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일단 너무 재밌습니다. 중국판 펜트하우스라는 얘기를 어디선가 보고, 난 저런 막장이랑은 안 맞아, 이러고 넘긴 작품이었어요. 근데 지인분이 재밌게 보신다고 해서 1회 틀었다가 14회까지 쭉 정주행하고, 완결을 손꼽아 기다리다가, 못 참고 영자막으로 결말까지 보았습니다. 펜트하우스에 빗댄 저 소개는 오히려 드라마의 진입장벽인 것 같아요. 제가 보기엔 펜트하우스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작품입니다.
미모의 여인의 살인사건으로 드라마는 시작해요. 그리고 관련된 사람들의 진술을 통해 사건을 추적해 갑니다. 근데 그 진술자의 진술대로 극을 보여줘요. 저것이 진실인지, 진술자의 각색인지 우리는 모릅니다. 거의 마지막까지 진술자들이 자신의 입장에서 각색을 하기 때문에, 내가 이제껏 봐온 게 맞는건지 의심스럽습니다. 그러나 전달하려고 하는 주제는 매우 뚜렷한 작품이에요. 부제로 눈치채셨겠지만, 여성적 시선이 짙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이라면 한번쯤 보셨으면 하는 작품이에요. 추리장르의 특성상 스포가 감상에 방해가 될 수 있으니, 그냥 여기까지만 읽고 1회 트셔도 될 것 같아요.
총 16부작인데, 캐릭터별로 2회씩 구성되어 있습니다. 순서는 셰바오뤄-린다썬-린멍위-우밍웨-예메이리-예수쥔-옌융위안-중메이바오예요. 린멍위 에피까지는 늘 우리가 봐오던 장르물 느낌이에요. 드라마가 실제로 그리고자하는 이야기는 우밍웨 에피로 들어서야 나옵니다. 그러나 셰바오뤄-린다썬-린멍위 에피를 통해 분위기는 차곡차곡 쌓아가요. 어떤 분위기냐 하면 남성 진술자들의 진술을 신뢰할 수 없다는 걸요. 그리고 눈치 빠른 분이라면, 아마 여기서부터 여성들의 연대를 그릴 거라는 게 짐작이 되실 거예요.
사건을 추적하는 형사는 두명입니다. 편의상 남자형사는 중선배, 여자형사는 양형사라고 부를게요. 극 초반에 중선배를 뭔가 의뭉스럽게 그려요. 딸을 과하게 단속하고, 성희롱 혐의로 감사 중이고, 관련인 조사 중에도 맥을 끊는 등 그닥 믿을 만한 인물은 아닌 것 같아요. 그래서 시청자들은 자연스럽게 양형사를 신뢰할 만한 추적자로 택하게 됩니다. 근데 이게 주제랑 자연스럽게 연결돼요. 양형사가 예비시엄마 때문에 수사에 방해받고, 연애보다 일을 우선하고 싶은데 상황이 여의치 않은 모습들을 그리거든요. 그래서 피해자-관련인-양형사 사이에 모종의 동질감이나 공감의 순간들도 담습니다.
그러나 중선배의 저 의뭉스러운 모습도 사실은 트릭이에요. 딸인 줄 알았던 여자 아이는 딸이 아니었고, 성희롱 혐의도 누명이고, 수사도 뚝심있게 진행합니다. 근데 이것도 주제랑 연결돼요. 중선배는 극중 빌런인 최악의 계부와는 상반되는 모습이거든요. 성희롱 가해자의 부인들이 오히려 자신의 남편이 여자한테 억울하게 당했다고 토로하는 상황은 종종 볼 수 있죠. 부사수였던 여자후배는 부서장까지 진급했는데, 요령없는 중선배는 여전히 팀장입니다. 그래서 중선배는 남녀사이에 있을 법한 일들을 뒤집어서 빚어놓은 캐릭터인데, 이걸 처음부터 보여주지 않고 차차 보여주기 때문에 추적자로써 신뢰감을 획득해요.
