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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장밥 Dec 30. 2020

하마터면 평생 떡국 못 먹을 뻔 했다

20. 황태떡국

착한 아이 컴플렉스가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야식으로 끓이신 황태떡국. 한 그릇만 맛 보고 자라는 부모님의 말에, 음식을 거절치 못하고 떠먹더니 그대로 체해버렸다. 늦은 저녁 시간이었다. 어린 시절이었다.



어머니는 손이 크셨다. 항상 냄비가 작았다. 남의 집 밥상을 모르던 때에는 그게 자연스러웠다.


여러 이유가 있었을 거다. 일단 사람이 많았었다. 막내 고모와 함께 살던 때는 식구만 여섯이었다. 게다가 다들 잘 먹었다. 가령 아버지는 어린 아이 머리통만한 크기의 커다란 그릇에 밥을 한 가득 비벼드시곤 했다.


한편으로는 넉넉잖은 형편 탓이었나 싶은 생각도 든다. 요즘도 그렇지만, 소분된 식재료는 비싸다. 한꺼번에 많이 사야 싸다. 그러니까 서로 다른 식단을 두 번 차릴 값이면, 같은 식단을 세 번은 차릴 수 있었던 거다. 많이 사서, 많이 해놓으면, 몇 번의 끼니가 해결됐던 거다.



이해는 된다. 그러나 밥상 수요자 입장에서는 불만족스러울 수밖에 없다. 하나의 반찬으로 몇 번의 끼니를 먹으면, 금방 물릴 수밖에 없다.


수많은 가정에서 비슷한 현상이 목격된다. 냄비 한 가득 끓여 놓은 카레가 그렇고, 한 솥 고아 놓은 사골국물이 그렇다. 사골을 먹다 먹다, 마치 내 혀가 소 혀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들 때서야 비로소 바닥이 비워진 냄비를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역시 끝은 아니다. 새로운 시작이다. 냉동실문을 열어보면 투명한 크린백에 나뉘어 얼려진 사골국물이 또 가득한 것을 보게 될 테니.



살림을 꾸리는 입장에서는 끼니당 평단가를 떨구는 것이 필요했다. 다만 동시에 요구되는 것이 있었다. 맛이었다. 어머니로서 자식에게, 아내로서 남편에게, 며느리로서 시부모에게 맛있는 식탁을 차려내는 것은 그 시절의 의무였다.


그래서 어머니는 변주를 하셨다. 요리 한 가지를 푸걸나게 하신 뒤, 그걸 이용해서 약간씩 다른 찬을 만들어내셨다. 닭을 삶았다 치자. 그러면 그 날은 삶은 닭을 먹는다. 그 다음날 점심은 닭국물에 끓인 닭죽이다. 저녁에는 닭개장이다. 그 다음날은 미역국인데, 닭미역국이다.


많은 집이 그렇듯이, 우리 어머니도 애 쓰셨다. 끼니를 챙기느라 수고로우셨다.



이번에는 황태국이었다.


황태를 넣고 슬쩍 끓이면 국물이 맑다. 그렇지만 지나치다 싶을 만큼 한참을 끓여대면 국물이 뽀얘진다. 황탯물이 우러나오기 때문이다. 잘 말린 황태포와 두부, 무우, 어슷하게 썰린 대파가 송송. 황태국에 밥을 말면, 두부와 무우가 조금씩 으깨져 밥알과 뒤섞인다. 비슷하면서도 한 끗씩 다른 식감이 나름 조화롭다.


온 식구가 한 그릇씩 황태국을 먹었지만, 냄비 속 국은 건재했다. 줄어든 티도 나지 않았다. 당연하다. 애초부터 잔뜩이었으니.


이제 어머니가 변주를 하실 차례다. 마침 아버지가 야식을 먹자셨다.



황태국을 이용한 어머니의 요리는 황태떡국이었다.


우러나와 곰국 같은 빛깔을 내뿜는 황태육수에 갖은 양념과 떡을 넣고 더 끓인다. 우리 집은 너덜거릴 정도로 푹 익은 떡들을 좋아했기 때문에, 어머니는 떡국을 끓이기 전에, 떡대를 오랫동안 물에 불리곤 하셨다. 끓이는 것도 딱 한 소큼 끓이고 마는 것이 아니다. 세 네 소큼은 끓인다. 떡국이 다 끓어가면 계란 몇 개를 풀어 휘휘 젓는다.


완성된 떡국은 국물이 짙다. 한껏 불려진 떡에서 새어나온 탄수화물과 계란물에, 당초에는 없던 점성이 생기며 국이 찐득해진다. 한 숟갈 뜨면 왠지 국물이 더 봉긋하다. 끈적임으로 강해진 표면장력 때문이다.



