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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우지우 Sep 07. 2021

[일드] 나기의 휴식 & 콩트가 시작된다

일드리뷰

우연히 왓고리즘이 안내해준 ‘나기의 휴식’. 직장생활에 지칠대로 지치고, 남의 눈치보는데 인이 박히고, 연애나 결혼도 뜻대로 되지 않는 수많은 여성들이 공감하며 볼 드라마 같아요. 그럼에도 저 팍팍한 현실이 아닌, 제목처럼 주인공인 나기의 휴식을 보여주기에 힐링물이기도 합니다. 전남친이든 옆집남자든 나기에게 유익한 남자는 아닌 것 같으나, 저들 사이에서 나기만의 길을 찾아가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예상된 결말이라 더 좋았어요. 한동안 일드 안 봤었는데, 일드는 이런 매력이 있었지 하며 깨닫게 해준 드라마였어요.


그리하여 다시 왓고리즘이 데려다준 ‘콩트가 시작된다’. 가끔 채널 돌리다 얻어걸릴 때마다 남자 세 명이서 방구석에서 뭐 먹고 있거나 대화 나누고 있거나 이래서 이 드라마는 뭐지? 하며 넘겼었는데, 이런 내용이었다니ㅜㅜ


‘나기의 휴식’에서의 나기와 비슷한 상황으로 유예기를 보내고 있는 나카하마가 무명 개그 그룹 ‘멕베스’를 알게 되면서 시작되는 이야기예요. 그리고 이들이 얽히는 1~3회부터까지는 가히 감탄스럽습니다. 이야기가 직선적으로 흐르지 않고 나선형으로 흐른다고 해야 할까요. 소위 말해서 떡밥을 던지고 떡밥을 푸는데, 그 타이밍이 매순간 기가 막힙니다.


멕베스의 세 멤버 하루키, 쥰페이, 슌타 세 사람이 고교 동창에서 어떻게 개그 그룹으로 모이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부분이 특히 좋아요. 각자의 시점에서 그 이야기들을 보여주는데, 그냥 세 명이 같은 그룹을 할 운명이었다고 할 수밖에 없는 느낌이에요. 그리고 나카하마가 멕베스의 찐덕이자 성덕이 되는 과정도 그녀의 인생에서 필요한 순간에 날아온 행운이자 운명같은 느낌이에요. 근데 이걸 드라마로 기가 막히게 보여줍니다.


극중 멕베스의 첫 결성일이 2011년 6월 19일이고, 이들은 10년 후에 성과가 없으면 해체하기로 약속을 했었죠. 그리고 실제 드라마의 종영일이 2021년 6월 19일입니다. 제작진들이 참 배운 변태구나 싶으면서, 이 드라마가 어디로 나아갈지 느낌이 오죠.


감탄스럽던 3회까지 시청 후, 4회로 들어서며 슌타와 엄마 대면 장면에서 살짝 브레이크가 걸렸어요. 물론 이전 회차에서 슌타에 대한 떡밥들이 주어졌지만, 한회 안에서 슌타와 엄마의 갈등, 화해, 죽음까지 다 보여주려다보니 그랬던 것 같아요. 웬만한 엄마 에피에는 약한 사람인데, 슌타 엄마 에피에는 그렇게까지 약해지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왓챠의 감상평들을 슬슬 읽어보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이 드라마가 꿈과 잘 이별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코멘트를 보고 급히 브레이크를 풀었습니다.


사실 4회까지만 해도 멕베스가 정말 해체를 할지 말지 애매한 상태였거든요. 그리고 생각보다 빠르게 5회에서 멕베스는 해체를 결정합니다. 그리고 이쯤 오면 드라마의 이야기 구조가 어떤지 이런 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아요. 그냥 멕베스의 멤버들이 어떻게 꿈과 이별하는지, 나카하마 자매들은 어떻게 유예기를 지나갈지 지켜보게 돼요.


