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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두민 Aug 06. 2023

신이 내게 내려왔다

내 인생의 데이터 베이스

 사람은 누구에게나 3번의 기회가 우연처럼 찾아온다고 말하는 것을 어디선가 들었던 것 같다. 그런 말은 평소 같았으면 콧방귀나 뀌면서 흥미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내 인생의 굴곡들을 보니 그런 말이 '세인'들의 말과 같이 무책임적이고 퇴락된 말이라도 내게는 절실하게 필요했다. 그 말을 따라서 결정하고 실패하더라도 세인들은 내 책임을 함께 지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그런 평균적인 말이 너무나도 필요했다. 너무나도 짧은 기간 내, 내가 예정하지 못했던 일들이 발생했다. 처음에는 원치 않았던 성추행 당함을 시작으로, 한 여성으로 부터 강압적인 감정적 스토킹, 그리고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불러 보고 싶었으며, 함께 한 끼의 식사만이라도 했으면 하는 아버지가 이제는 불가능성의 '죽음'의 방해로 만남이 영원히 취소되고 말았다. 나는 스스로 말을 하면서 듣는 존재자로서 어떤 말인 '공허의 말', '아무것도 아닌 말', '형식만 있고 내용이 전혀 없는 그런 말'로서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30년 이상 '나'로서 살아오면서  이렇게 허무한 적이 있었는가". 모든 것을 기다리고 오래 참으며 인내하던 내가 그 무엇 하나 이루지 못한 거절감, 세상이 나를 향한 비웃음이 너무나 쓰리고 아팠다. 이로 인해, 나도 모르는 사이 내가 신에게 "제발, 제게 이것을 이겨낼 기회나 힘을 달라"라고 기도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상의 그 누구도 나에게 새로운 기회를 허락하지 않았고, 그저 담담히 혼자서 부서져 깨진 마음을 혼자 이어 붙이고 있었다. 이렇게 자신을 추스르는 와중에 데리다가 '목소리와 현상'으로 내게 말을 걸어왔다. 참 신기하다. 데리다는 후설이 남몰래 설치해 둔 현전의 형이상학적 장치들을 찾아내어 후설도 서양 철학자들과 다름이 없음을 이야기했지만 데리다의 책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그러면서, 마치 "너의 위기는 사실 기회이다"라고 내게 말을 걸어 온 것 같았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나의 실존적 의미를 찾는 구도자로서 또는 여행자로서 기꺼이 여행을 떠나기를 두려워 하지 않았다. 언제는 인식론에 안착하고, 언제는 존재론, 또 언제는 실존주의, 그리고 또 언제는 차이를 생성하는 힘에 안착하여 안전하다고 느껴질 때쯤 다른 곳을 횡단하였다. 그러면서, 그때마다 내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그 속에서 꼭 하나씩은 가지고 나왔다. 그런 점들이 하나, 둘 씩 쌓이다 보니 언제부터인가 내 삶의 쓸만한 무언가를 꼭 하나씩은 챙겨서 떠나는 것 같다. 그것은 귀여운 꼬마의 얄미운 도둑질과 같이 보이기도 했으나..(이것은 왜 그런지 추후에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그렇게, 나의 삶을 살아가는 데 철학자들에게 빚을 졌었다. 그런데, 나는 한 그룹들에게 빚을 또 졌다. 바로, 기독교 신학자이다. 철학자들의 관점에서 시작 실존적인 각자성에서 또는 주체성에서 살아가는 것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타자, 공동체성, 헌신, 욕망과 사랑, 그리고 낯설고 날카로운 정직을 훔쳐 배우는 빚을 지게 되었다. 이 빚은 마치 꼭 갚아야 하는 빚이라기보다는 조금 더 남에게 헌신적이고 풍성한 내용들을 나누어주는 '빛'과 같았다. 그리고, '빛'은 완전함이 아닌 불완전하고 고독하기도 하지만 자기들도 이런 고민으로 힘들게 살았고 겨우 내린 것은 답이 아닌 자신의 선택을 해설할 뿐이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사실, 나는 개인적으로 선택과 의미가 있는 것이지 답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 누가 자기 자신을 알겠는가? 그 누가 타자를 알겠는가? 그 누가 헌신을, 욕망을, 사랑을 그리고 희망과 믿음을 온전히 알겠는가? 이 모든 것들이 한 곳에 모여 뒤섞여 있는 이 '카오스모스' 같은 이것들을 누가 정확히 알 수 있었을까? 아무도 모른다. 그저 선택한다. 그리고, 그것을 욕망하고, 사랑하고, 희망하고, 믿음으로서 자신의 삶에 자신이 직접 빚은 의미의 벽돌을 하나씩 놓으며 자신만의 길을 만든다. 결국, 모든 것은 나의 선택이자 결단이 내 삶을 이끌어간다. 그 형식에 내용을 가득 채우고 싶은 욕망이 생기고, 그 내용에 무채색보다는 알록달록한 색을 하나씩 칠하며 넣고 있다. 이것이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의 출발점이자 시작이다. 


 나는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들었다. 언젠가는 자신에게 3번의 황금 같은 기회는 온다고. 그런데, 알고 보니 그 기회는 이미 내가 누리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인문학과 신학이 동시에 황금 같은 기회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기회는 위기가 되면 나 스스로 일어나 걸을 수 있는 용기와 힘을, 그리고 내가 살아갈 수 있도록 희망이라는 것을 그리며 살 수 있도록 해주었기에 내가 누리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이제야, 내가 그 기회로 부터 피투되어 내 삶을 선택해서 살 수 있는 가능성과 용기로서 기투할 수 있음을 이미 준 것을 경험하였을 뿐이었다. 이것을 다르케 말하자면, 그래.. 신이 이미 내게 내려와 인간으로서 살아가면서 힘겹더라도 살아갈 수 있는 모든 것을 내 어딘가에 심어두었다. 그리고, 그것을 나는 인문학과 신학을 통해서 찾아내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얻었는가? 이제부터 내 인생의 데이터 베이스를 글로써 피면서 과정을 적어 내려가겠다. 그런데, 첫 시작은 우습게도 어려운 인문학이 아닌 자기계발 서적인 '독서천재가 된 홍대리'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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