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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우지우 Oct 17. 2021

21년 BIFF(부산국제영화제) 일지 : 8일차

감독님 하고 싶은 거 다 하세요’s day / 영화리뷰

13시 <배드 럭 뱅잉> : 루마니아루마니아 


이 날 영화들의 테마는 ‘감독님 하고 싶은 거 다 하세요’가 되겠다. 물론 의도한 건 아니고 보다보니 그렇더라. 영화제 때 꼭 그런 영화 한편씩은 있다. 딱히 내 취향은 아닌 것 같은데, 들리는 풍문으로는 영화제 아니면 못 볼 영화라고 하여 호기심이 동하는 작품. 거기다 골 때리게 웃기는 작품이라고 하여 본 영화. 그러나 막상 영화를 보고 든 생각은 영화제 아니면 볼 수 없는 작품이긴 한데, 굳이 영화제에서 볼 필요도 없다;; 


그리고 이번에 느꼈는데 프로그래머, 평론가, 그게 아니더라도 소위 스스로를 시네필이라고 칭하는 사람들이 재밌다 혹은 웃기다고 하는 작품들의 재미를 난 잘 모르겠다는 것이다. 그렇게 낚여서 본 영화가 올해 세편인데, <불> <낮에는 덥고 밤에는 춥고> 그리고 <배드 럭 뱅잉>. 역시 영화제 영화는 들리는 풍문이 아니라 내 감대로 봐야하는 것이다. 


영화가 시작되면 (극 중에서 추후 유출될) 성관계 동영상을 찍고 있는 남녀를 보여준다. 적나라하게 다 보여주기 때문에 야한지도 모르겠음. 그리고 1막이 시작된다. 영화는 총 3막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미 저 영상이 유출된 이후의 상황이다. 1막에서 주인공 에미는 끊임없이 부쿠레슈티 시내를 배회한다. 교장을 찾아가서 사태를 수습하려 하고, 거리의 소음을 피해 오락실에 들어가 남편과 통화를 하고, 약국과 마트를 가고, 거리에서 또 다시 남편과 통화를 한다. 교사인 에미는 남편과 합의하에 영상을 찍었고, 영상의 유출경로는 영화에서 명확하게 말해주지 않는다. 여튼 저 영상이 온라인상에 퍼지면서 주인공이 사직까지 권고 받는 곤란한 상황임을 보여준다. 


부쿠레슈티 시내는 시종일관 구급차 소리가 들리고, 사람들은 마스크를 쓰거나 턱에 걸치고 있고, 자동차 소리 등 거리의 소음으로 가득하다. 이 소음들을 1막 내내 들려주면서 관객들도 신경쇠약 직전의 상태로 끌고 가는데, 영화 속에 등장하는 루마니아 사람들도 그러하다. 여성과 남성, 남성과 남성, 젊은 세대와 나이 든 세대, 가난한 자와 그렇지 않은 자간의 갈등과 반목을 끊임없이 보여준다. 이 영화는 거의 모든 것이 맥거핀인데, 사실상 거리를 배회하는 에미는 맥거핀이고, 에미가 서 있는 자리 혹은 지나간 자리의 사람들을 보여주는 것이 목적이다. 그리고 그렇게 보여주는 루마니아의 풍경으로 결국 루마니아의 속살을 드러낸다. 누군가 루마니아는 살면서 안 가야겠다고 감상을 남겼던데 공감한다. 


2막은 백과사전식 나열. 단어에 대한 단편적인 영상과 감독의 정의가 나열된다. 그를 통해 루마니아 사회, 정치, 종교, 역사 거의 모든 것을 비판(?) 조롱(?) 염세(?)한다. 


