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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장밥 Dec 02. 2020

영영 마지막 미역국

16. 굴미역국

2015년 12월


"미안해 오빠. 약속 못 지키게 됐네. 굴미역국 다시 끓여주기로 했었는데."


핸드폰에서 흘러나오는 여자의 말. 미안함과 아련함, 약간의 따뜻함이 묻어있는 듯한 목소리다. 남자가 요새 들어왔던 차가운 목소리와는 사뭇 달랐다.


"아냐 아냐. 왜 미안하다는 말을 해."


남자는 화들짝 대답한다. 본인이 들어서는 안 될 말을 들은 것처럼.


그러고보니 통화하는 꼴이 연인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갑을관계. 남자가 여자에게 목을 매는 듯한 상황이다.


"미안해 하지 말아줘. 이렇게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좋아. 정말."


확실하다. 남자가 질질 끌려다니고 있다.


"미역국이야 나중에 끓여줘도 되잖아. 지금은 그냥 부담 없이 푹 쉬어요."


"..."


미래를 기약하는 '나중'이라는 말에 여자는 아예 입을 닫아버린다. 동상이몽. 여자가 그리는 미래에 더 이상 남자의 자리는 없는 듯 하다.


"...나 다음주에 또 전화해도 돼?"


대답 없는 상대에게 전화를 미리 허락받는 남자. 게다가 주 단위 통화. 정상적인 연애는 아니다.


"...그래"


여자는 마지못해 승낙한다.


"오늘 통화해줘서 고마워. 나 이제 공부하러 갈게. 사랑해!"


"응, 공부 열심히 해. 생일 축하해 오빠."


사랑한다는 남자의 말을 맞받을 여자의 응답은 없었다. 형식적인 축하. 남자의 생일이었다.


이 날의 생일을 마지막으로 남자는 형식적인 축하조차 받지 못 한다. 얼마 후, 영영 차여버렸기 때문이다.



2014년 2월


내기를 한다. 지는 사람이 이긴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뭐든지.


남자는 아득바득 이겨먹는다. 본인이 질 수 없는 게임을 하면서. 상대는 기가 막히다는 듯 웃음을 터트린다. 대체 뭘 하려고 이렇게 열심이냐고. 남자는 대답한다.


"나, 이거"


그대로 입을 맞춘다. 멀리 사는 여자의 집으로 가는 빨간색 광역버스 안. 연애의 시작.



2014년 3월


여자는 미인이었다. 누가 봐도 사랑스러운 사람이었다.


여자는 남자의 이야기에 해맑게 웃어주고, 자신의 일상과 고민을 남자에게 털어놓는다. 서로의 숨이 닿는 거리에서 사랑을 말한다.


남자는 행복했다. 이런 여자가 자신과 만나주는 것은 큰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2014년 12월


"오빠, 잠깐만 나올래?"


여자는 남자가 공부하는 도서관 앞으로 찾아간다. 그리고 전화를 해서 남자를 불러낸다. 남자는 헐레벌떡 나온다. 촌스러운 후리스. 여자가 찾아올 줄 모르고 있었게 분명하다. 성공적인 서프라이즈다.


"아니, 말도 없이... 나 오늘 못 생겼는데..."


"자, 이거 먹으면서 공부해."


여자는 하나 더 준비한 서프라이즈를 내민다.


"이게 다 뭐야?"


미역국이었다. 굴이 잔뜩 들어간.


이 날은 남자의 생일이었다.



2014년 7월


"미역국 좋아해?"


남자가 묻는다. 남자는 여자를 사랑한다. 그래서 남자는 여자를 더 알고 싶어한다. 여자가 좋아하는 건 뭔지, 싫어하는 건 뭔지, 잘하는 건 뭔지, 잘 못 하는 건 뭔지. 모조리 알고 싶어한다. 열성적이다. 사랑이다.


"응! 미역국 중에서는 소고기 미역국이 제일 좋아! 조개 미역국은 별로야. 자꾸 모래가 씹혀서 밥도 못 말아먹겠어. 오빠는? 미역국 좋아해?"


"응, 나도 미역국 엄청 좋아해. 사골처럼 미역국을 며칠동안 끓이면 미역이 완전 포슬포슬해지잖아. 그 때 그 식감이 너무 좋아. 음, 그치만 나는 소고기 미역국 보다는 굴 미역국! 굴 넣은 미역국을 제일 좋아해."


