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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장밥 Apr 07. 2021

팥빙수가 먹고 싶다. 여름도 아닌데.

34. 캔모아 눈꽃빙수, 우리집 팥빙수

장난감. 파란색 트럭. 짐칸이 열려있는 전형적인 화물트럭은 아니고, 다마스 같이 생겼다. 운전석에는 미키마우스가 앉아 있다. 작은 진동에도 고개가 흔들거리도록 만들어 놓았다. 머리가 덜렁거린다.


트럭 뒷문을 열면 텅 빈 내부가 보인다. 국그릇 하나는 거뜬히 들어갈 공간이다. 트럭 지붕에는 트럭 문짝보다 큰 손잡이가 붙어있다. 마치 연필깎이 손잡이를 달아놓은 듯 하다. 손으로 잡고 뱅글 돌리면, 속에서 무언가가 따라 돌아간다. 무엇에 쓰는 물건일까.


답부터 말하자면, 장난감 트럭 같이 생긴 이 물건의 정체는 빙수기다. 수동 쇄빙기.


트럭 위에 달려있는 손잡이를 돌리면, 겉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트럭 안에서는 가시 박힌 원판이 돌아간다. 작은 국그릇만한 플라스틱 박스가 트럭 천장 안쪽에 붙어있는데, 여기에 얼음을 넣고 손잡이를 돌리면, 날카로운 가시와 박스 안쪽에 붙어 있는 칼날이 얼음을 갈아 밑으로 떨군다. 그러니까, 트럭 뒷문을 열고 그릇을 넣은 채 손잡이를 돌리면, 그릇에는 갈린 얼음이 쌓이게 되는 구조다.


그러고보니 트럭 옆 면에 쓰여있는 문구가 익살스럽다.


MICKEY'S

ICE SHOP



얇은 스댕 국그릇에 물을 7할 정도 채워서 냉동실에 넣는다. 물은 얼면 부피가 커지기 때문에 언제나 그릇에 부족하게 담아야 한다. 가족이 여럿이니까, 얼음 하나로는 부족하다. 몇 개 그릇에 물을 담아 얼린다.


어머니는 팥을 쑤신다. 토실거리는 붉은 팥을 시장에서 사오신 뒤, 설탕과 함께 팥을 잘 삶아내신다. 팥 같은 곡물은 아삭거리는 식감 따위가 없기 때문에, 맘 놓고 오랜 시간 푹 삶으신다. 워낙 아버지께서 부드러운 식감을 좋아하셔서 어머니가 맞춰주신 건지도 모르겠다.


미키마우스 빙수기 뒷 문을 열고, 비어있는 플라스틱 박스에 둥글게 언 얼음을 넣은 뒤, 비어있는 그릇을 넣고 힘을 주어 손잡이를 돌리면, 투박하게 갈린 얼음이 벚꽃처럼 떨어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릇에 소담히 담긴 얼음 위에, 어머니가 오랜 시간 쑤어내신 팥을 올리고, 그 위에 미숫가루 약간, 연유 악간을 더한다. 그러면 이걸로 끝이었다.


우리 가족이 여름에 제일 많이 먹었던 얼음 간식.

어머니표 팥빙수였다.



대학교 1학년 때. 팥빙수를 먹으러 갔다. 빙수 먹으러 가자고 먼저 제안한 것은 아니었다. 같이 있던 친구가 손을 잡고 이끌기에, 그대로 따라갔다.


"오빠. 내가 오늘 팥빙수의 신세계를 보여줄게."


빙수면 빙수지, 신세계랄 게 뭐 있을까 생각했다. 우리 집 팥빙수에 익숙해져 있어서인지, 밖에서 먹는 빙수에 만족한 적이 없었었다. 젤리니 떡이니, 밖에서 파는 팥빙수에 얹어진 토핑은, 되레 조잡하게만 느껴졌었다. 우리 집 팥빙수가 최고였다. 신세계를 맞이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어쨌든 친구의 손을 뿌리치지 않고 얌전히 따라갔다.


문을 열고 들어간 곳은, 아기자기한 카페였다. 마치 숲 속 요정의 집처럼 예쁘장하게 잘 꾸며놓았다. 동화책 속 그림을 옮겨놓은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자리도 특이했다. 둘씩 앉을 수 있는 흔들그네가 의자처럼 놓여있었다. 더욱 놀라웠던 건, 그곳이 빙수 전문점이었다는 사실이다. 빙수를 전문으로 하는 카페라니. 당시로서는 생소한 곳이었다.


