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진정령으로 중국식 형재애 혹은 지기애 드라마에 적응을 했습니다. 광총의 검열은 피하면서, 원작의 분위기를 담으려는 제작진들의 노력 속에서 드라마가 그리려는 이야기를 읽어내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죠. 시청자를 단련시키는 광총이에요. 그래서 시청자들은 선택할 수 있습니다. 표면적으로 드라마가 그리고 있는 이야기로 볼 것인지, 그 밑에 깔려 있는 원작의 이야기로 볼 것인지요. 의도치 않게 지기애의 나라가 되어버린 중드의 마케팅 전략일까요?
진정령의 경우 원작의 분위기를 은유적으로 담았다고 생각해요. 반면 산하령은 비교적 직접적으로 보여줍니다. 그건 두 작품의 캐릭터 차이일 수도 있고, 스토리 진행의 차이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진정령의 망기와 무선의 경우 자신의 상황이나 마음을 직접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어쩌다 말을 해도 굉장히 함축적이고 은유적으로 표현해요. 그리고 내단을 잃었다거나 한담동에 갇혔다거나 자신이 겪은 시련은 더더욱 서로에게 말하지 않아요. 그렇지만 시청자들은 이미 이들이 겪은 일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러고 있는 둘을 보며, 마음이 아프고 가슴을 부여잡고 드라마를 보게 되죠.
산하령의 경우 두 사람의 관계설정이나 감정선은 비교적 심플해요. 어린 시절 인연이 있었던 두 사람이 헤어지고, 다시 재회합니다. 그런데 한쪽은 상대를 알아보고, 다른 한쪽은 상대를 알아보지 못해요. 그럼에도 서로를 지기로 여기고, 생사를 함께 하게 되죠. BL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설정인데, 무협의 이야기에 들어가 있다보니 더 극적인 효과를 발휘합니다. 근데 저 설정을 초반부터 알려주지 않습니다. 꾸준히 단서를 던지면서 짐작하게 해요. 스토리는 모두 보여주고 인물의 감정선을 숨겨두던 진정령과 달리, 산하령은 스토리는 숨겨두고 인물의 감정선은 보여주는 느낌이에요.
근데 그 숨겨진 스토리가 굉장히 복잡합니다. 두 사람의 관계설정만 떼어놓고 보면 심플한데, 그 이야기의 저변에 깔린 스토리가 복잡하다고 할까요. 그래서 비교적 쉽게 인물의 감정선을 보여주는데도, 두 사람의 대화에서 함축된 의미를 찾고, 문장의 행간을 읽으려 하고, 여백의 숨겨진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했던 것 같아요. 스토리를 파악하고 두 사람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는 단서가 그 속에 있으니까요. 실제 대화의 내용이 함축적인 것과, 스토리의 공백으로 인해 그렇게 느껴지는 것은 다른 문제인데, 효과 면에서는 비슷했던 것 같아요. 산하령의 경우 스토리의 공백을 시청자가 스스로 메꾸고 짐작해가면서 봐야하는 드라마인데, 인물의 감정선에서 그걸 찾으려 하면서 보게 된 거죠.
그럼 이야기의 저변에 깔려 있는 스토리가 어떻게 복잡한지 살펴볼게요. 일단 산하령은 4대에 걸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등장하는 인물과 문파, 세력들이 여러 갈래이고, 4대에 걸쳐서 이리저리 얽혀 있습니다. 가계도 혹은 관계도를 그릴 수 있을 지경이에요. 1대는 장명산 검선 엽백의와 마장 용장청입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펑요 내지는 지기였던 것 같아요. 2대는 엽백의의 제자이자 용장청의 아들로 추정되는 용현을 중심으로 하는 무리인데, 여기서부터 얽히고 설킵니다. 사계산장 진회장, 용연각 용작, 신의곡 삼걸 악봉아, 견여옥, 곡묘묘, 오호맹 고숭, 조경, 육태충, 장옥삼, 심신이 그들인데, 이들 중에는 부부도 있고, 배신자도 있습니다.
그리고 주인공들이 등장하는 3대입니다. 천장의 수령이자 사계산장 장주였던 주자서, 귀곡주이자 온대선인인 온객행, 용연각 소각주 용효가 그들이에요. 그리고 귀곡의 십대악귀, 독갈의 사대자객, 개방, 천창 등 극 초반 얘네들이 일을 많이 벌입니다. 오호맹 뿐만 아니라 태산파, 화산파, 청풍검파도 등장하고, 조경-희상귀, 우구봉-염귀와 같이 귀곡과의 인연도 있습니다. 조경을 필두로 하여 독갈, 귀곡, 용연각의 연결고리도 있죠.
