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적인 직장, 설레는 연애, 화목한 가족. 이중 하나라도 내 의지대로 되는 게 있다면, 세상은 좀 더 쉬웠을지도 모른다. 영화 <아워 바디>의 자영(최희서)도 그랬다. 그래서 그는 내 것이 아닌 듯 보이는 행위들을 하지 않기로 선택한다. 8년간 준비한 행정고시를 보러 가지 않는다. “인간답게는 살아야 하지 않겠냐”는 말을 남기고 떠나는 남자친구는 붙잡지 않는다. 하루 빨리 자리 잡기를 재촉하는 엄마와는 탈 없이 지내는 것을 포기한다. 대신 자영은 유일하게 혼자서 해낼 수 있는 자신의 몸에 집중한다. 달리면서 차오르는 호흡에, 점점 환해지는 표정에, 탄탄해지는 근육에. 누구에게나 자신에게 몰두하는 시간은 필요하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영의 비생산적인 일이 무의미하며, 속 편한 일이라 쉽게 비난한다.
<아워 바디>의 민지는 비난하는 사람이다. 그는 가정에서는 살뜰한 아내, 직장에서는 두루두루 잘 어울리는 대리로 자신을 포지셔닝한다. 관계를 끊은 자영과 관계 안에서의 자신을 확인하는 민지는 정확하게 끝과 끝에 서있다. 서로 다른 가치관 안에서 비난하는 자리는 민지에게 주어진다. 그에게 선의가 1%도 없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중학교 동창인 자영에게 알바를 주선해주고, 일에 적응하지 못한 그에게 사비로 일당을 챙겨준다. 하지만 민지의 이러한 시혜적인 태도는 상대의 존엄을 갉아먹는다. 배우 노수산나는 이런 민지를 미묘한 표정에 담아 표현해낸다. 노골적이지는 않지만 미묘하게 찡그린 눈썹과 톡 쏘는 말투에서 그의 짜증과 자영을 향한 은근한 비난을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다.
2008년 연극 <실연>으로 데뷔한 노수산나는 무대에서 주로 멜로드라마의 여성 주인공을 맡았다. <쩨쩨한 로맨스>부터 <썸걸즈>, <우리 노래방 가서 얘기 좀 할까>, <바람난 삼대>, <올모스트 메인>에 이르기까지 그가 이야기하는 것은 언제나 사랑이었다. 그는 우여곡절 끝에 사랑을 시작하고, 어렵게 이별을 한다. 지나간 사랑을 만나 지금의 자신을 확인하고, 상처 받지 않은 것처럼 다시 타인을 사랑한다. 연애는 약속한 두 사람이 내밀한 감정을 나누고 차이를 발견하며 서로에게 맞춰가는 행위 그 자체다. 당연히 그 어떤 관계보다 더 타인을 이해하고 자신의 세계를 확장하도록 돕는다. 그가 멜로를 선호하는 것도 소소하고 일상적인 감정이 가장 많이 담긴 장르이기 때문이다. 노수산나는 무대 위의 사랑을 통해 성장하는 인물을 그리고, 관객은 그를 통해 나를 본다. 설렘과 뭉클함, 죄책감과 그리움, 복수와 용서.
가장 보통의 연애를 그려온 그는 언제나 자신의 롤모델로 줄리안 무어를 꼽는다. 인간이 느끼는 마음의 결을 세심하게 관찰하고, 층층이 쌓아올린 마음의 레이어를 잘 담아내 많은 사람의 마음에 닿는 것. 그것은 비단 긍정의 것만은 아닐 것이다. 노수산나는 민지를 통해 ‘선의’라는 단어 뒤에 감춰진 인간의 무심함과 무례함을 그려냈다. 누군가는 제 속의 것이 들킨 듯 얼굴이 달아오를지도 모른다. 눈에 띄지 않는 아주 작은 것일지라도 분명히 존재하는 감정에 이름을 붙이고 소리를 내어 밖으로 꺼낸다. 노수산나의 필모그래피는 일상에서 마주쳤을 법한 사람들로 채워져 있다. 아마도 그가 가장 보통의 인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별 후 이별 노래가 모두 내 이야기마냥 느껴지는 것처럼, 그의 작품에서 나를 발견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