그리고 6회에서는 어느새 하루키의 독백을 받아 적고 있는 제가 있었습니다. ‘쥰페이가 지난 10년간 변함없이 믿어왔던 것을 하나라도 이루게 해주고 싶었다. 멕베스로는 이룰 수 없었지만 지난 10년을 낭비한 게 아니라고 생각하길 바랐다. 고등학교 때부터 연장하듯 지내온 지난 10년이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고 생각했으면 했다.’ 멕베스, 하루키와 쥰페이 사이의 서사를 알고 저 독백을 들으면 마음이 마음이...ㅜㅜ


그리고 저리 쥰페이의 미션을 완수해주고 하루키는 어두운 거리를 쓸쓸히 걸으며 다시 독백을 해요. ‘해체 후의 일은 지금까지 생각해본 적 없었다. 쥰페이는 가게를 물려받고 나츠미와 결혼한다는 명확한 비전이 있다. 슌타는 아르바이트 중인 꼬치구이집에서 사원이 되라고 권유받았고 프로게이며 출신으로 ‘뿌X뿌X’ 일본 1등이라는 경력도 있다. 나는 아무것도 없다. 싸울 만한 무기도, 남들에게 자랑할 만한 경력도, 다음 목적지도 아무것도 없는 건 나뿐이다.’


사실 멕베스의 주축 멤버는 하루키였어요. 콩트를 짜고 대본을 쓰는 것도 하루키죠. 그래서 쥰페이와 슌타도 하루키가 해체하자고 말할 때까지 어떠한 결정도 내리지 않고 기다립니다. 결국 해체를 결정하고 6회에서 나오는 하루키의 모든 독백들이 가슴을 때려요. 현재로선 멕베스를 그만두고 미래가 가장 불투명한 것도 하루키죠. 그래서 저는 하루키는 극작가가 되려나? 이런 뻔한 결말을 예상했습니다.


그러나 이 드라마는 이러한 예상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다른 방식의 결말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어찌 보면 이것도 처음과 연결되는 나선형 구성이에요. 저는 이 드라마의 각본가와 제작진들이 배운 변태라는데 한 표 걸겠습니다.


사실 중반을 넘어서부터 이성적으로 볼 수가 없고, 8회로 넘어오면 차차 쌓아오던 나카하마의 존재감도 어마어마해져요. 하루키가 나카하마에게 재취업한 직장을 선택한 이유를 묻는 부분에서 그녀의 대답과 표정은 정말 인상적이죠. ‘안내데스크 사진에 멋진 꽃이 장식되어 있었어요.’라고 답한 후, 계속 궁금해 하는 하루키에게 싱긋 웃으며 아주 살짝 고개를 까닥하는데, 정말 일본인스러우면서, 선배 같으면서, 그녀 같으면서...이후의 대답들도 과거의 일들을 겪어온 나카하마다운 말들이었어요.


이후 하루키는 그런 사소한 게 일하는 이유가 되냐고, 형에게도 나카하마에게도 묻습니다. 그리고 나름의 답을 찾은 것 같아요. 누구나 거창한 꿈을 가지고 일하는 건 아니니까요. 극중에서 계속하는 것도 지옥, 그만두는 것도 지옥이라고 표현하는데, 굳이 예체능 계열이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공부나 직업이 비슷한 것 같아요.


늘 고독했던, 그래서 친구들과 함께이길 바랐던 슌타는 혼자만의 모험을 떠나고, 현실적인 문제를 하루키와 여친에게 넘겨왔던 쥰페이는 현실적인 가업을 잇습니다. 그리고 생수-메론소다-연못의 물을 지나 하루키만의 결론에 도달합니다. 그리고 다시 첫 콩트였던 ‘물 문제’ 콩트가 시작되죠.


마지막으로 그저 남겨두고 싶어서 적어보는 멕베스의 콩트들. 물 문제-옥상-기적의 물-버려진 고양이-노래방- 금도끼 은도끼-무인도-패밀리 레스토랑-결혼 인사-이사. 이만 마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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