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남자친구>는 여러모로 화제다. 송혜교와 박보검이라는 배우의 만남은 물론이고, 그들이 만난 쿠바는 벌써 ‘남자친구가 선택한 그곳’이라는 이름으로 패키지여행 상품이 팔리는 중이다. 기존의 드라마들과 달리 남녀의 역전된 권력관계는 클리셰를 새롭게 만드는 힘이며, 끊임없이 상대를 살피는 남성 주인공의 등장은 그 자체로 화제가 된다. 그리고 <남자친구>는 수현(송혜교)과 진혁(박보검)의 서사를 뒷받침하기 위한 주변인물을 촘촘히 배치하고, 그들의 내면을 확인할 수 있는 장면들을 짧지만 굵게 담아내며 극을 입체적으로 만든다.
그중에서 단연 돋보이는 인물은 수현의 딱 하나 남은 친구이자 비서인 장미진이다. 그는 공과 사를 확실히 구분할 줄 아는 프로다. 자신의 실수로 문제가 생기면 곧장 잘못을 인정하고 새로운 대안을 찾아내며, 상사가 곤욕스러운 상황에 처할 때는 그 자리를 피할 수 있게 돕는다. 게다가 툴툴거리면서도 수현의 말을 받아치고, 함께 소주와 해장국을 먹는 사이. 내내 감정을 참으며 살아온 수현 대신 분노할 줄 아는 미진을 향해 수현은 말한다. “워딩은 불손한데 속은 시원합니다.” 때에 따라 달라지는 다양한 목소리 톤, 경어와 평어를 오가는 화술, 넘치지 않는 선의 감정표현과 상황에 맞춘 메이크업까지. 수현이 하나뿐인 친구를 왜 자신의 가장 가까운 동료로 맞이했는가에 대한 이유가 그 어떤 말보다도 미진의 행동에서 그려지는 셈이다.
미진 역을 맡은 곽선영은 2006년 뮤지컬 <달고나>로 데뷔한 배우다. 이후 13년간 <김종욱 찾기>와 <빨래> 같은 현대극부터, <사의 찬미>와 <부용지애> 같은 시대극, <러브레터>와 <줄리 앤 폴>처럼 외국을 배경으로 한 뮤지컬까지 다양한 작품을 해왔다. 얼핏 ‘소극장 창작뮤지컬’이라는 형태를 제외하고는 닮은 점이 없어 보일 수도 있다. 쉬지 않고 꾸준히 작품을 해왔지만 다른 여성 배우들에 비해 존재감이 도드라지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튀지 않기 때문이다. 곽선영은 엄청난 고음을 선보이지도 않고, 화려한 메이크업이나 의상으로 등장하는 경우도 드물다. 모두를 사로잡을 만 한 카리스마가 느껴지거나 고정된 이미지가 있을 정도의 또렷한 외형을 갖지도 않았다. 대신 그에게는 언제나 가장 보통의 여성이 발견된다. 여행지에서 우연히 만나 잠깐의 감정을 나눴던 순간을 곱씹으며 살아가는 선영(<김종욱 찾기>)이거나 작은 단칸방에 앉아 서울살이의 고됨을 토로하는 나영(<빨래>)이었다. 같은 이름을 가진 남자 아이 때문에 속상해 하는 후지이 이츠키(<러브레터>)이기도 했고, 백석의 시를 사랑해 떠돌이 같은 그의 생을 품은 자야(<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이기도 했다.
물론 <궁>이나 <풀하우스>처럼 ‘캔디’류의 로맨틱 코미디 뮤지컬에도 자주 얼굴을 비쳤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자신의 이름을 각인하기보다는 작품 안의 캐릭터가 자연스럽게 흐르는 것에 더 집중해왔다. 덕분에 관객이 그의 뮤지컬을 보며 확인하게 되는 것은 작품 속의 여성들이다. 다른 이름을 가진 이 여성들이 어떤 인물들을 만나 어떤 관계를 맺고 그 과정에서 어떤 감정을 느끼고 어떻게 변화하는가. 관객이 직접 겪은 일이 아님에도 마치 지금 내가 경험하는 것과 같은 일체감을 만들어내는 것. 그것이 바로 곽선영이 무대에서 해온 일들이다. 그런 그가 무대에서 걸어 나와 아이 둘을 키우느라 고군분투하거나(‘박카스’ CF) 일하느라 제때 끼니도 못 챙기는 워킹맘(‘본죽’ CF)일 수 있었던 것 역시 곽선영이 가진 그 보통의 힘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다.
학창시절에는 콘서트를 가느라 땡땡이를 치고, 일이 없을 때면 만화방에 가고, 제 삶의 주인이 되지 못했던 친구 생각에 눈물을 왈칵 삼키며 소주를 마신다. 비싼 지갑을 아무렇게나 방치한 것에 발끈하거나 소개팅 앱에 반응하는 등 제 욕망을 감추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 모든 순간의 미진은 마치 어제도 그랬던 것처럼 자연스럽다. 수현이 미진에게 의지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이지 않을까. 나를 나 자신으로 있을 수 있게 하는 누군가. 어쩌면 가장 익숙해서 그 소중함을 느낄 겨를이 없던 그런 공기 같은 존재. 곽선영의 힘이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