 관계가 공고하기 때문에 극적인 느낌이 덜하긴 하죠.
유평이라는 인물 자체가 가상의 인물이기 때문에, 한헌제와 사마의의 관계도 당연히 픽션입니다. 실제로 역사상 사마의는 조비 쪽 사람이었죠. 극중에서 사마의가 조조 진영으로 들어가게 되는 계기가 있지만, 픽션인 유평과의 관계 그리고 당영과의 로맨스로 인한 것이니 허구성은 더 부각됩니다.
그리고 유평과 사마의 둘의 관계는 말 그대로 형제애예요. 광총의 눈을 피해 겉포장만 형제애나 지기애로 꾸민 관계가 아니라 그냥 찐형제입니다. 어릴 때 사마가로 보내진 유평은 사마의와 형제처럼 자라죠. 그리고 극 초반 유평에게 사마의는 형이자 스승이자 멘토같은 존재예요. 그렇지만 그런 유평이 한헌제가 되며 서서히 사마의에게서 독립해가는 이야기처럼 느껴지기도 했어요.
극 초반 유평은 사마의가 자신을 위해 천하라도 대적할 사람이라는 믿음이 있고, 여러 우여곡절 끝에 두 사람이 다른 길을 가게 되면서 두 번에 걸친 표면적인 결별을 함에도, 두 사람 사이에는 여전한 믿음이 깔려 있죠. 그래서 두 사람이 헤어질 때는 정말 가슴이 아프기도 했어요. 그렇지만 두 사람 사이가 이런 관계기 때문에 사마의에 대한 복수의 질투가 이해가 됩니다. 초반에 복수 또한 유평에게 멘토같은 존재였죠. 그래서 왠지 유평이 복수에게 끌리는 이유가 사마의와 닮아 있어서라는 생각도 들더라구요. 그리고 극이 점점 진행되면서 두 명의 멘토를 가졌던 유평이 사마의로부터는 독립하고, 복수와는 관계가 역전되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당영은 미망인인 왕비의 신분이지만, 알고보면 원소가 길러낸 검객인 설정인데, 캐릭터가 그닥 입체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았어요. 그리고 사마의와 사랑하면서 더 평이해집니다. 근데 이건 황후인 복수 캐릭터도 그러해요. 극 초반에는 거의 황후에 빠져들면서 봤는데, 한헌제와 황후의 로맨스가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자, 복수 캐릭터 자체의 매력은 좀 사그라들더라구요. 그렇지만 만천 배우의 연기는 정말 후덜덜합니다. 초반의 차갑고 냉정한 황후부터, 한헌제의 신념에 점점 동조되어 가는 모습, 한헌제보다 비교적 적극적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모습, 간혹 보이는 귀여운 모습까지 정말 다채로운 연기를 보여줍니다. 초반 만천 배우가 없었더라면 극을 이렇게까지 잘 이끌어가지 못했을 거란 생각이 들더라구요.
한헌제인 유평은 자신의 신념을 끝까지 지키고, 자신만의 결말을 만들죠. 처음에는 저렇게까지 신념을 지키는 모습이 답답했었는데, 한발을 물러서면 모든 걸 내주어야 하는 벼랑 끝의 황제로서 자신과 나라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돌파구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더라구요. 그리고 마지막 한헌제의 선택을 보면, 한헌제는 이미 알고 있었죠. 자신과 조조의 힘의 균형을 통해서만 후한을 유지하고 평화를 지킬 수 있다는 걸요. 그리고 역사와는 다른 해피엔딩은 한헌제보다는 황후인 복수에게 더 행복한 결말 같았어요. 실제 역사에서는 비참한 죽음을 맞아야했던 복수가 비록 픽션일지라도 저런 결말을 가진 게 다행처럼 느껴졌어요.
조절이 곽가가 죽어가면서 준 금낭을 조식, 조비와 함께 볼 때는 환장하겠던데, 그로 인해 죄책감을 느끼고 한헌제를 지키고자 하는 건 캐릭터 자체로는 설득력 있었어요. 그래서 역사와는 다르게 유평을 복수에게 보내주죠. 실제 역사에서 한헌제 곁을 끝까지 지킨 건 조절이지만요.
결말부에 오히려 선양을 하는 한헌제는 여유 있고 위엄 있게 그려지고, 선양을 받는 조비는 조바심 내며 이상조차 모르는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그리고 황제가 된 조비의 허무와 산양공이 된 한헌제의 평온도 대비적으로 보여주죠. 그런데 중드에서 저런 위정자의 허무주의적인 모습은 자주 보게 되는 것 같아요.
결말에서 사마의와 한헌제가 스치듯이 만나는데, 사마의가 한헌제를 먼저 발견하죠. 그리고 무엇을 보고 있냐는 물음에 천하를 보고 있다고 답합니다. 천하를 마음에 품은 한헌제를 상징하는 말이지만, 훗날 천하를 통일하는 건 사마의의 후손이죠. 그래서 각자 다른 방식으로 천하를 품은 두 주인공을 보여주는 것 같았습니다.
그 외에도 신료인 순욱, 가후/ 사제지간인 공융, 조언/ 양표, 양수 부자/ 왕복, 왕월 형제/ 환관인 장우, 냉수광/ 사마가 쪽의 양준, 사마랑, 서복/ 동승 쪽의 동비/ 조가네 쪽의 조식, 견복/ 원소 쪽의 반영, 비선생 등 실존인물과 가상인물을 적절히 섞어 주요캐릭터들과 관계성을 만들어 가는데, 로맨스로 귀결되는 면이 없지 않아 있지만 이렇게까지 캐릭터들 간에 관계성을 만들어내는 게 대단하다 싶었어요.
이후에 ‘사마의 : 미완의 책사’를 보고 있는데, 삼국기밀과 같은 시기의 같은 인물들을 다루는데도 완전히 다른 이야기처럼 느껴지네요. 이만 마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