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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경진 Nov 20. 2020

ASMR, 새로 찾은 수면 파트너

[01] 2020.11.20

90년대의 어느 날, 중학생이었던 나는 수련회 캠프파이어 시간에 "행복해지고 싶다"라고 말했다. 누군가 꿈같은 걸 물어봐서 그랬나 보다. 그런데 그때나 지금이나 '행복'이라는 것의 실체를 모르겠다. 있기는 한 걸까. 그래도 하루에 하나 정도는 있지 않을까. 오늘치 행복이.

https://www.youtube.com/watch?v=hWaZ4Aiu5zI

Noel Philips, 비행의 모든 순간


몇 달 전부터 잠들기 전의 고요가 낯설어졌다. 무섭거나, 잠이 오지 않는다거나, 심심한 것은 아니었다. 어딘지 비어있는 느낌이 나를 불안하게 만든 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그때 오래전 후배에게서 들은 ASMR을 떠올렸다. 당시에만 해도 대체 그런 걸 누가 듣냐며, 롤플레잉 영상에 담긴 투명한 욕망이 불편하다며 거리를 뒀다. 그런데 ASMR의 세계는 생각보다 방대했고, 나는 어느새 취향에 맞는 소리를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빗소리가 언제나 1번이었고 (구체적으로는 텐트에 떨어지는 빗소리) 종종 모닥불 타는 소리와 기차 소리를 틀어놓고 잠을 잤다. 어떤 날에는 불어 낭독을 듣기도 했다. 그러다 기내 소리를 들었다. 무의미하게 웅웅대는 소리가 정말 비행기 안에서 잠들 때 듣던 것 같았다. 불편한 수면이 떠올랐고, 곧 그리워졌다. 오랫동안 여행을 가지 못한 탓이었겠지.


매일 밤 기내 소음을 찾아다니다 어느 날 Noel Philips의 영상이 피드에 나타났다. 대부분의 기내 소음이 비슷비슷한 소리를 반복해서 뭘 듣든 큰 차이가 없었지만, 비행의 전 과정이 담긴 그의 영상은 그야말로 실존하는 시간의 기록이었다. 청각의 자극으로 공간을 상상한다면, 나에게는 이 편이 더 좋았다. 떠나기 위해 공항에 가고, 수속을 하고, 게이트를 찾아가고, 비행기가 이륙하고, 기내식을 먹고, 잠을 자고, 착륙하고, 입국심사를 받으러 걸어가는 내내 들리는 안내 음성과 생활 소음들. 영상의 출발지와 도착지가 모두 다르기에 보이는 풍경도, 담긴 소리도, 언어도 동일하지 않아 좋았다. 하지만 사실 나는 실제 비행기 안에서나 영상에서나 언제나 이륙 전에 잠에 드는 사람이었다. 그래도 숙면과 함께 나는 도하에서 런던을 갔다. 자연스레 카타르 항공을 타고 도하를 거쳐 런던에 갔던 2016년의 봄이 떠올랐다.


이 채널을 찾은 후, 나는 언제나 설레며 잠이 든다. 잠깐 눈이 떠졌을 때 보이는 것이 컴컴한 작은 방이라도 외롭지 않다. 대체로 안전하고 편안하게 잠에서 깬다. 마치 여행을 마치고 비로소 우리 집에 돌아왔을 때처럼. 오늘 밤에는 스위스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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