"굴? 어우, 나는 싫어 그거. 냄새도 싫어. 으으."


"어, 그럼 나도 소고기 미역국을 제일 좋아할게!"


"그게 무슨 말이야! 어휴, 진짜."


무슨 미역국인지가 뭐가 중요할까. 티격태격. 두 사람은 그냥 좋았다.



2014년 12월 -2


깜짝 데이트를 마친 남자는, 집으로 돌아가 냄비에 굴미역국을 옮겨놓았다.


여자는 요리에 서툴었다. 남자는 그래서 더 감동이었다. 게다가 굴미역국. 스쳐지나가며 했던 그 말을 기억해준 거다. 냄새조차 맡기 싫어했던 굴인데, 생일을 챙겨주겠답시고 그 싫음을 기꺼이 감수한 거다.


남자는 여자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었다. 생일이었지만,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여자친구의 존재 자체가 소중하고 값졌으며, 무언가를 더 바라는 건 지나친 욕심이라고 생각했다. 감격스러울만큼 감사했고, 무언가를 더 받는 건 분을 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입 발린 말이 아니었다. 그 사람만으로 소중했었다.


굴미역국. 그런 사람이 자신만을 위해 수고로움을 꺼리지 않고 만들어준 요리.


어쩌면 그 날은 남자가 겪어 온 스물 여섯 번의 생일 중 가장 행복했던 날인지도 모른다.



2014년 12월 -3


다음 날, 남자는 서둘러 씻고 부엌으로 항했다. 본래 아침밥을 잘 챙겨먹지 않는 편이었지만, 이 날은 굴미역국을 먹어야 했다.


남자는 전날 굴미역국을 옮겨담았던 냄비를 찾는다.


찾았다. 냄비는 가스레인지 위에 얹어져 있다.


어라. 어제 저 냄비를 저기에 두었었나. 남자는 갸웃거리며 냄비에 다가선다. 뚜껑을 연다.


없다.

비었다.


분명히 어제 그 냄비가 맞을진대, 냄비 속은 어제와 달랐다. 텅 비어있다.


냄비 뚜껑을 손에 든 채 텅 빈 속을 응시하며 멈춰있기를 잠깐, 뒤에서 누군가가 크게 말한다.


"응~ 그 있던 미역국 할머니가 다 먹엇씨야~ 맛있더만~ 할머니 그 미역국이랑 두 그릇이나 먹었어~"


할머니다.



2014년 12월 -4


남자는 여자에게 전화를 건다. 시무룩한 상태로 털어놓는다. 굴미역국, 맛도 못 보았노라고. 상황을 설명한다.


여자는 웃는다. 그리고 놀린다. 왜 미역국을 만들어줘도 먹지를 못 하냐고. 그래도 다행이란다. 할머님이 그렇게 맛있게 드셔서 다행이란다. 맛 없게 됐을까봐 걱정이었는데 그건 아니어서 다행이란다.


그렇지만 올해 생일은 이제 끝이란다. 못 먹은 건 오빠 팔자란다. 굴을 자주는 못 만지겠단다.


대신 내년에 해주겠단다. 할머니가 두 그릇을 드셔도 남을 게 있을 만큼 많이 해주겠단다. 앞으로 매년 해주겠단다.


올해는 아쉬웠어도, 남자는 행복했다.



2014년 8월


무엇으로도 행복할 때가 있다. 두 남녀가 그러했다.



2016년 1월


그러나 그 행복은 짧았다.



2015년 1월


다름이 없는 사이는 없다. 하지만 모든 다름이 관계의 균열로 기능하지 않는 것은 서로의 다름에 대한 배려가 있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두 남녀는 미처 배려를 다 배우지 못한 나이였다. 애정의 댐에 난 작은 구멍이 커지는 건 삽시간이었다.


여자에게는 가족이 중요했다. 많이 중요했다.


남자는 가족에 대한 여자의 마음이 지나치다고 생각했다. 남자가 생각하는 여자의 가족은 하나의 왕국과도 같았다. 엄마라는 황제, 언니라는 적자, 형부라는 부마.


