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한솥도시락 새댁도시락
궁상 떨기가 싫었다. 돈 없는 티가 나는 것이 싫었다. 그러나 바가지가 샐 수 밖에 없던 환경이었다. 우리 집은 가난했다.
그래서 돈을 벌어야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부터 아르바이트를 했다. 다행히 벌이가 되는 일이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 어릴 적부터 공부방을 운영하시는 어머니 곁에서 어깨 너머로 배운 덕분인지, 체질에 잘 맞았다. 하루에 몇 타임이고 가리지 않았다. 편도 한 시간이 넘는 거리도 마다하지 않았다. 들어오는 모든 일을 닥치는 대로 했다. 목에서 소리가 나오지 않을 정도로, 병원에서 성대결절 판정을 받을 정도로. 쉬지 않았다. 쉬지 못했다.
그렇게 벌어들인 돈으로, 가난을 가렸다. 친구들에게 술을 사고, 후배들에게 밥을 사며, 여자친구에게 선물을 사주었다. 오랜 친구를 제외하면, 우리 집이 가난하다는 걸 아는 이들은 드물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은 꽤 짭짤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웠던 건, 나만의 시간을 가지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마치 돈을 받고 내 시간을 파는 것과 같았다. 수업 시간에는 온전히 아이에게 집중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아직 어린 대학생. 진로를 정하지 못한 나이. 어른이 되었을 때, 밥 벌어먹을 직장이라도 갖기 위해서는, 스스로 취업을 준비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이처럼 돈도 시간도 필요했던 이십대 초반 청년에게 독서실 총무 일은 꽤 매력적이었다. 비록 페이는 굉장히 적었지만, 자기계발 시간을 충분히 가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들게 하는 자리였다. 그렇게 독서실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남에게 쓰기 위해 돈을 벌다보니, 스스로에게 쓸 돈은 없었다. 남들 앞에서 가난한 티를 내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혼자 있을 때의 지출을 줄여야 했다. 궁상을 떨지 않기 위해, 혼자서는 더 궁상을 떨어야만 했다.
밥 먹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더 싼 거. 더 양 많은 거. 아득바득 가성비를 따졌다.
새로 일을 시작한 독서실에서 밥을 먹을 때에도 역시 그랬다.
독서실 총무는 파트타임제였다. 출근을 하면, 이전 시간대 총무와 교대를 했다. 열 살 가량 나이 많은 형이었는데, 회계사인지 계리사인지 시험을 준비한다고 했다.
교대시간은 딱 점심 때였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밥을 같이 먹었다. 나가서 먹을 수는 없었다. 총무실을 비우면 안 됐으니까, 늘 도시락을 포장해와서 먹었다.
그게 한솥도시락이었다.
둘 뿐이었지만, 도시락을 주문하고 가져오는 건 늘 막내 몫이었다. 전화로 주문하고, 약간의 시간 뒤에 직접 찾으러 갔다. 지금과는 달리 배달의 민족 같은 서비스가 없었을 뿐 아니라, 어차피 도시락집이 독서실 바로 옆이었기 때문에 그다지 힘이 들지는 않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때도 한솥도시락은 메뉴가 많았다. 대표 메뉴인 도련님도시락을 비롯해서 국화도시락, 고기고기도시락, 치킨마요, 김치볶음밥 등 골라먹는 재미가 있었다. 밥을 함께 먹는 총무형은 매일 메뉴를 바꿔가며 다양하게 점심을 즐겼다.
반면, 궁상을 떨기 싫다던 가난뱅이의 선택은 늘 같았다. 1,700원짜리 새댁도시락. 한솥도시락 모든 메뉴 중 가장 저렴한 도시락이었다.
엄청난 차이가 났던 건 아니었다. 9백원만 더하면 돈까스도시락이었고, 1천원만 더하면 치킨마요였다. 심지어 양도 달랐다. 새댁도시락은 밥의 양도 더 적었다. 그렇지만 차마 다른 메뉴를 주문하지는 못했다. 1,700원에 9백원이면 거의 50%를 더 지출해야하는 셈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늘 새댁도시락이었다.
오징어까스 한 덩이, 기름에 구운 어묵 반 덩이, 마카로니 샐러드와 김치 한 꼬집, 얇은 조미김 한 봉지. 여기에 흰 밥 반 공기. 새댁도시락의 전부였다.
다행스러운 건, 총무형이 심부름값 명목으로 5백원짜리 계란후라이를 하나 얹어주곤 했다는 사실이다. 본인 도시락에만 추가하기 민망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덕분에 한 끼 떼운다는 생각으로 먹기에는 나름 나쁘지 않은 식단이 완성되었다.
도시락집 아저씨는 친절했다. 분명 그랬었다. 일주일에도 몇 번씩 꼬박꼬박 물건을 팔아주는 단골이었으니까 친절할 수 밖에 없었을 거다.
위화감을 느낀 건, 한 달도 채 되지 않았을 무렵이었다.
처음에는 일상적인 대화인가 싶었다. 도시락집 아저씨가 말을 건네셨다. 요즘 다이어트를 하느냐, 살을 빼고 있느냐, 작은 새댁도시락 하나로 끼니가 되느냐 따위의 질문이었다. 왜 이런 걸 물으시는 건지 의아하기는 했지만, 적당히 웃으며 적당히 대답했다.
그런데 질문의 강도가 갈 수록 세졌다. 어린 여중생들도 양이 많은 도시락을 먹는데, 겨우 새댁도시락 하나로 배가 부르냐고 물으셨다. 더 직접적으로, 몇 백원만 추가하면 이런 저런 도시락들이 있는데, 다른 건 안 먹겠냐고 물으셨다. 왜 맨날 새댁도시락만 먹냐고 물으셨다.
