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구조적으로 보자면 진정령은 다음과 같아요. 일단 망기의 마음을 살며시 보여줘요.(그 와중에 무선이는 못 듣고 못 봐요. 시청자인 우리만 듣고 봅니다.) 그리고 헤어짐, 언제 다시 볼지 기약 없음, 그 사이 무선 또는 망기 소금밭 뒹굼, 이후 재회, 이것의 반복이에요. 과거편은 주로 저런 구조입니다. 현재편으로 넘어와야 비교적 평안한 시청이 가능해요. 그래서 스토리를 다 알고 있어도, 둘의 행복한 장면을 봐도 눈물이 날 지경이에요. 그리고 현재편에서도 과거의 진상이나 그로 인한 망기와 무선의 사연이 나오기 때문에 여전히 아파요. 첫 정주행을 하나 다시 보나 늘 아름답고도 아픈 이야기입니다.
반면 산하령은 극중에서 첫 만남 이후 늘 함께 합니다. 서로 상처주는 말을 하고, 각자 갈길 가자고 말은 하지만, 성령이나 자서가 위험에 처하면 당장 달려오는 온객행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자서도 극중 온객행의 묘사처럼 무뚝뚝해도 마음 여린 캐릭터라, 화가 오래가지 않아요. 온객행이 느물거리며 능글대면 언제 그랬냐는 듯 붙어 다닙니다. 그래서 둘 각자의 사연이 가슴 아프지만, 보는 동안은 평안한 시청이 가능해요. 심지어 온화하고 달달하기까지 합니다. 물론 주자서는 시한부고, 온객행은 어쩌다 귀곡주가 됐는지 알 수 없으니 불안하기는 하죠. 거기다 복잡한 스토리를 파악하고 짐작하느라 바쁩니다. 그래서 스토리에 대한 파악이 다 끝난 후 다시 보게 되면 그 달달하던 장면들도 다른 느낌으로 봐질 것 같아요.
캐릭터적으로 보자면 진정령에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건 위무선이고, 산하령에서는 온객행이에요. 기구한 사연과 그로 인해 마도에 서있는 것까지 닮아 있죠. 서사의 무게가 실린 캐릭터라 시청자의 감정이입을 유도하는 캐릭터입니다. 그렇지만 A부터 Z까지 사연을 보여주는 위무선과 달리, 온객행의 사연은 차츰차츰 밝혀지기 때문에 위무선처럼 감정이입하기 쉬운 인물은 아니에요. 오히려 그 미스터리함으로 시청자를 끄는 것 같아요.
그리고 그런 그들을 도우려 하고, 바른 길로 이끌고자 하는 건 남망기와 주자서입니다. 남망기가 완고한 바름의 캐릭터라면, 천창의 수령이었던 주자서는 조금 더 유연한 면이 있죠. 그래서 남망기의 내면은 거의 감춰져 있는 반면, 주자서의 내면은 독백형식으로 보여줘요. 극중에서 사건에 대해 추리하고, 온객행의 정체에 대해 짐작합니다. 남망기가 마도에 빠진 무선을 끊임없이 걱정하고 도우려는 것처럼, 주자서도 강호 전체에 깽판을 놓으려는 온객행을 걱정하고 도우려 합니다. 그리고 망기는 무선이 왜 마도에 빠졌는지, 자서는 온객행이 왜 저러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걱정하고 돕고자 하는 게, 그래요, 지기애죠.
두 사람은 열번루에서 안길사현을 보며, 고산유수의 이야기에 대한 해석도 다르게 해요. ‘높은 산과 흐르는 물, 지음을 찾기 어렵도다’ ‘산과 물은 중요치 않으나, 지기를 만나는 건 중요하네’ 온객행은 부정적이고, 주자서는 긍정적이죠. 그래도 두 사람 모두 지기로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은 통한 것 같아요. 그리고 자서가 안길사현을 소개할 때, ‘두 사람은 부부야, 원래는 동문이었어’라고 하는데 이후에 밝혀질 온객행과 자서의 관계를 암시하는 것 같아요. 사건에 대해 추리해 갈 때도 온객행은 극단적이고, 주자서는 중립적이에요. 그리고 주자서의 말버릇 중 그 후에는?을 보면, 신중한 성격인 것 같아요. 자신도 진상을 다 알고 판단하려 하고, 타인에게도 그러하죠. 성령을 제자 삼을 때 자신의 진짜 정체를 들은 후에 결정하라고 하잖아요.
