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치즈케이크 & 블랑1664
[여자]
신사역 8번 출구였지. 거기서 오빠를 기다리는데, 오빠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쫙 올라오는 거야. 땅에서 얼굴부터 솟아오르는데, 세상에 너무 내 스타일인 거야. 바로 마음 먹었지. 이 남자다. 이 남자, 내 남자로 만들어야겠다. 내가 꼬셔야겠다.
"야, 나 연애한다."
가로수길 고기집에서 고기를 구워먹다가 무심히 툭 내뱉는다. 함께 고기를 먹던 녀석들이 적잖게 놀란다. 어찌나 놀랐는지, 고기 먹던 젓가락을 테이블에 그대로 내려놓았다.
"와, 형 이게 얼마만이야. 1년? 2년? 아니, 그동안 연애 안 했잖아."
"몰라. 그렇게 됐어. 이제 더 연애 안 했으면 좋겠다. 나도 정착해야지."
남자는 오랜만에 연애를 시작했다. 마지막 사람을 찾고 싶다며 한참을 헤매이다 시작한 연애다. 그렇게 신중하게 고르던 것치고는 너무나 불쑥 시작하긴 했다. 소개팅, 첫 만남 자리. 2차로 간 이자카야에서 바로 고백해버렸으니까.
[여자]
난 오빠가 원래 그런 사람인가 싶었어. 그냥 이렇게 쉽게 연애하는 사람인가? 나에 대해서 뭘 안다고 사귀자고 하는 거지? 물론 나야 오빠가 마음에 들어서 꼬시고 싶었으니까 싫을 건 없었지만, 그래도 좀 그렇긴 했어. 물론 오빠랑 사귀고 나서는 오해가 풀렸지. 많이 진중한 사람이라는 걸 알았으니까.
남자는 두 가지 재능이 있었다. 하나, 사람을 잘 본다는 것. 또 하나, 자신의 재능을 잘 안다는 것. 남자는 자신이 사람을 잘 본다는 것을 알았고, 자신의 사람 봄을 믿었다. 그래서 첫 만남에 바로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오늘 만난 여자는, 참 괜찮은 사람이라는 걸.
남자는 적잖게 연애를 했다. 부지런히도 만나고 다녔다.
그렇지만 남은 건 이별 뿐이었다. 만남의 수만큼, 이별도 쌓였다.
남자는 더 이상 연애를 하고 싶지 않았다. 딱 한 번. 남은 평생을 같이 할 사람과의 연애 딱 한 번. 오직 그것만을 바랐을 뿐이다.
그러니까 남자에게 연애는 큰 의미였다. 어쩌면 마지막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짙게 한 것이다. 친구놈들은 남자의 이런 생각을 잘 알고 있었기에, 고기 먹던 젓가락도 내려놓고 남자의 새로운 만남을 물어본 것이다.
한 잔, 두 잔.
얘기가 더해갈수록, 술잔도 넘어간다.
어느새 남자는 취기가 올랐다.
[남자]
안 믿으시겠지만, 아니, 안 믿으실 거에요. 알아요. 그렇지만 저, 정말 이런 적 없거든요. 진짜에요. 저 연애한 지도 꽤 오래 됐어요. 저 거짓말은 안 하는데, 하아, 이걸 어떻게 믿게할 수 있을까요. 음, 처음 만난 날 이런 얘기 해서 제가 좀 가벼워보일 것 같긴 한데요... 저랑 만나보실래요?
술에 취한 남자가 전화를 건다.
"어? 오빠?"
여자다.
"무슨일이야? 친구들이랑 술 마시는 거 아니었어?"
의아함 보다는 반가움이 더 큰 목소리다.
"다 마셨어. 나 지금 일어나도 돼. 그래서 말인데, 지금 집에 가도 돼?"
취해서 그런지 거침이 없다. 남자는 아직 여자의 집에 가본 적이 없다.
"오빠 지금 취했지. 혀도 꼬인 거 같은데?"
"아, 그래서 가도 돼, 안 돼."
"얼른 와. 기다릴게."
남자는 신이 났다. 전화를 끊고는, 같이 먹던 놈들에게 황급히 작별인사를 건넨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2차 어디갈까 얘기하던 사람이, 후다닥 짐을 챙겨 나가는 모습을 보니 다들 어처구니 없어하는 모양새다. 그렇지만 그들의 눈총으로는 남자를 막을 수 없었다.
남자는 바로 택시를 잡아탔다.
[여자]
그게 얼마나 감동이었는지 몰라. 그렇게 술에 취한 상태에서도 날 생각해서 내가 좋아하는 걸 사다준 거잖아. 나는 그런 연애를 해본 적이 없었어.