여자는 남자를 자신의 소중한 왕국으로 들이고 싶어했고, 초청장을 건네었다. 그러나 남자는 초청에 응할 수 없었다.


연인의 가족들. 그들에게 당당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만날 수 있다고 남자는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완성되지 못 한 존재였다. 스스로 당당하지 못 했다.


그래서 남자는 사양했다. 한사코. 아직은 때가 아니라며.



2015년 1월 -2


여자는 풀이 죽었고, 남자는 그 모습을 보며 마음이 함께 편치 않았다. 행운이자 행복인 연인이 자신으로 인해서 기운 없어 하는 모습을 보기 힘들었다.


그래서다. 오래 버티지 못 했다. 몇 번의 초대만에 남자는 굴복다.


어린 시절 따돌림의 기억이 표피 너머에 아로새겨져 있기 때문일까. 남자는 낯선 사람들과의 만남을 두려워했다. 게다가 여자친구의 가족. 두려움은 배가 된다. 모골이 송연하다.


하지만 낯선 무리와 마주하는 공포심은 늑골쯤으로 눌러두어야 했다. 따돌림의 과거 따위는 남녀에게 고려 대상조차 되지 못 했다. 애초에 여자는 그런 남자의 과거를 몰랐기 때문이다. 연인에게 고백하기에는 남자에게 너무 치욕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남자는 혼자 견뎌야만 했다.



2015년 2월


남자는 왕궁에 들어서서 황제를 알현하였다.



2015년 3월


교외에서 적자와 부마를 만나뵈었다.



2015년 4월


왕국 밖으로 영영 도피한 옛 황제와도 독대하였다.

만남은 잇따랐다.



2015년 3월 -2


그들은 새로운 손님을 반기지 않았다. 드러날 정도로 거부감을 표현하기도 했다. 어쩌면 무례했다.


남자는 발끈하지 못 했다. 오히려 더 작아졌다. 그들의 거부감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왕국 사람들이 환영하기에, 남자는 아무런 자격이 없었다. 무자격자였다.


못생겼다. 배도 나왔다. 집안에도 지갑에도 돈이 없다. 변변찮은 직업마저 없다. 남자는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수험생이었다. 그것도 벌써 4년째.


그러니까, 시험에 네 번이나 떨어진 나이 많은 거렁뱅이. 왕국인들의 눈에 비친 남자의 모습이었다.


남자도 이 사실을 잘 알았다. 그래서 그 동안 한사코 초청을 거절해왔던 것이고, 왕국인들의 무시에도 제대로 된 화조차 못 낸 것이다.



2015년 3월 -3


아직 직업이 없다는 사실과 공무원을 준비하는 수험생이라는 상황은 묘하게 맞물렸다. 부정적인 시너지를 내뿜었다.


직업이 없었기 때문에 왕국인들은 남자를 좋게 보지 않았다. 여자에게 왕국은 절대적 사회였으므로 남자는 어떤 방법으로든 자신의 이미지를 만회해야 했다.


그러나 실패. 뻔한 결말이었다.


남자는 사람에게라도 잘해야 했다. 여자를 통해 초청장이 전해질 때마다 열심히 응했어야 했고, 그들의 눈에 들기 위해 노력했어야 했다. 그럼에도 그러지 못했다. 시험을 봐야 했기 때문이다. 시험을 앞둔 수험생에게 일상의 우선순위는 시험이었다.



2015년 4월


엎친 데 덮쳤다. 갑자기 여자의 건강이 나빠졌다. 허리 문제였다. 여자는 요통을 심하게 느꼈고, 어찌나 아파하는지 걸음걸이가 바뀌어갔다.


통증이 심해질 수록 여자의 인내심은 약해져갔다. 마음의 여유가 사라져갔다. 연인을 향한 이해와 사랑 또한 옅어져갔다.


왕국의 여론에 맞서 두 남녀의 관계가 지속될 수 있었던 건, 서로에 대한 마음이 굳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젠 그조차 흔들린다. 남자에 대한 여자의 사랑이 흐려져간다.


은근하지만 꾸준히, 이별은 가까워왔다.



2015년 8월


"오빠, 나 오빠랑 그만 만나고 싶어."


결국 그 날이 왔다. 이별통보의 날이다.