그리고 4대도 있어요. 장옥삼의 아들이자 주자서의 제자이자 용연각의 후계자인 장성령, 온객행의 시녀이자 딸처럼 키운 무심자살 고상, 청풍검파 제자이자 고상만 바라보는 조위녕, 고숭의 딸이자 장성령과 정혼한 고소령이 그들이에요. 그래서 온객행이 우리 아서에게 제자 며느리도 있었다며 놀리기도 하죠. 밑에 세대로 내려올수록 수식어도 많이 붙죠. 실로 복잡합니다. 이 모든 인물들간의 관계를 드라마를 보면서 이어야 하고, 스토리도 짐작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 복잡한 스토리 사이에서 두 주인공의 관계를 파악해야 합니다. 주자서가 변수라서 온객행이 따라다니는 게 아니라는 것쯤은 알 수 있어요. 그렇다고 단순히 흥미로워서? 첫눈에 반해서? 골상이 고와서? 따라다니는 것도 아닌 것 같아요. 뭔가 사연이 있음직합니다. 그럼 우리는 이 사연을 찾아야 해요.
그런데 워낙 온객행이라는 캐릭터가 능글맞고 속내를 알 수 없는 인물이기 때문에, 저도 처음에는 온객행이 주자서에게 진실과 거짓을 섞어 말한다고 생각했어요. 근데 어느 순간부터 온객행이 진실을 말한다고 느껴지더라구요. 난 거짓말 같은 거 안 해, 널 속이기 싫어서였어, 서로 알게 된 후부터 난 널 속인 적 없어, 이런 말들에 세뇌가 된 건지, 줄기찬 들이댐에 면역이 된 건지 모르겠지만, 그냥 온객행이 믿어지더라구요. 아마 그래서 주자서도 점점 온객행한테 마음을 열고 지기로 받아들인 것 같아요.
그리고 온객행의 행각으로 봐서는 용현의 아들이라 짐작할 법도 한데, 온객행이 난 용씨가 아니야, 이리 말할 때 의심조차 안 한 것 같아요. 언제부터 이리 온객행을 믿게 된 건지 저도 모르겠더라구요. 그리고 이전부터 온객행이 신의곡 출신이라는 단서는 계속적으로 주어졌죠. 아빠한테 들었다는 뼈의 개수, 의장에서 본 아빠의 모습, 회상 속 엄마의 모습, 고숭의 사당에서 스쳐지나가며 보여준 견여옥의 위패, 중반으로 들어서며 신의곡 후계자냐는 용호의 물음에 그런 셈이라 인정하는 온객행과 용작의 회상 속 젊은 용현 무리들을 통해, 온객행의 정체에 대한 답은 나왔습니다.
그럼 그런 온객행이 어떻게 귀곡에 들어가게 되고, 곡주가 되었으며, 주자서와는 어떤 인연이 있었는지만 남았어요. 유달리 사계산장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온객행을 보면, 둘은 어릴 적 사계산장에서 인연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첫 만남에서 주자서에게 관심을 보인 것도 자서의 발놀림, 유운구궁보 때문이었죠.
어렸을 때 소중한 사람이 준 개를 키웠어, 평생을 책임지겠다 했는데 그 약속을 저버렸어. 어릴 때 놀고 싶을 땐 제대로 놀 수 없었고, 무공을 익히고 싶을 땐 사부가 없었어. 이런 말들도 그냥 하는 말은 아닌 것 같아요. 그리고 아서라며 친근하게 부르고, 자서의 방문도 벌컥벌컥 열고 들어오는 등 온객행에게는 주자서가 익숙하고 친밀한 사람인 것 같아요. 결정적으로 주자서에게 독한 말 내뱉고 술에 취해서 하는 말 중 진심으로 원했으나 사라진 것도, 다시 나타났으나 세월이 흐르고 상황이 변해 가질 수 없게 된 것도 자서인 것 같아요.