그리고 산하령에는 여기에 한 레이어가 더 있습니다. 진정령의 경우 두 사람이 처음 인연을 쌓는 것부터, 여러 우여곡절로 기약없는 헤어짐과 만남을 반복하는 것, 죽음을 건너 재회하는 것까지 쭉 보여줍니다. 그래서 남망기의 내면이 감춰져 있지만 감정선은 쭉 연결돼요. 이건 위무선도 마찬가지라 차츰차츰 망기의 마음을 알게 되는 무선의 감정선도 쭉 연결돼요.
그렇지만 산하령은 어릴 적 두 사람의 인연이 숨겨져 있어요. 그래서 주자서를 대하는 온객행의 태도가 재밌고, 정체를 모르는 온객행을 지기로 여기고 도우려는 주자서가 흐뭇하고 그렇죠. 줄기차게 들이대면서 타격 1도 받지 않는 캐릭터와 줄기차게 밀어내면서 끌어당기는 캐릭터의 조화랄까요. ‘아름답소?’ 대사를 먼저 친 것도 자서였고, 온객행의 손 스윽 훑으면서 술병 가져오던 것도 자서였죠. 온객행이 자서에게 ‘네가 계속 따라다니게 했잖아’라고 하는데 정말 그러합니다.
온객행이 고운 날개뼈에 집착하는 것도 자서의 날개뼈가 예뻐서 그런 거겠죠. 그리고 틈만 나면 골상이 고운 걸 보니 비범하다, 허리는 가늘고 다리가 길어 사랑스럽다, 네 잘생긴 얼굴만 보여주면 된다, 얼굴도 예쁜데 수정처럼 깨끗한 마음까지 지녔다, 당췌 칭찬을 하는건지 꼬시는건지 모를 멘트 날리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그럼 자서는 넌 떠들어라, 난 모르것다, 이런 표정으로 잠자코 있어요. 대꾸도 안 해요. 그러거나 말거나 온객행에게 자서는 미인의 표상인가 봐요. 그 와중에 틈틈이 조위녕도 질투하고, 심지어 아상도 경계해요. 남편으로 삼기라도 하게? 떠보기도 하죠. 넌 숫총각이라 귀신이 안 무서운 거야, 맞지? 그럼 풍류도 좀 즐겨봤어? 자서의 과거도 궁금해 합니다. 늘 그렇듯 대답은 듣지 못해요. 야영하며 손수 만든 음식도 일단 자서한테부터 줘요. 그럼 자서는 당연하다는 듯 받아서 성령한테 주죠.
제자 삼은 성령이를 다시 악양파에 맡기고는 세상 달달하게 서로 이름 세 번 부르기도 하죠. 이것도 배우들 애드립이라고 들었는데, 이리 극중에 살아서 볼 수 있으니 감사할 따름이에요. 그리곤 ‘넌 평소 뭐 하면서 시간을 보내? 한가할 땐 보통 뭐해?’라고 묻는데, 저건 소개팅에서나 할 질문 아닌가 싶었어요. 사계산장 장주이자 천창의 수령이라는 자서의 신분 파악은 끝났으니 사적인 부분이 궁금했겠죠. 그리고 어릴 적 얘기를 하면서 자신의 사적인 부분도 슬쩍 꺼내놓습니다.