그럼 추적자들에 대한 소개는 끝났으니,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자면, 처음에는 이 사건이 무얼 말하고자 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우밍웨가 쓴 소설 이야기가 나오면서, 아, 이 이야기를 하고자 했구나, 깨달음이 와요. 그리고 그 깨달음이 굉장히 처절해요. 극중에서 양형사가 처음부터 직감이 오는데 믿고 싶지 않을 때가 있다고 표현하는데, 딱 그런 느낌이에요. 메이바오가 당하는 고난은 여성이 유년기부터 겪을 수 있는 고통의 총체입니다. 엄마는 나쁜 남자를 만나고, 나쁜 남자는 자신과 엄마를 학대하고, 자신은 남동생을 위해 헌신적으로 희생하는, 그리고 현재는 죽음을 맞은 인물이에요.
그리고 남성의 시선에서는 한없이 따뜻하고 착한 성녀의 모습이거나, 자신의 허물마저 덮어주며 언제든 자신을 받아주는 창녀의 모습이거나, 혼자만의 상상 속에서 동경해마지 않는 이상형에 가까운 모습입니다. 반면 여성의 시선에서는 내 남편의 정부이거나, 내 파트너가 흠모하는 여인이거나, 죽음마저 아름다운 그래서 다른 여자들을 투명인간으로 만들어버리는 여자죠. 굉장히 상반된 이미지죠. 그러나 극이 점점 진행될수록 극중 여캐들도, 극을 보고 있는 시청자들도 메이바오에게 공감하고 자신을 투영하게 됩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메이바오가 겪는 고난들을 우리는 잘 알고 있거든요. 그래서 극중 여성들의 연대가 설득력이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8회가 그 정점을 찍었다고 생각하는데, 우밍웨와 메이바오가 서로 손을 잡을 때는 울컥하기도 했어요. 그리고 메이바오가 우밍웨에게 ‘나랑 나가자, 날 믿어’라고 하는데, 이 대사는 뒤에 예메이리 에피소드에서 그대로 반복돼요. 예메이리가 철저히 무너진 중제에게 ‘나랑 나가자, 날 믿어’라고 이야기하거든요. 착취적인 남녀관계를 탈출할 수 있는 돌파구는 여성들의 연대밖에 없다고 말하는 것 같아요.
그리고 예메이리 에피소드에서는 미혼여성이기 때문에 직장에서 당직을 도맡고 입양도 어려운 상황을 그려요. 그래서 단순한 사건의 발견자에서 지속적인 목격자가 되고, 악화되는 상황에 깊숙하게 개입하게 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기혼과 미혼, 기혼남성과 기혼여성 간의 불평등 등 젠더 문제 안에서 다룰 수 있는 여러 이야기들도 담고자 한 것 같아요.
저는 린다썬-리모리 에피까지만 해도, 메이바오와 리모리의 관계가 영화 주홍글씨의 이은주와 엄지원 같은 관계일 거라 짐작했어요. 근데 린멍위-딩샤오링 에피까지 오자, 단순히 여성 두 사람 간의 관계를 말하고자 하는 게 아니라는 감이 오더라구요. 그리고 리모리, 딩샤오링, 메이바오가 모두 사립 기숙학교 출신이라는 게 밝혀지자 어떻게 이들이 공조했는지 확신이 들었어요. 그리고 초반의 그 신뢰하지 못할 남자들도 공모에 가담했다는 느낌이 오더라구요. 근데 이런 이야기를 추리소설의 형식으로 담고 있는 겁니다.
저는 보면서 이 이야기는 여성작가 아니면 쓸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원작이 대만 여성작가가 쓴 소설이더라구요. 최근에 본 은비적각락, 침묵적진상은 이야기의 재미와는 별개로 아들-아버지에 대한 집착, 여성 피해자에 대해 배려하지 않는 모습 등 남성적 시선이 불편했는데, 마천대루는 이런 불편함이 완전히 제거된 그럼에도 굉장히 흥미롭고 재밌는 이야기와 형식을 갖춘 드라마였어요.
그리고 우밍웨와 메이바오가 묘사하는 학대피해자의 심리는 너무 사실적이라 소름끼칠 정도지요. 그리고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우밍웨의 소설 형식으로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도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해요. 피해자의 고통을 전시하지 않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저는 이 부분이 남성 창작자와 여성 창작자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고 생각해요. 남성 창작자는 피해자의 고통을 전시함으로써 주제를 전달하고자 하고, 여성 창작자는 피해자의 고통을 숨김으로써 주제를 전달한다고 느낄 때가 많거든요.