그러나 온객행은 주자서에게 자신의 정체나 어릴 적 인연에 대해 밝히지 않습니다. 대신 자신의 마음은 줄기차게 전해요. 그러면서 ‘날 친구로 생각한다고? 내가 널 어떻게 생각하는지 안 물어봐?’ ‘나 지금 속으로 너무 기쁜 거 알아? 왜 기뻐하는지 안 물어봐?’라며 결정적인 순간에는 주자서에게 선택권을 넘겨요. 아마도 자신의 정체를 밝힐 순 없지만, 내심 자서가 자신을 알아봐주길 바랐던 것 같아요.
그럼 온객행이 왜 그렇게 주자서의 원래 얼굴을 보고 싶어 했을까 생각을 해보면, 확인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유운구궁보를 구사하고, 백의검을 갖고 있고, 무엇보다 날개뼈가 예쁘니 자서일거라 확신했겠죠. 근데 어릴 적 모습이 남아 있을 자서의 얼굴을 자기 눈으로 보고 확인하고 싶었을 거 같아요. 그래서 전혼사갑을 요리조리 만져보는 자서를 먼발치서 바라보며 ‘주자서, 역시 맞았어. 주자서야’라며 조용히 읊조리죠.
두 사람의 첫 만남 이후 온객행의 행적은 거의 확인 작업입니다. 월주에서 첫 만남 때 보법을 보고, 보법 확인하려고 경호산장까지 따라가죠. 다시 월주로 돌아와 백의검을 보고, 주서라는 이름을 듣고, 역용술을 알아보고, 날개뼈까지 확인해요. 천애객잔에서 거지떼 나타났을 때는 백의검 확인하려고 일부러 나서지 않죠. 결국 태호에서 떠봐서 미안하다며 사과하고 밤새 피리 붑니다. 그리곤 불쌍한 척 해서 겨우 마차 몰아 호주까지 가요.
삼백산장 연회에서 귀곡 푸닥거리에 조씨의장까지 갑니다. 거기서 주서란 이름은 들어 본 적 없는데, 넌 대체 누구야?라며 마지막 확인까지 해요. 이후 미향에 취해 어릴 적 주자서를 봤겠죠. 여기서 좀 슬퍼요. 주자서의 환각 속에는 온객행이 없고, 온객행의 환각 속에는 주자서가 있는 거니까요. 자서의 환각 속 진회장과 진구소가 있었듯, 온객행의 환각 속에는 아빠, 엄마, 자서가 있습니다. 온객행에게는 자서가 엄마, 아빠만큼이나 중요한 사람이었나 봐요. 드디어 호숫가에서 내상은 어쩌다 생겼어, 역용술 맞잖아, 네 진짜 모습 좀 보여줘, 엄청 씨름한 끝에 원래 얼굴을 봅니다. 의지의 온객행이에요.
저는 개인적으로 이 확인 작업 부분이 진짜 재밌었어요. 비록 자서가 거지꼴을 하고 있긴 했으나, 탐색전 느낌이랄까요. 분명 아는 사이인 것 같은데, 한쪽은 경계하고, 한쪽은 알아내려하고, 그로인해 수도 겨루고, 심리적으로나 보이는 면으로나 텐션이 살아있는 느낌이었어요. 그 와중에 온객행은 흥미롭다, 수상하다, 벗이 되고 싶을 뿐이다, 부정도 하고, 틈틈이 걱정도 하죠. 가만보면 자서도 그럼 벗겨보든가, 우리 관계는 설익었다, 더 이상 욕심내지 마라, 선을 그으면서도 여지를 남깁니다. 관계의 지속을 암시한달까요. 계속봐야 벗기든지, 익히든지 할 거 아니에요. 그리고 이 모든 일이 6회 안에 다 이루어집니다. 중드는 초반이 재미없다는 편견을 깨줬어요.
장안의 화제였던 ‘아름답소?’ ‘완벽하지’는 해석하기 나름입니다. 골상이 고와 비범하다니, 내가 아름답니?/ 아름답기만 하게, 완벽해/ 이리 볼 수도 있고, 역용술에 허점이 없다니, (약간 비꼬듯이) 그래서 예쁘냐?/ 응, 완벽한 역용이야/ 이리 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광총의 눈을 피하기 위함인지 온객행이 완벽하지, 대사치자마자 바로 장공자, 이럼서 화제를 돌리죠. 대사 후에 몇 초간의 눈 맞춤이라도 더 있었더라면 빼도 박도 못하게 전자의 뜻인데, 여운 따위 허락지 않는 광총 땜에 후자의 뜻도 가능해요.