중반을 넘어서며 주자서도 온객행의 정체를 알게 돼요. 사계산장의 사제였던 견연으로 밝혀지며, 지기애에 형제애까지 더해져요. 그렇지만 아직 귀곡주라는 정체는 몰라요. 불안요소죠. 극 초반 역용술 아니라고 빡빡 우기던 자서처럼, 사제 아니라고 빡빡 우기는 온객행입니다. 근데 그러기엔 사건의 진상을 듣는 온객행의 눈빛이 너무 슬펐고, 따스히 안아주는 주자서를 마주 안기도 했죠. 아니라고 우겨봤자 이미 늦었어요. 저대로 성령이랑 셋이 나란히 손잡고 사계산장으로 돌아가면 좋으련만, 귀곡주로 벌여놓은 일이 많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아직 빌런 조경의 실체도 밝혀내지 못했고, 천창의 진왕도 관련이 있을 것 같아요. 사방이 지뢰밭입니다.
주자서가 동굴에서 단호하게 ‘자네가 말해야 내가 도울 수 있지’할 때부터 형님미 뿜뿜했는데, 온객행을 침상에 곱게 눕혀 놓고 ‘언젠가 넌 내게 마음을 열거야. 네 마음속을 봐야 도울 방법을 찾지’할 때 정점을 찍습니다. 근데 온객행이 사제라는 게 밝혀지며, 자서는 더 너그러워지고, 온객행은 보호본능을 자극해요. 온객행이 귀곡주라는 걸 알게 되더라도 사제를 위해 목숨도 마다하지 않을 주자서가 예상이 되거든요. 주자서는 그런 사람이니까요.
이쯤에서 주자서 캐릭터에 대해 말해볼게요. 주자서는 죽음을 불사하고 자유를 찾은 인물이에요. 눈 쌓인 서북지역에서 암살자로 살다가 죽을 날 받아놓고 따뜻한 강남지역으로 왔죠. 그래서 인생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 특유의 달관하는 삶의 자세가 깔려 있는데, 그게 캐릭터를 더 매력적으로 만듭니다. 뱃사공의 부탁으로 백리 길을 달려 성령을 오호맹에 맡기고, 그래도 불안해서 주변을 맴돌아요. 온객행이랑 대판 싸우고도 악양파 어느 한 구석에 찌그러져 앉아 술을 마시죠. 덕분에 납치되는 성령을 바로 발견하기도 해요. 마음 약하고 정이 많은 캐릭터입니다. 그래서 천창이라는 진창에 발을 들이고 있었음에도 바른 사나이라는 느낌이 나는 것 같아요.
본인은 자유를 갈망하고 죽음을 받아들였는데, 주변사람들이 놓아주지를 않아요. 천창의 진왕도 쉽게 주자서를 놓아줄 것 같지 않죠. 심복인 한영도 자서를 따르겠답니다. 제자인 성령도 사부님 가는 곳이면 어디든 가겠데요. 그중 최고봉은 온객행이죠. 엽백의도 진회장의 제자가 죽는 꼴은 못 보겠답니다. 용작도 자서 목소리만 듣고 바로 알아보죠. 산하령 내 최고 인기남이에요. 본인이 의도했든 안 했든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죠.
근데 막상 본인은 시시때때로 달관합니다. ‘이렇게 2,3년을 사는 것도 예전처럼 헛되게 사는 것보단 나아’ ‘우리 같은 사람이 어찌 평생을 논하겠어. 관두자. 내 잘못인 것을’ 특히나 온객행과 관련되면 더 그러는 것 같아요. 어쩌면 가장 집착하고 싶은 대상이기 때문에 가장 달관한다고 할까요. 그래서 자신의 남은 시간동안 온객행을 돕고 싶어 하는 것 같기도 해요. 한영이 자신을 따르지 않고 잘 살기를 바라듯, 자신이 떠난 후 온객행이 잘 살기를 바라니까요.
성령에게도 마찬가지에요. 자신에게 제자가 어딨냐며 그리 틱틱거리더니, 막상 제자 삼고는 간이고 쓸개고 다 내줄 심산입니다. 스파르타 훈련과 애지중지 보살핌이 더해진 사부님이에요. 거기다 용작의 후계자로 성령을 덜컥 지정하죠. 자신이 제자로 삼은 만큼 성령을 믿기는 믿나 봐요. 온객행이 사제라는 걸 알았으니, 간이고 쓸개고 내줄 사람이 한명 더 늘었습니다. 보살필 사람이 많아서 죽기도 힘든 주자서예요.