[남자]
대체 넌 어떤 연애를 해왔던 거야. 내가 좋아하는 사람한테, 그 사람이 좋아하는 걸 사다주고 싶은 건 당연한 거 아냐? 그렇게 좋았다니까 내가 다 민망하다. 내가 뭘 그렇게 어려운 일을 했다고.
택시를 타고 여자의 집으로 가는 길. 남자는 흐릿한 눈으로 창 밖을 바라본다. 택시의 속도로 멀어지는 풍경. 아직은 낯설지만, 조만간 익숙해질 모습이다. 여자의 동네니까.
그런데 무슨 일일까. 뿌옇게 흐리던 남자의 눈이 갑자기 밝아지더니, 차를 급히 세운다.
"앗, 기사님, 여기서 좀 세워주세요. 아이고, 죄송합니다."
택시에서 내려선 남자는, 택시가 달려온 길을 약간 거슬러 올라가더니, 한 상점의 문을 열고 들어간다. 딸랑. 문 열리는 소리. 어서오세요. 손님을 반기는 소리. 거기에 더해지는 후각. 식욕을 자극하는 버터향. 빵집이었다. 파리바게트였다.
먹음직스러운 빵이 많았지만, 남자는 사냥을 하듯, 사냥감에만 손을 뻗었다. 차갑게 보관되고 있던 치즈케이크였다.
남자의 사냥은 빵집을 나온 뒤에도 이어졌다. 편의점 맥주매대 앞. 수많은 맥주 중, 남자는 블랑1664만 네 캔을 골랐다.
치즈케이크.
그리고 블랑1664.
여자가 좋아하는 것이었다.
[여자]
진짜 신기해. 알잖아, 나 회사에서 엄청 스트레스 많이 받는 거. 그렇게 힘들어도 오빠 만나서 '충전'하면 그 순간 싹 낫는 거야. 그럴 때마다 느끼지. 아, 내가 오빠를 진짜 좋아하는구나 라고.
여자는 치즈케이크를 좋아했다. 남자도 치즈케이크를 좋아했다. 둘은 닮은 게 참 많았다. 어쩌면 그래서 둘은 처음부터 끌렸고, 그 어떤 연인보다도 빠르게 가까워졌다.
서로는 서로를 좋아했다.
약속장소. 남자가 여자를 기다리고 있다. 멀리서 여자가 나타난다. 남자는 싱긋 웃으며 여자를 반긴다. 여자는 뛰듯이 걸으며 거리를 좁힌다. 마침내 여자의 발이 남자의 발과 나란해질 때, 여자는 남자의 품에 얼굴을 파묻고 꽈악 끌어안는다. 남자는 여자를 품어안는다. 길거리. 남들이 보지만 상관없다. 어차피 둘은 다른 이들이 보이지 않았다.
"나 힘들었어."
여자가 입술을 가볍게 내밀며 말한다.
여자는 남자를 보자마자 꽉 안는다. 그리고는 그 상태를 유지한다. 여자는 이것을 충전이라고 불렀다. 회사에서든 사회에서든 받은 스트레스를 이렇게 푼다고 했다. 남자를 안으면, 신기하게 힘듦이 풀린다고 했다.
"오빠, 나도 이러는 거 처음이야. 다른 사람에게 이래본 적 없어."
여자가 말한다. 어쩐지 둘의 첫 날이 생각나는 말이다.
[여자]
사랑해. 정말 오빠를 온전히 다 사랑해.
[남자]
나도 너 좋아해.
시간이 흐름에 따라, 둘의 애정도 깊어졌다. 둘은 서로를 닮은 만큼, 참 잘 맞았다. 여자는 남자의 말을 듣는 것을 좋아했고, 남자는 여자에게 자신의 얘기를 들려주는 것을 좋아했다. 그저 서로 이야기만 나누어도 호감이 짙어지곤 했다.
그러나 모든 부분이 치즈케이크 같지는 않았다. 서로의 닮음으로 가까워진 사이는, 서로의 다름으로 멀어지기에 충분했다. 남자에게는 그러했다. 남자의 모두를 사랑하는 여자와 달랐다.
남자는 블랑을 싫어했다. 여자와 달리.
사랑.
남자는 사랑을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수영을 못 한다. 그런데 나에게 소중한 누군가가 물에 빠졌다. 그러면 나는 그 사람을 살리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방법을 찾을 거다. 던져줄만한 노끈은 없는지, 튜브는 없는지 찾는다. 얼른 119에 전화도 한다. 그러면서 가라앉는 소중한 사람을 보며 발을 동동 구른다. 이건 내가 그 사람을 좋아하는 거다.