3막은 난장토론. 학부모 회의에 소집된 에미는 거의 인민재판 당하듯이 학부모들에게 추궁 당하고, 정말 필터 없는 비난과 조롱 앞에서도 에미는 자신만의 논리로 당당하게 대립한다. 그러나 저런 사람들에게 논리로 맞서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싶을 시점, 영화는 3개의 엔딩을 제시한다. 근데 3가지 모두 비관적. 사실상 성관계 동영상도 맥거핀이고, 이 난장토론으로 하고 싶은 말 다 때려 넣는 게 감독의 의도가 아니었을까 싶은데, 그게 발칙하다면 발칙하고 불편하다면 불편한 장면들의 연속. 모든 것이 맥거핀인 영화에서 굳이 의도를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겠지만, (그리고 왠지 감독의 의도도 아닌 것 같지만) 3가지 결말 모두 결국 성관계 동영상이 유출된 여성에게 구원은 없다는 식의 결말이어서 뒷맛이 씁쓸한 영화. 그러나 그것조차 다 농담이라고 치부해버리는 영화. 


16시 <하늘을 바라본다바람이 분다> : 조지아조지아 


나는 저 <배드 럭 뱅잉>을 보고 연달아 <하늘을 바라본다, 바람이 분다>를 본 사람. 라인업이 어쩌다 이리 되었지;; 이 영화도 <배드 럭 뱅잉>처럼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릴 영화. 지인들이 너무 좋다고 해서, 그리고 나도 꼭 보고 싶었고, 무엇보다 이상하게 믿음이 가는 그녀, 박가언 프로그래머의 추천작이라 선택함. 같은 시간대에 평이 좋던 ‘매스’가 있었으나, 왠지 <하늘을 바라본다, 바람이 분다>도 지금이 아니면 못 볼 것 같은 예감. 그리고 나의 예감은 맞았다. 이 영화는 <배드 럭 뱅잉>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감독님 하고 싶은 거 다 하세요’ 느낌. 이 정도면 감독의 뚝심에 박수를 쳐줘야 할 정도. 


‘연애 세포가 아직 살아있는 시네필이라면 이 사랑스럽고, 환상적이며, 매혹적인 영화를 놓쳐서는 안될 것이다’는 프로그램 노트의 멘트는 일정 부분은 맞고, 일정 부분은 틀리다. 일단 이 영화는 연애 이야기가 아니다. 물론 두 주인공이 첫눈에 반해서 서로를 찾아가는 여정을 담은 이야기지만, 사실 이 영화에서 사건이나 서사는 중요치 않다. 사건과 사건 사이의 시간, 공간, 그 안의 사람들이 더 중요한 영화. 그래서 결국 조지아라는 나라를 가보고 싶게 만드는 영화.(<배드 럭 뱅잉>과 굉장히 상반되지 않는가.) 물론 영화 속 조지아는 정치, 사회, 역사가 깔끔하게 배제된 무해하고 아름다운 진공의 공간에 가깝다. 그리고 이에 대해 감독도 인지하고 있고, 그를 독백으로 한탄(?) 자조(?)하기도 한다. 그러나 정말 끈덕지게 보여주는 조지아의 풍광, 햇살, 녹음, 공원, 하천, 거리의 강아지들, 무엇보다 사람. 얼굴이 바뀐 주인공들부터 어린 꼬마아이들, 나이든 카페 사장님까지 주인공들의 주변에 존재하는 조지아의 얼굴들을 담는다. 그리고 인물들의 눈높이에 맞춘 바스트샷으로 인물들에 대한 애정을 담는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이 영화는 사랑스러운 영화가 맞다.   

 

그리고 느리게 흘러가는 영화를 따라가다 보면 문득 깨닫는다. 그래, 영화는 결국 시간과 공간을 담는 예술이지, 그래서 결국 그 안에 담긴 인물들도 함께 담기는 매체지. 굳이 영화가 역사, 정치, 사회를 담고, 메시지나 주제를 담아야 하는가, 영화는 영화 자체로 존재가치가 있는 것이 아닌가, 역설적으로 묻고 있는 느낌. 그래서 영화를 보다보면 감독의 나래이션조차 필요치 않다는 느낌이 든다. (물론 초반의 그 깜찍한 나래이션은 꼭 필요했다고 생각한다.) 