고백컨대, 사실 황태를 좋아하지 않는다. 황태고 뭐고 말린 것들은 다 취향이 아니다. 코다리, 과메기, 말린 오징어. 다 그렇다. 건어물 뿐만이 아니다. 육포도 마찬가진다. 물짐승인지 뭍짐승인지를 떠나서, 말린 것들 특유의 느낌이 있다. 그게 별로다.


그러니까 애초부터 황태국 차림이 잘 멕히지도 않았었다. 황태국에 잘 말은 밥이 목 뒤로 술술 넘어간 것이 아니라, 힘들여 목구멍 너머로 넘겼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 거다.


안 먹을 수는 없었다. 싫은 티를 내기는 어려웠다. 밥투정을 하기에, 우리집은 다른 집과 달랐다.


남들처럼, 우리도 IMF로 망했다. 그러나 남들과 달리, 우리는 어머니께서 온 식구를 먹여살리셨다. 집 안에서는 공부방을 하며, 집 밖에서는 봇짐장수를 하며 돈을 버셨다. 어머니가 사방팔방 노고를 하실 때, 아버지는 안방에서 누워만 계셨다. 허리부상이라셨다. 앉아만 있어도 통증이 심하시다 하셨다.


놀라운 건, 그러면서도 식구들 끼니를 챙기는 것 역시 어머니의 몫이었다는 사실이다. 이 상황에서, 어느 자식이 밥투정을 할 수 있었을까.


그래서 넘겼었던 것이다. 황태국에 말린 밥알을.



야식을 먹자는 아버지의 말에 끓여내신 어머니의 황태떡국. 내게는 냄새조차 고약했다. 황태 내음이 물씬 났기 때문이다.


와서 떡국 먹으라는 어머니의 말. 맛이나 한 그릇 보고 자라는 아버지의 말. 흠칫했지만 싫다고 할 수는 없었다. 황태국을 싫어한다는 게 들통나면 어머니가 속상해하실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 밤에도 쉬지 않으시고 야식을 만들어내신 어머니의 힘듦이 빛 바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밥상에 앉았다. 떡국을 먹었다. 많이 먹지는 않았다. 딱 반 그릇 정도. 그러나 탈 나기에는 충분한 양이었다.


억지로 먹은 대가는 참담했다. 밥상에서 물러난지 한참. 시간이 많이 지난 것 같은데도 가슴팍 밑으로 음식이 안 내려가는 느낌이 들더니, 결국 구토를 해버렸다. 화장실에서 변기통을 붙잡았다. 게워낸 뒤에도 뱃속에서 냄새가 스멀거렸고, 밤새 고생을 했다.



트라우마가 남았었다. 황태떡국을 보면 식욕이 곤두박질쳤었다. 냄새의 기억도 남았는지, 황태떡국과 같은 공간에 있기도 괴로웠었다.


고전적 조건형성. 황태떡국 뿐만이 아니었다. 떡이 들어가지 않은 황태국도 못 먹었다. 심지어 황태국이 들어가지 않은 떡국도 못 먹었다. 그냥 떡국도, 꽤나 한동안.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야식을 먹자던 아버지, 황태떡국을 차리신 어머니, 음식을 억지로 삼켰던 아들. 누구에게도 악의는 없었다.


잘못은 환경에 있다. 상황에 있다. 손이 커야만 했던 환경, 눈치를 보며 떡국을 먹어야만 했던 상황. 그게 잘못했다. 우리의 잘못은 아니었다.



다행스럽게도, 환경도 바뀌었고 상황도 변했다. 이제 어머니는 손이 작으셔도 된다. 황태떡국을 안 먹고 싶다면, 이제 안 먹어도 된다. 눈치는 그만 봐도 된다.


수 천 번의 밤이 지나며 악몽도 옅어졌다. 여전히 황태를 비롯한 건어물은 좋아하지 않지만, 어디까지나 음식 취향 수준이다. 다시 황태국을 먹는다. 떡국은 게걸스럽게 몇 그릇이고 먹을 수 있다.



또 새해다. 전통처럼 떡국을 먹는다. 아무렇지도 않게.


그러나 이 아무렇지 않음이 아무럴 때가 있었다. 아무렇지 않음이 다시 아무렇지 않게 되는 데까지 적지 않은 세월이 필요했다. 떡국을 먹는다는 것은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지만, 이 평범을 되찾기까지 많은 시간들이 쌓아 올려졌어야 했다.


하마터면 평생 떡국을 못 먹을 뻔 했다. 이 맛있는 걸 다시 먹을 수 있다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떡국 한 숟갈이 어쩐지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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