똑같은 상황에서, 내가 앞뒤 가리지 않고 물에 뛰어들어가는 거. 수영을 하건 못하건 인식조차 하지 못하고 그 사람을 구하기 위해 뛰어드는 거. 나라는 1순위를 넘어서 누군가가 나에게 0순위가 되는 거. 내 목숨보다 그 사람이 먼저인 거. 이게 사랑이다.
남자는 이어서 생각한다. 과연 여자가 자신보다 먼저일까. 여자가 물에 빠지면, 재지 않고 물에 빠져들까. 남자는 선뜻 고개를 끄덕이지 못한다. 그래서 결론내린다. 아직 여자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알고보니, 애정은 비대칭적이었다. 한쪽이, 다른 한쪽 보다 깊었다.
멀어짐은, 애정의 비대칭에 대칭되었다. 애정이 얕은 쪽의 마음은, 그렇지 않은 쪽보다 더 빠르게 멀어졌다.
여자는 남자를 사랑했기에 쉽게 돌아나오지 못했고, 남자는 여자를 좋아하는 데에서 그쳤기에 수월하게 돌아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남자에게, 이것은 결코 성공이 아니었다.
또 한 번, 연애에 실패한 것에 불과했다.
[남자]
너 아니었으면, 이거 시작도 못 했어.
또 한 번의 만남과 또 한 번의 이별. 그렇지만 이번 이별은 이전의 이별과 달랐다. 여자의 흔적은 남자에게 무겁게 남았다. 브런치. 브런치였다.
남자는 매주 글을 쓴다. 31주째다. 퇴근 후, 가장 많은 시간을 브런치에 연재하는 글을 쓰는 데에 쏟는다. 이 브런치는, 여자로부터 비롯되었다.
남자에게는 바람이 하나 있었다. 타인의 제안으로 자신의 글을 엮은 책을 내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남자는 이를 바라기만 할 뿐, 별다른 자신감은 없었다. 수차례 낙선한 문학 공모전의 기억이 남자의 자신감을 좀먹은 까닭이었다.
여자는 남자에게 힘이 되어주었다. 몇 번이고 남자를 설득했다. 포털사이트 메인에 걸린 어지간한 글보다도, 심지어 출간되어 서점에 진열된 어떤 어떤 책보다도, 남자의 글이 낫다고 했다. 글을 잘 쓴다고 했다. 남자의 소망은, 이루어질 수 있는 꿈이라고 했다. 일단 시작해보라고 했다. 남들에게 글을 보여보라고 했다.
남자는 여자의 말을 믿지 않았다. 남자는 스스로 글을 잘 쓴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남자의 눈에, 남자의 글은 허점투성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여자의 말을 들었다. 여자의 말이 일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일단 시작해보는 것은 결코 나쁜 선택이 아니었다. 남자는 마음먹었다. 한 주에 하나씩 글을 올려보기로. 그렇게 딱 1년, 52주는 꿋꿋이 해보기로. 독자가 단 한 명도 없더라도, 일단 그만큼은 해보기로. 그렇게 브런치를 시작하였다.
그 결과는 크게 다행이었다. 한 명의 독자를 걱정하던 브런치 새내기는, 당초의 기대치를 아득히 뛰어넘는 숫자들과 마주하게 되었다. 30편의 글. 600명이 넘는 구독자. 100만이 넘는 조회수.
남자는 생각한다. 이들은 모두 여자로부터 잉태되었다고. 여자가 남자의 기운을 북돋아주지 않았더라면, 남자의 글을 치켜세워주지 않았더라면, 아마 남자는 아직까지도 글 쓰기를 주저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여자는 남자의 일상에 머문다. 남자의 글에 누군가가 좋아요를 눌렀다는 알림이 뜰 때마다, 조회수가 몇을 넘었다는 알림이 뜰 때마다, 구독자가 생겼다는 알림이 뜰 때마다, 여자의 기억은 남자에게 스치운다.
남자는 여자의 번호를 잊지 않았지만, 소용 없는 기억이다. 술에 취해도 누르지 못하는 번호다. 끝나버린 인연이기 때문이다.
여자는 흔적을 남기고 떠났지만
남자는 그 흔적 위에 일상을 차린 탓에
남자의 일상에는 여자가 머문다.
이제 여자의 곁에는 남자가 없다.
그러나 남자의 곁에는 여자가 있다.
남자의 모든 글에
여자가 아른댄다.
우스운 건,
남자는 여자의 전화를 기다린다는 것이다.
무슨 심보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