중반쯤 1막이 끝나며 2막이 시작되고 감독은 말한다. 나중에 자신의 아이가 그 시절(어쩌면 혁명, 투쟁, 정쟁 기타 등등의 시절) 아빠는 뭐하고 있었냐고 물으면 뭐라고 답해야 하나, 영화 찍고 있었다고 해야 하나. 그리고 영화가 끝나면서 감독은 다시 말한다. 사실 이런 이야기는 아무 쓸모가 없다, 그런데 왜 작가들이 이런 주제를 택하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세상에는 이해 안 되는 혹은 말도 안 되는 일들(어쩌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환상적인 일들)이 벌어지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누군가는 그를 기록해야 하지 않느냐고 묻는 듯한 느낌. 그래서 지리한 현실이 환상이 되고 영화가 되고, 영화를 통해 다시 현실을 보는 그 감각. 초반의 그 깜찍한 멘트를 했던 감독답게 친절하게 독백으로 들려주지만 굳이 필요치 않았던 느낌. 


그리하여 정말 시네필들을 매혹시키고 환장하게 만들 영화 맞다. 그러나 ‘1막 끝’이라는 자막이 뜨자 ‘2막도 있어?’ 이런 심정으로 인내심의 한계를 느낀 관객들이 하나둘씩 빠져나간 영화도 맞다. 영화의 엔딩까지 정말 꾸준히 한명씩, 두명씩 빠져나갔던;; 나는 스스로를 시네필과 관객 사이 어디매에 위치해 있다 생각하기 때문에(스스로를 시네필이라 생각하지도 않고, 시네필이라 칭하기에는 민망스러운 느낌;;) 두 가지 감정이 다 들었던 영화. 눈을 감는 순간 바로 잠에 빠져들 수 있는 영화였지만, 151분이란 시간동안 끝까지 집중해서 본 나 자신 칭찬해. 


19시 <열대왕사> : 홍콩타이완차이나


중덕인 나는 영화제 초반에 이 영화를 골라놓았으나, 영화제 후반이 되자 슬슬 들려오는 풍문이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평이 좋던 ‘복사기’를 보고 싶었으나 표를 구할 수 없어, 원안대로 본 <열대왕사>. 그리고 이 영화도 ‘감독님 하고 싶은 거 다 하세요’ 이런 느낌이긴 했는데, 감독 인사말에서도 첫 장편은 가능성을 탐색하고 위험에 도전해보는 기회라 그리 만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 시도가 성공적이었냐 하면 일정부분 그렇다고 생각한다. 우선 스타일리쉬함을 끝까지 밀어붙였다는 느낌. 


홍콩영화를 자양분 삼아 자라고, 한때는 대만영화를 좋아하고, 현재는 중국드라마를 보는 나에게는 중화권 영화가 특별할 수밖에 없는데, 주로 영화의 외적인 면에서 그런 부분을 자주 느끼곤 한다. 이 영화도 중국인 감독이 자신의 고향인 중국 남부에서 촬영한 영화인데, 주인공들은 대만출신 배우들이다. 대만의 인기배우 펑위옌(그 시절 ‘청설’의 남주 맞다), 실비아 창이 주연을 맡고, 중국출신 닝하오 감독의 더티몽키스가 제작했고, 크레딧에는 베이징 미디어, 텐센트도 같이 올라있다. 그리고 엔딩 크레딧에 중덕들은 흔히 봐왔던 아이치이, 위티비, 텐센트 등등의 로고도 볼 수 있다. 


<열대왕사>라는 영화도 1980~90년대 홍콩영화의 자장 안에 있으면서, 2000년대 대만의 인기배우들이 출연하고, 현재 중국의 자본으로 만든 영화이다. 중덕들에겐 소회가 남다른 영화일 텐데, 영화의 서사나 만듦새는 나쁘지 않은 느낌. 사실 이야기는 느와르 장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야기인데, 감독이 플래쉬백을 통해 서사를 좀 섞고, 그걸 초반에 일시정지-되감기-재생 클립을 사용해서, 나 이제 이렇게 보여줄 거야, 선언을 하면서 진행한다.(신인감독다운 친절함 혹은 패기?) 


붉은 조명, 매캐한 담배연기가 화면을 뚫고 나올 것 같은 누추하고 더러운 생활감. 등장인물을 둘러싼 잔혹한 상황이나 화면과는 상반되게 유유히 흐르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Are You Lonesome Tonight?’ 선율. 담고 있는 주제가 엄청나게 무겁지도 성찰적이지도 않아서 느와르 장르물로 뒷맛도 깔끔한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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