제가 만약 우밍웨 소설의 독자였다면, 3편 완결이 안 나오면 미쳐버렸을 것 같아요. 그리고 극중에서 우밍웨의 독자들이 오히려 마염의 사랑을 지지한다는 부분도 현실적이라 씁쓸하게 느껴졌습니다. 왜 남성의 학대가 사랑으로 포장되는지 알 수 없고, 하물며 여성들도 그렇게 생각한다는 게 무섭죠. 사회통념화 되어버렸다는 거잖아요. 우밍웨가 소설의 완결을 맺지 않은 건, 메이바오와 예수쥔을 지키기 위해서기도 하지만, 저런 행태에 대한 반항심리도 작용했을 것 같아요.
그리고 이 드라마의 키치한 부분은, 저렇게 여캐들을 신뢰할 만한 진술자로 만들어놓곤, 극 후반에 빌런 옌융위안의 시각으로 각색된 이야기도 들려준다는 거죠. 그래서 시청자들은 헷갈립니다. 내가 공감한 저 신뢰할 만한 진술들이 다 거짓이었단 말인가, 근데 중간에 살짝 트릭을 줘서, 오히려 저 진실에 신뢰성을 더 부여하는 것 같아요. 그리고 가해자의 치밀한 변명 속에서 피해자가 진실을 밝히기가 얼마나 힘든지를 보여주는 것 같아요.
그리고 극 후반에 반전이 또 나오는데, 이 반전도 어느 정도 예상은 가능합니다. 우밍웨의 소설 속 미옥과 준진에 대한 묘사를 통해 이미 단서를 줬어요. 허나 그렇게까지 잔혹했으리라 믿고 싶지 않을 뿐이죠. 그리고 그로 인해 얻은 예수쥔의 정신병력까지 이용하는 빌런을 보면, 참혹한 심정이 됩니다. 이게 드라마 상에서 극단적으로 극화되어서 그렇지, 옌융위안 캐릭터는 여성뿐만 아니라 자신보다 약한 남성에게도 착취적인 남성을 대표하는 캐릭터예요. 그리고 저런 인물을 정상적으로 벌하기가 얼마나 힘든지 우리는 이미 많이 겪어왔습니다. 그래서 극 속에서 여러 사람의 공조, 그리고 죽음까지 필요로 하는 거겠지요.
물론 극중 가장 중요한 에피이자 결말부인 중메이바오 에피로 들어서며, 맥이 좀 빠지긴 했어요. 결말까지 완벽했다면 이제껏 봐온 중드 장르물 중 첫손에 꼽을 만한 작품이 됐을 것 같은데, 갑자기 극이 착해진 느낌이라고 할까요. 모르겠어요, 중드 특유의 각색으로 인한 것인지, 원작도 이런 분위기일지 궁금해요. 국내 정발되지 않아서 원작을 볼 수가 없네요.
저는 여성들이 주체적으로 남성들을 공모에 가담시켰을거라 예상했어요. 근데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희생하는 모습으로 그려지더라구요.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여성들의 연대도 힘이 약해지는 느낌이었어요. 그리고 이쯤 오니 범인의 정체는 그닥 궁금치 않았습니다. 마지막까지 희생자의 모습으로 그려지는 메이바오가 안타까울 뿐이었어요. 그리고 어쩌면 이걸 말하고자 한 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학대로 인해 피해자의 삶이 어떻게 잠식되고 끝까지 침몰하는지를요. 우밍웨가 좋은 이야기에는 반전이 있다고 했는데, 현실은 이야기가 아니니까요. 개인적으로는 끝까지 독한 이야기로 밀어붙였다면 더 의미있지 않았을까 싶어요.
저는 주로 여성적 시선에서 이 드라마를 봤지만, 그냥 추리장르라 생각하고 봐도 흥미롭고 재밌는 드라마예요. 막상 쓰고보니 리뷰에 그렇게까지 스포를 많이 담고 있는 것 같진 않네요. 이만 마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