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삼색 김밥
아직 우리 엄마 아빠는 모르는 이야기다.
엄마는 김밥을 말았다.
나는 중학생이 되었다. 거울에 비춰보이는 교복 입은 모습이 생소했지만, 또 은근히 의젓해보이기도 해서 적이 으쓱했다.
진학한 곳은 남중. 일찍 와버린 사춘기 탓에 도망치듯 선택한 학교였다. 이성에 대한 관심이, 내겐 여자 공포증으로 발현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곳은 지금까지 다니던 학교와는 달리 남자밖에 없었다.
다른 건 또 있었다. 급식이었다. 번쩍이는 급식카트를 교실로 밀고 들어와 배식해먹던 초등학교와는 달리, 중학교에는 꽤 널찍한 규모의 급식실이 있었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좋아보였다.
김밥집도 아닌데, 엄마는 참 자주 김밥을 말았다. 공부방 애들한테 간식으로 줄 겸, 엄마를 도와 애들을 함께 가르치는 아들과 안방에 누워 있는 아빠의 끼니를 해결할 겸.
엄마는 김밥이 특기였다.
중학교 옆에는 같은 재단의 고등학교가 나란히 붙어있었다. 교문도, 운동장도, 그리고 급식실도 두 학교가 함께 사용했다.
급식실은 작지 않았으나, 두 개 학교에 천 명이 넘는 학생들을 한꺼번에 수용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약간의 시차를 두고 운영했다. 고등학교 형아들이 먼저, 그리고 30분쯤 후에 우리가.
그러니까, 4교시가 끝나는 종이 울리면 지축을 뒤흔들며 땀내 나는 어린 수컷들이 급식실로 미친듯이 내달리던 그 모습이, 이 학교에는 매일 두 번씩은 있었던 셈이다.
우르르 쾅쾅- 했다가 잠잠. 다음엔 오로로로 콩콩- 했다가 다시 잠잠.
두 번의 크고 작은 주만지. 장관이었다.
그 중에서도 호불호 없이 우리집 식구가 모두 좋아한 김밥이 있었다. 이른바 삼색김밥. 대단한 유래가 있는 이름은 아니고, 그냥 우리 식구들끼리 부른 별칭이다.
요이, 땅 하면 급식실로 향하는 달음박질.
재밌었다. 긴장감도 들었다. 레이스 시작 총성을 기다리는 단거리 육상 선수가 된 기분이었다.
신나서 내달렸다. 마구 달리다가 급식실 앞에 도착하면, 주변에는 웃는 얼굴로 헉헉 거리는 반 친구들이 함께였다.
우리는 밥을 같이 먹었다.
한동안은 그랬다.
김밥이니까 일단 단무지. 거기에 잘 볶아낸 채 썬 당근과 참기름을 살짝 두른 시금치 나물. 노릇하게 부쳐낸 계란 부침과 간장으로 간을 맞춘 어묵 볶음을 충분히 넣는다.
언제부터였을까.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낀 건.
어느샌가부터 급식실을 향해 뛰어가는 건 나 뿐이었다.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재밌는데, 왜 안 뛰지?
밥은 최대한 얇게. 김에 딱 밥알이 한 겹씩만 깔릴 수 있게. 이제는 일반화된 프리미엄 김밥의 그 모습이지만, 그 시절에는 어느 김밥집에서도 이런 비주얼을 볼 수는 없었다.
들려오는 답은 이제 밥을 천천히 먹기로 했다는 얘기였다.
그렇구나. 애들은 이제 막 뛰어가는 게 재미가 없어졌구나.
그럼 나도 천천히 먹어야지. 그깟 밥 좀 일찍 먹고 늦게 먹는 게 뭐가 중요해. 애들이랑 같이 먹는 게 더 좋지. 라고 생각했다.
우리 엄마 김밥 맛은 먹어본 사람만 안다. 포슬포슬한 계란과 감칠맛 돋는 어묵의 조합이 아주 미쳤다.
그러나
내가 안 뛰자
친구들은 뛰었다.
그제야 알았다.
나, 또 따돌려지고 있구나.
아니, 어쩌면 내심 눈치는 채고 있었지만 애써 부정하던 걸,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진짜 맛있다.
어쨌든,
나는 그제서야 알았고
자타공인 왕따가 되었다.
지금도 의문인 것은, 대체 이 김밥이 왜 삼색김밥이냐 하는 거다. 김이고 밥이니까 까맣고 하얗고, 단무지는 노랗고, 당근은 빨갛고. 거기다 시금치에 계란에 어묵까지 있는데 말이다.
미스터리다.
왕따라는 사실을 인정하니, 슬프게도 그 역할에 위화감이 없어졌다. 나는 따돌려지는 역할을 수행했다.
어쩌다 무리 무리에 떠밀려 아이들과 함께 급식실에 들어가게 되어도, 테이블에는 나 혼자였다. 다른 반 왕따와 겸상을 하게 될 때도 있었는데, 그게 참 고역이었다. 왕따 둘이 밥 먹는 모습을 보며 애들이 킥킥거렸기 때문이다.
급식실에서 뿐이 아니었다. 수업 시간에는 누가 던졌는지 모르는 지우개 가루가 쏟아지기도 했고, 쉬는 시간에는 머리에 침을 맞기도 했다. 신발과 의자에는 압정이 깔리곤 했고, 때때로 내 엉덩이나 발바닥에는 그게 박히기도 했다.