온객행에게 ‘그런 눈빛은 거두는 게 좋겠소’라며 경계하고, ‘날 어떻게 생각하든 알 게 뭐야?’라며 회피하고, 지붕 위에서 달구경할 때는 쉿!이라며 말을 가로막기도 하죠. 온객행이 자신을 특별하게 여긴다는 건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아요. 다만 그 맘을 들여다보기는 두려웠겠죠. 그런데 시간이 점점 지나면서 굳이 말 안 해도 니 맘은 알고 있으니, 니 진짜 모습을 보여달라로 변해가는 것 같아요. 그래도 온객행이 자신을 보여주지 않자 ‘내 판단을 믿어보려고, 자넨 내가 아는 바로 그 사람이야’라며 그냥 믿기로 합니다. 그리고 계획에 실패하고 실의에 빠진 온객행을 본 이후로는 널 돕고 싶으니 니 마음을 열어달라로 한발 더 나갑니다. 줄기차게 들이대는 온객행에 가려져서 그렇지, 주자서의 마음의 색깔도 조금씩 변해가요. 그리고 이 시점에 사제라는 걸 알게 되는 것도 절묘하다고 생각했어요.
캐릭터에 대해 말한 김에 고상입니다. 온객행의 시녀라고는 하는데 막내동생 같아요. 온객행과 둘이 다니면 비주얼 남매입니다. 특히 첫 등장에서 상자 탁 밟고 날아오르는데 너무 이쁘더라구요. 산하령은 무협씬 중간중간 인물 클로즈업을 잡아줘서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귀곡이라는 험한데서 자라서 친절한 아가씨, 아름다운 낭자 이런 말에 굉장히 약합니다. 먹는 거에도 약해요. 조위녕이 이 점을 공략했죠. 조위녕과 오붓한 시간 보내고 있는 아상을 발견하곤, 바로 여동생 단속모드된 온객행이었죠.
‘그 사람이 있을 때 주인님이 사람 같거든요’ ‘저를 죽이신대도 주인님을 따르겠어요’ 아상 또한 온객행의 마음을 잘 알고, 필요한 말을 해줍니다. 함께 자라온 감인 것 같아요. 온객행이 빗속에서 그가 죽는다며 괴로워하자, 자서임을 눈치채고 박정사 일은 접어두고 혼자 시간을 보내게 내버려두죠. 조위녕에게 마음이 가면서도, 성령을 지켜야한다, 유리갑을 찾아야한다, 이 핑계 저 핑계대면서 자기합리화도 잘합니다. 온객행에게 촌철살인하다가도 어색하게 웃으며 적당히 물러나기도 잘합니다. 근데 그게 되게 귀여워요.
진정령에서 비슷한 위치의 캐릭터를 찾자면 강염리 같아요. BL의 세계에서 호감가는 여캐랄까요. 주인공에게 호의적이고, 때론 희생적이기까지 하죠. 초반부터 짝이 정해져 있어, 주인공들의 로맨스에 방해를 하지도 않습니다. 강염리가 한없이 따뜻하고 애정어린 지켜주고 싶은 캐릭터라면, 고상은 발랄하고 귀여운 동생삼고 싶은 캐릭터인 것 같아요.
그렇지만 강염리와 금자헌의 마지막을 생각하면, 고상과 조위녕도 불안하더라구요. 거기다 조위녕이 꿨다는 꿈도 불길했어요. 자기가 먼저 죽고, 고상이 뒤따라오는 내용이었죠. 강염리의 경우 극중에서 강렬하게 퇴장하기 때문에, 시청자의 가슴에 오래도록 남는 캐릭터죠. 저는 가끔 먹어보지도 못한 염리사저의 연근갈비탕이 먹고 싶고 그래요. 그래서 아상이 후반부에 어떻게 그려질지 걱정을 안고 보게 된 것 같아요. 아상도 염리사저 못지않게 온객행을 위해서라면 희생도 마다하지 않을 것 같았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