태도도 바뀌어 갔다. 처음의 친절함은 온 데 간 데 없었다. 주문하려고 전화를 하면 "에휴, 새댁?"이라며 한숨과 함께 응대하시기도 했다.
면박을 받는 듯한 느낌이었다.
창피했고, 모욕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견뎠다. 돈이 부족했으니까. 스스로 궁상을 떨어야지만, 친구들 앞에서 궁상을 떨지 않을 수 있었으니까.
그 날도 평소와 같았다. 독서실로 출근을 했고, 함께 점심을 먹기 위해 한솥도시락에 주문을 했다. 새댁도시락에 계란후라이, 그리고 다른 고급 도시락.
하지만 독서실로 돌아와 도시락 뚜껑을 열었을 때, 평소와 다른 도시락을 보게 되었다. 계란후라이. 계란후라이가 없었다. 주문은 평소와 같았지만, 도시락은 평소와 달랐다. 총무형의 도시락을 힐끗 보았다. 그곳에는 정상적으로 계란후라이가 얹어져 있었다.
바로 전화를 할까, 매장을 찾아갈까 고민하다가 그만 관두었다. 박대하시던 도시락집 아저씨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지금도 불편해하는데, 계란후라이가 빠졌다는 얘기를 하면 아마 더 안 좋은 소리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냥 내일 말하면 되겠지 싶었다.
다음 날도 평소와 같았다. 독서실로 출근을 했고, 마찬가지로 한솥도시락에 같은 메뉴를 주문했다.
다만 도시락을 찾으러 매장을 들러, 평소에 하지 않았던 말을 했다. 어제 새댁도시락에만 계란후라이가 빠져있었노라고 말이다. 도시락집 아저씨는 썩 놀라지 않은 채 말씀하셨다. 아이고, 그랬느냐고. 미안하다고. 약간의 미안한 기색도 내비치지 않으신 것 같았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새댁도시락만 먹는다고 잔뜩 눈치를 받고 있는 처지였고, 앞으로도 무사히 도시락만 주문해 먹을 수 있으면 됐기 때문이다.
독서실로 돌아와 도시락 뚜껑을 열었을 때, 도시락의 모습은 전 날과 같았다. 전 날과 마찬가지로, 계란후라이가 없었다. 총무형의 도시락에는 오늘도 계란후라이가 있었다.
그 날을 마지막으로, 한솥도시락을 끊었다.
당시 편의점 도시락 중 제일 저렴한 메뉴가 2,300원 정도 했다. 새댁도시락 보다 거의 40% 가까이 비싼 가격이었다. 따박따박 가성비를 따지던 나로선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부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내했다. 6백원을 더 들여 모욕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다면, 기꺼이 6백원을 낼 용의가 있었다.
그렇게, 편의점 도시락을 먹게 되었다.
이전부터 쌓여왔던 게 터진 것이었다. 단순히 계란후라이 하나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건 실수가 아니었다. 단지 깜빡하고 계란후라이 넣는 걸 빼먹은 수준이 아니었다. 분명히 일부러 뺀 거였다. 왜 자꾸 돈도 안 되는 새댁도시락을 시키느냐는, 무언의 표현을 한 거였다. 도시락을 가져갈 때마다 계속 말을 하다가, 말을 해도 해도 안 들으니까, 이젠 계란후라이를 빼기에 이른 것이었다.
그 전까지 말로써 당해왔던 모욕은 견딜 수 있었다. 그러나 먹을 걸 빼앗기는 문제는 또 다른 차원의 모욕이었다.
수치스러웠다.
누군 맛있는 걸 안 먹고 싶어서 안 먹나.
이래야 해서 이러는데, 너무 심한 거 아닌가.
이래서 옛말에 먹을 거 가지고 치사하게 굴지 말라는 거였구나.
엉뚱한 깨달음만 얻게 된 기억이다.
반올림 하면 십 년이 흐른 지금, 남아있는 악감정은 없다. 가끔 밥 차려먹기가 귀찮을 때면, 한솥도시락을 사먹곤 한다. 그새 새댁도시락이란 메뉴는 사라져서 주문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렇다. 다시 한솥도시락을 사먹을 만큼 악감정도 사라졌고, 문제가 되었던 새댁도시락이라는 메뉴 자체도 사라졌다. 하지만 아직 남아있는 게 있다. 계란후라이다.
총무형 역시 안타까운 젊음이었을 거다. 본인이 준비하는 시험에서 몇 년씩이나 낙방을 했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그 형은 옆에 있는 동생을 챙겨줬다. 꼬박꼬박, 자신의 사비를 들여 계란후라이 하나씩을 챙겨줬다. 단 5백원짜리 토핑이었지만, 그 덕에 동생의 끼니는 꽤나 구성졌다.
악취가 나는 오물은 썩는다. 썩어 없어진다. 그러나 향기로운 꽃은 썩지 않는다. 한 해 피고 지는 것이 아니다. 꽃은 매년 피고, 씨앗을 뿌려 꽃밭을 이룬다. 이게 따뜻함의 힘이고, 이게 우리네 삶의 향기가 아닐까 싶다.
수 년 전, 계란후라이라는 꽃을 받았다. 다행스럽게 그 꽃은 잘 뿌리내려,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은은한 향기를 내뿜고 있다. 이제 꽃씨가 뿜어져나갈 차례다. 누군가에게 뿌리내릴 수 있는 꽃씨를 퍼트릴 수 있다면, 계란후라이쯤은 얼마든 사겠다.
도시락집 아저씨는 도시락에서 계란후라이를 뺐지만, 총무형은 동생의 마음에 계란후라이를 심어주었다. 동생의 마음 속에서 계란후라이는 아직도 향기를 내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