자는 척을 해도 피할 수 없는 일들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는 척을 하는 게 당시로선 유일한 선택이었다.
사실 김밥이라는 음식 자체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신기한 구석이 있다. 뭐가 됐건 재료들을 잔뜩 욱여넣고선 밥을 펴바른 김으로 우격다짐 말아댄다. 그리고 이름을 그럴듯하게 붙이면 그만이다. 소고기 김밥, 땡초 김밥, 연어 김밥, 톳 김밥, 우리 가족에게는 '삼색 김밥'.
그리하여, 누구보다 빨리 뛰어 급식을 먹던 남중생은 혼자 밥 먹기가 싫어 급식을 거르게 되었다. 고등학교로 올라갈 때에는 같은 운동장을 쓰는 동명의 고등학교가 있음에도, 다른 구(區) 고등학교로 옮겨갔다. 중학교 때의 그 놈들이 대부분 그 고등학교로 올라갈 게 뻔했기 때문이다.
"아니, 왜? 다니던 데 다니면 되잖아? 다른 무슨 이유가 있는 거야?"
의아한 듯 걱정하는 부모님께는
"고등학생 되면 공부해야죠~ 환경을 싹 바꾸고 새로운 마음으로 공부할 거에요!"
라고 되도 않는 핑계를 댔다.
화학적으로는커녕 물리적으로조차 딱히 제대로 섞여있지 않은데, 그냥 '김밥'이라는 이름으로 빚어진다.때로는 삼색이 아닌데 삼색김밥이 된다. 일면 신기하고, 일면 폭력적이다.
그렇게 진학한 고등학교에서도, 중학교 때의 악몽이 남았던 탓인지 나는 점심을 못 먹게 되었다.
"저는 점심시간에 공부가 제일 잘 되더라고요! 저녁 많이 먹으니까 걱정마세요!"
엄마에겐 또 다시 되도 않는 핑계를 거듭하며 급식을 먹지 않았다.
다시 학교 급식실에서 밥을 먹을 수 있게 된 건, 그 다음 학년은 되었을 때의 이야기다.
나도 그렇다. 서로 관계되지 않은 수많은 기억과 경험들이 '나'라는 이름으로 돌돌 말려 빚어져 있다.
중학교 따돌림의 기억은 아직도 유효하다. 20년도 더 된 기억이지만, 아직도 그 시절 그 사람들의 꿈을 꾼다.
내 속을 채우는 속재료들은 마냥 깨끗하지는 않다. 작은 것을 탐하던 시커먼 기억과, 보란듯이 따돌려지며 시퍼렇게 멍든 상처들이 나를 이루고 있다.
꿈 속. 이제 어른이 된 나는 가끔은 유의미한 저항을 하기도 하지만, 대개는 무기력하게 굴복한다. 여전히 침을 맞고, 쏟아지는 쓰레기 속에 있다.
스트레스가 심한 때면 더 극성이다. 현실에서 겪지 않았던 더 심한 괴롭힘을 당하기도 한다.
잠에서 깨고 나면, 베개도 이불도 흠뻑이다.
그러나 삼색이 아닌 김밥이 누군가에게 '삼색 김밥'이 되듯, '나'라는 사람은 누군가의 명명에 의해 정해지기도 하는 것 같다.
누군가에게는 '아들'이라는 이름으로.
누군가에게는 '남편'이라는 이름으로.
나는 김밥을 먹는다. 엄마 김밥은 맛있다. 20년 전에도, 지금도, 여전히 맛있다.
누구에게나 상처는 있다. 사연 없는 사람은 없다.
어쩌면 내 상처, 내 사연은 상처도 사연도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최소한 나는 지금도 멀쩡히 살아있고, 상처는 충분히 견딜만큼 아물었다. 비록 중학교를 졸업한 뒤로 두 개의 학교를 더 졸업하고, 직업과 아내를 얻은 지금까지도 그 때의 악몽을 꾸지만, 여전히 상처가 벌어져있다고 여기지는 않는다.
세상에는 평생 벌어진 상처를 짊어지고 사는 이들도 많다. 그에 비하면 얼마나 다행인가.
지금의 내가 겪는 건, 그저 흔적이다.
아문 상처가 남긴 흔적.
큰 이유 없다. 그냥 먹는다. 맛이 있으니까, 김밥을 먹는다.
왜 이런 이름이 붙었는지 모를 삼색 김밥을.
물론 상처는 나아도 흔적을 남긴다. 상처가 클수록 흔적도 크다. 어떤 상처는 신체를 변형시킬만큼 큰 흔적을 남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처가 아물지 않은 것은 아니다. 아문 상처는 아문 거다. 흔적이 있을 뿐.
지금, 내 꿈처럼.
그 흔적이 꼴 보기 싫긴 해도 말이다.
나도 바란다.
그들에게 나는
맛있는 아들이기를.
맛있는 남편이기를.
건강한 재료로 만들어진 내가 아닐지라도.
나는 삶을 산다. 20년 전에도, 지금도 그냥 산다.
큰 이유 없다. 그냥 산다. 상처가 있건 없건. 그저 일상이다.
아직 우리 엄마 아빠는 모르는 이야기다.
아직 괜찮지 않지만,
이젠 괜찮다.
계속 모르면 좋겠을 얘기다.
나는 아들이니까.
나는 남편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