배우들의 애드립이라고 들었는데, 저렇게 극에 담았다는 건 제작진의 의도였으니, 광총과 제작진 사이의 숨 막히는 눈치싸움 같았달까요. 그리고 자서의 경우, 경호산장에서 자신의 보법을 참으로 아름다웠다고 표현한 온객행의 표현을 그대로 따와 되돌려 준 걸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내 보법이 아름답다고? 그럼 역용술도 아름답니?’ 뭐 이런 의미로요.
그럼 온객행은 왜 자신이 누구라고 밝히지 않을까요? 자신이 어릴 적 걔라고 하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말해야 하고, 그럼 귀곡주인 자신의 정체도 밝혀지니까, 그럼 자서와 함께 할 수 없을테니 말할 수 없었던 것 같아요. 모든 계획을 끝낸 후 자서와 떠날 작정이었던 것 같기도 해요. 줄기차게 표현하는 마음과 저런 숨겨진 마음까지 짐작이 되니, 자서가 시한부라는 걸 알게 될 온객행이 슬슬 걱정되기 시작합니다. 막상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자서는 의연한데, 온객행이 힘들어할 게 예상이 되거든요. 아니나 다를까 빗속에서 피리도 깨부수고, 자서 니 말이 다 맞다며 눈치도 보고, 안 죽을 순 없냐며 사정도 합니다.
이맘때쯤 온객행은 자신이 짜둔 판의 허점과 20년전 사건의 진상에 대해 알게 되면서 혼란을 겪습니다. 그리고 이때 옆에서 든든하게 버텨주는 건 주자서예요. 표면적으로 자서를 살뜰히 챙기고 지키는 건 온객행인데, 그런 온객행을 지켜주는 게 주자서인 것 같은 느낌?
근데 주자서는 이전부터 정체를 알 수 없는 온객행을 돕고자 하고, 시한부인 자신을 동정하거나 가식적으로 대한다 여기면서도 자신에게 마음을 열기를 바라요. 그리고 용연각에서 자신과 함께 다리 아래로 떨어진 온객행을 보며, 자신에게 진심으로 대한다는 걸 알게 되죠. 게다가 성령에게도 진심이라는 걸 알고 더 오픈마인드가 된 것 같아요. 니가 기절한 건 나 때문이다, 여기서 못 나가면 내 잘못이다, 서로 자기 탓하기 여념이 없습니다. 그러면서 둘은 지기로 거듭납니다. 온객행이 성령을 우리 아이라고 하는데 전혀 위화감이 없어요. 사계절 봄인 곳으로 가 노년을 보내자며 노후계획도 세워요.
이쯤에서 장성령에 대해 말해보자면, 진정령의 남사추 같은 캐릭터입니다. 진정령에서 남사추의 정체가 거의 마지막에 밝혀지는 것과는 달리, 산하령의 장성령은 초반부터 그냥 두 사람의 아이 같아요. 어리숙한 것 같은데 두 사람에 대한 눈치는 어찌나 빠른지, 어색하게 앉아 있는 두 사람을 보며 ‘온숙, 빨리 달래 보세요’라던지, 자서의 화가 풀리자마자 능글맞게 꽃밭의 꽃을 얼마든 꺾을 수 있다며 헛소리하는 온숙을 보며 ‘사부님, 마시고 기분 푸세요’라며 술을 건넵니다. 그리고 사부바라기인 온숙에게 ‘온숙, 사부님은 괜찮으시니 저한테도 관심 좀 주세요’라며 두 사람 사이를 환기시키기도 해요. 아상누님의 가르침에 따라, 쟤들이 날 납치했다, 사부를 공격했다, 눈 파려고 했다, 온숙과 사부님께 고자질도 잘 합니다.
그리고 환기의 느낌을 가장 강하게 갖고 있는 건 엽백의 캐릭터였어요. 일단 엽백의만 등장하면 가슴이 뻥 뚫리면서 재밌어집니다. 절대고수에다 입담도 좋고, 극중 발생하는 여러 사건에 대한 해결책을 가진 인물이랄까요. 두 사람과 처음 만났을 때는 ‘소년 시절은 붙잡을 수 없으나 늘 마음속에 있기 마련이지’라며 둘의 관계를 꿰뚫어보는 말을 하기도 해요. 늙은 요괴 맞죠. 처음에는 오동이닷! 했는데, 점점 오동은 생각이 안 나더라구요. 배우의 연기와 성우의 더빙이 시너지를 이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