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동백꽃 필 무렵>은 여러모로 화제다. 지방을 배경으로 했다는 점, 미혼모와 ‘촌놈’이 주인공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여성 캐릭터의 비율은 그동안 소개되어 온 어떤 드라마보다 높고, 이들 대부분은 경제권을 쥐고 주체적으로 살아간다. 특히 <동백꽃 필 무렵>에는 세대별 여성들이 촘촘히 포진해있다. 타인의 시선에 갇힌 20대의 제시카(지이수)와 더는 참지 않는 30대의 동백(공효진), 오지랖과 정 사이를 오가는 시장 사람들이 40대와 50대를, 동백과 용식(강하늘)의 엄마들이 그 다음 세대를 책임진다. 드라마는 이들의 삶으로 한국에서 살아가는 여성의 변화를, 이들이 동백에게 가하는 일상의 폭력과 은근한 응원으로 공간과 작품의 공기를 담아낸다.
드라마 속 여성의 80%는 오랫동안 연극 무대를 지켜온 배우들로 채워졌다. 옹산의 유일한 엘리트는 염혜란이며, 시장은 김선영과 김미화, 백현주가 지킨다. 이정은과 황영희, 전국향은 동백과 제시카, 규태(오정세)의 엄마로 등장한다. 5년 전 까불이 사건의 마지막 피해자는 이진희, 5년 만에 이 사건을 다시 조사하는 방송국 기자는 유연이었다. 이들 모두는 각자의 자리에서 주어진 일을 성실히 해내며 타인과 관계를 맺는다. 이러한 관계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연결되어 결국 동백과 용식에게 영향을 미친다. 때로는 얄밉게, 때로는 뭉클하게. “온 동네가 무슨 가족 같아. 막 친절하진 않은데 뭔가 되게 뜨뜻해”라는 대사는 이 여성들의 존재로 또렷해진다. 그리고 우리는 이를 통해 그동안 ‘아주머니’ 혹은 ‘엄마’라는 단어로 얼마나 다양한 중년 여성을 외면해왔는지를 알게 된다.
225년. 아홉 배우의 연기 경력을 모두 합하면 이만큼이다. 다양하고 새로운 얼굴을 찾는 영상 매체가 공연예술을 주목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준비되어 있기 때문이다. 무대 위 배우들은 긴 호흡으로 한 인물을 연구하며 디테일을 고민하고, 관객을 직접 만나 시시각각 변화를 축적하며 순발력을 터득한다. 그중에서도 여성 배우는 출연 기회는 적고 기회를 겨우 얻어도 전형적인 배역만이 주어지는 환경에서 강해졌다. 자신의 나이와는 상관없이 해내야만 했던 캐릭터를 위해 관찰력을 기르고, 서로 다른 ‘엄마’를 만들려 애썼다. 낮은 임금과 여성에게만 강요되는 임신·출산·육아가 그들의 일을 막아서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김선영의 찰진 화법과 황영희의 팔도 사투리, 이정은의 노동자 얼굴은 이러한 환경 속에서 탄생했다. 우리는 그들의 짧은 대사에서 삶의 고단함을, 스치는 표정에서 어떤 아쉬움을, 몸짓에서 꾹꾹 눌러 담긴 분노를 발견한다. 단 1분의 등장에도 그들의 존재가 각인되는 까닭은, 이들 모두가 생존에 성공한 고수이기 때문이다.
<동백꽃 필 무렵>에서 소위 ‘사’자 연기를 하게 된 염혜란, 영화 <기생충>에서 사건의 키를 쥔 이정은, 연극 <비평가>로 젠더 스와프를 보여준 백현주의 경우처럼 배우의 노력과 창작진의 젠더 감수성 각성이 더해져 여성 배우들에게도 새로운 기회가 주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곳에서 여성은 패턴화되어 소비된다. 모두의 얼굴과 이름이 다르듯, 똑같은 여성은 어디에도 없다. 그동안 여성 배우들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던 직업과 입장, 장르와 성격을 이들의 목소리로 담아내는 것은 서로 다른 ‘엄마’를 표현하는 것만큼 중요하다. 40년 가까이 연기를 해오며 다수의 상을 받은 전국향은 대표작을 묻는 한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아직 오지 않은 것 같아요. 저를 깰 수 있는 인물을 만나서 무대에서 한번 미쳐보고 싶어요.”(<국민일보>) 아직도 깨어질 벽을 많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