"오빠에게 난 1번이 아니었잖아. 오빠는 오빠 시험이 먼저잖아. 나는 내가 먼저인 사람을 만나고 싶어."


여자가 이별을 말하리라는 것은 남자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남자는 자신의 생각과 마음을 호소한다. 너와 더 잘 맞는 사람은 있을 수 있지만, 너를 더 좋아해주는 사람은 있을 수 없다고. 그 어떤 누구에게 받는 사랑보다 더 많이 사랑해줄 수 있다고. 지금은 특별한 시기이기 때문에 그럴 뿐이며, 이 시기만 지나면 남은 인생에서 너보다 먼저인 것은 없을 거라고. 다음 시험에 꼭 합격하겠다고.


남자는 여자를 붙잡았다.



2015년 11월


3개월 후. 두 번째 이별통보.


"나 지쳐 오빠. 나한테 잘해주는 사람 정말 많아. 그런데 오빠는 날 위해 한 게 대체 뭐야? 나를 잡은 고기라고 생각하지 마."


남자는 여자에게 말한다. 거의 다 왔다고. 정말 조금만 참아달라고. 지금은 우리 둘 모두가 힘든 때여서 그럴 뿐이라고.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너도 아프지 않을 거고 나도 상황이 달라질 거라고. 가족에게도 잘 하겠다고. 사랑하는 만큼 행동으로 보여주지 못 해서 정말 미안하다고. 절대 잡은 고기라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고. 작년에 합격하지 못 해 미안하다고.


남자는 여자를 다시 붙잡았다.



2016년 1월


1개월 후. 세 번째 이별통보.


"오빠, 나 못 기다리겠어. 1년만 기다려달라고? 그럼 내 1년은?"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사랑했어."


여자가 말한다. 과거형이다.


"오빠를 만날 수 있어서 행복했어. 좋았었어. 오빠와 보냈던 순간들은 좋은 기억으로 남길 수 있게 해줘. 오빠가 나를 붙잡을 수록, 우리 좋았던 기억까지 더럽혀져. 내 추억을 더럽히지 말아줘."


남자는 여자를 또 붙잡았지만,

붙잡히지 않았다. 여자는. 결국.



2015년 12월 -2


"미안해 오빠. 약속 못 지키게 됐네. 굴미역국 다시 끓여주기로 했었는데."


여자는 요양중이다. 허리통증이 도통 낫지를 않은 탓이다.


요양 중인 여자와 수험생인 남자. 둘의 만남은 점점 드물어져갔다.


여자의 마음이 식은 게 먼저인지, 만남이 줄어든 게 먼저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확실한 건, 여자는 남자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남자에 대한 여자의 마음이 식어갈수록, 남자는 여자에게 매달렸다. 여자는 자신에게 매달리는 남자의 비참한 모습을 보며 에 대한 호감이 더욱 줄어들었다. 악순환이다.


이제 남자와 연락을 하는 것 마저 싫다. 부담스럽다.


오늘은 남자의 생일이다. 그래도 한 때 사랑했던 사람. 생일 축하는 하지만, 마음은 여전히 안 좋다. 남자와 연락을 할 수록, 여자의 기분은 나빠진다.


"미역국이야 나중에 끓여줘도 되잖아. 지금은 그냥 부담 없이 푹 쉬어요."


'나중'이라며 은근히 미래를 이야기하는 오빠가 부담이라는 말을 하고 싶지만, 참는다.


"생일 축하해 오빠"


이 사람에게 하는 마지막 생일 축하겠지. 여자는 생각한다.



2020년 12월


5년이 지났다. 다시 남자의 생일이다.


이별을 한 뒤 겪은 네 번의 생일. 남자는 매번 그 날의 굴미역국을 떠올렸다. 냄비에 옮겨놓기 전에, 한 숟가락이라도 떠먹어 볼 것을.


이제 곧 겪을 다섯번째 생일. 남자는 또다시 굴미역국을 떠올리겠지만, 올해 역시 맛을 보지는 못 할 것이다. 앞으로도 영영 그럴 것이다.


생일은 해마다 돌아오지만, 그 뿐이다.

슬프게도 남자는 굴미역국을 먹지 못하게 되었다.


굴미역국은 영구결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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