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봉련, 든든한 울타리의 힘

by 장경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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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련이는 무대에 잠깐 등장해도 기승전결을 다 보여주는 것 같다니까.”(<더뮤지컬>) 생활감이 살아있는 연기로 다양한 매체에서 사랑받는 배우 이정은은 한 인터뷰에서 후배 이봉련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지난 1~2년간 이봉련이 출연한 영화 속 인물들을 떠올려보면 이 문장이 얼마나 적확한 지 알 수 있다.


찌푸린 표정과 발을 반만 걸친 채 까딱거리는 힐로 짜증과 무료함을 담아낸 <옥자>의 안내데스크 직원부터 필로폰을 제조하는 백 교수에게 “테이스터스 초이스”라 말하며 오빠 두삼과 눈빛을 주고받는 <마약왕>의 두숙, 동생에 대해 묻는 종수에게 심드렁하게 대꾸하는 <버닝>의 해미 언니까지. 그의 출연 분량은 10분을 넘지 않는다. 그럼에도 관객은 이들을 기억한다. 귀에 착 감기는 화술과 스스로 “아이와 할머니가 다 있다”고 말하는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외모 덕이다. 하지만 정확히는 이봉련이 해당 인물의 삶을 압축해 표현함으로써, 이들이 갑자기 튀어나온 인물이 아닌 관객에게 보이지 않아도 영화 안에서 함께 살아온 인물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15_이봉련_1945_ⓒ국립극단.png

2005년 뮤지컬 <사랑에 관한 다섯 개의 소묘>로 데뷔한 이봉련은 연극무대에서도 다채로운 인물 군상과 관계가 중요한 작품들에서 주목을 받았다. <백년, 바람의 동료들>은 경계인인 재일교포들이 느끼는 다양한 감정을 담았다. <날 보러 와요>는 화성 연쇄 살인 사건과 연관된 다양한 인물을 쏟아냈고,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은 권위적인 어머니 밑에서 자라야했던 딸들을 이야기했다. <1945>는 해방 직후 부득이하게 타인과 공간을 공유해야만 했던 상황을 통해 서로 다른 이들이 갈등하고 화합하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었다. 이봉련에게 온 인물들은 남의 눈치 보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을 하고, 답답한 상황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으려 애쓴 가장 평범한 이들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긴 호흡의 작품 안에서 관객에게 쉴 틈을 주는 인물들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서로 다른 영역을 잇는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최근 개봉한 <생일>은 세월호 참사로 아이를 잃은 한 가족을 담는다. 이봉련이 맡은 정숙은 이 영화에서 어린 조카를 살피고 가족의 끼니를 챙긴다. 상처 입은 오빠 부부와 감정을 나누기보다는 지금 절실하게 필요하지만 상황상 이들이 할 수 없는 일들을 묵묵히 해낸다. 영화는 정숙을 통해 함께 싸우는 사람만큼 피해자의 곁에서 일상을 지키는 이들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다수의 영화 속에서 이봉련은 주인공의 가족을 연기해왔다. 얼핏 비슷해 보이는 설정에도 이봉련의 연기가 돋보이는 것은 그가 ‘관계’에 집중해 인물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이봉련에게는 그가 맡을 인물이 어떤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가가 더 중요하다. 연극을 하기 전 그는 오랜 시간을 들여 관찰하고 진실에 다가가는 것을 추구하는 다큐멘터리 사진작가를 꿈꿨다. 그런 그가 타인의 삶을 살아내는 연기를 택한 것은 당연한 흐름이었을지 모른다.


鳯輦, 봉황 봉에 가마 련. 이봉련은 자신의 활동명으로 ‘임금의 가마’를 선택했다. 자신이 임금이 되기보다는 임금을 태우는 든든한 가마를 택한 사람. 이름처럼 이봉련은 주인공들의 주변부에서 입체적인 연기로 작품의 외연을 넓힌다. 그러나 이는 그가 없다면 작품이 담아낼 수 있는 정서의 크기가 적어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가마임과 동시에 그 가마에 올라탄 임금이 이봉련 자신이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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