하지만 가장 강렬한 놀라움은, 빙수 그 자체였다. 친구의 말은 그대로 이루어졌다. 신세계. 빙수의 신세계를 경험했다.


생긴 것부터 달랐다. 미키네 얼음가게에서 갈려나오던 투박한 얼음이 아니라, 입자가 눈에 잘 보이지도 않을 만큼 곱게 갈린 얼음이 실처럼 켜켜이 깔려, 커다란 대접을 가운데에 우뚝 솟아있었다. 그 위에는 원색의 시럽이 몇 줄 뿌려져있었고, 얼음이 미처 채우지 못한 공간에는 각종 과일이 빼곡했다.


맛 또한 진짜였다. 모양새만 그럴 듯한 게 아니었다. 곱디 고운 얼음이 행여나 부서질까 조심스레 떠서 입에 넣으면, 전에 없던 신세계. 얼음은 입 안에서 부서지듯 녹으며 사라졌다. 심지어 그냥 얼음도 아니었다. 물이 아니라 단 맛을 내는 감미료를 더한 우유를 타서 얼린 듯 했다. 연유 얼음 같은 느낌. 믿기지 않을 만큼 맛있었다.


캔모아의 눈꽃빙수를 처음 먹은 날이었다.



그 날 이후, 마음 속 팥빙수 순위가 바꼈다. 눈꽃빙수는 우리 집 팥빙수를 밀어내고 최애 팥빙수 자리를 차지했다.


가소롭게 우스운 건, 그 때부터 우리 집 팥빙수가 달라보였다는 사실이다. 빙수는 그대로인데, 그걸 바라보는 눈이 달라졌다. 캔모아 눈꽃빙수를 보다가 우리 집 빙수를 보니, 이유 없이 촌스러워 보였다. 얼음을 갈아낼 때, 미키마우스 머리가 덜렁거리는 것조차 유치해보였다. 익살스럽다고 생각했던 빙수기 문구는, 왠지 밖에 내보이기 부끄러워졌다.


생각건대, 어리고 건방진 미운 마음이었다. 깊은 곳 어드메에서, 무시하는 마음이 있었을 거다. 우리 집 식구들은 눈꽃빙수를 모른다. 캔모아에 가본 적이 없다. 평생 우리 집 빙수 같은 것만 먹어봤을 거다. 세련된 요즘 빙수를 알지 못할 거다. 그러니까 우리 집 빙수만 좋아하지. 이런 마음이었을 거다.


우리 집 팥빙수가 괜히 꺼려졌다.



그러나 지금, 그 많던 캔모아는 다 어디로 사라졌나. 번화가 목 좋은 곳마다 또아리를 틀고 있던 그 많던 캔모아는 다 어디로 갔나. 간신히 명맥을 잇고 있는 몇 군데를 제외하면, 주변에서 캔모아 매장을 찾기란 여간 쉽지 않다.


물론 꼭 캔모아가 아니더라도, 빙수는 다른 형태로 유행을 타긴 했었다. 한 때는 카페베네를 위시해서, 화려한 토핑 위주의 카페식 빙수가 잘 나갔다. 인절미 빙수 덕에 설빙 붐이 일어나기도 했었고, 망고빙수의 열풍을 타고 삼형매 빙수 같 외국 유명 빙수 브랜드가 우리나라에 상륙하기도 했다.


딱 거기까지였다.


삼삼오오 모이기만 하면 카페에 가서 빙수를 시키던 문화는 이제 없다. 캔모아가 한 차례 휩쓸고 지나갔듯, 수많은 빙수 브랜드가 반짝 하고 사라졌다. 설빙에서는 떨어지는 매출에 대한 자구책으로 단팥죽 같은 신메뉴를 내놓기도 한다.


만약, 눈꽃빙수가 정말 우등한 빙수였다면, 이렇지는 않았을 거다. 맛있는 것에 반응하는 건 자명한 이치니까.



새로운 것에 대한 신박함은 한계 효용 체감이다. 두 번째 경험은 첫 번째만 못 하고, 세 번째 경험은 두 번째만 못 하다. 대개 그렇다.


음식 역시 마찬가지다. 기존에 먹어왔던 음식이 기존에 봐왔던 모습이 아닐 때, 그 새로움은 새라 새롭다. 오랫동안 먹어온 음식일수록 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새로운 모습의 음식을 반복해서 볼수록, 새로운 느낌은 엷어진다. 처음에의 놀라움은 먹을수록 떨어진다. 단 몇 번의 경험만으로, 새로운 모습은 더 이상 새로운 모습이 아니게 된다.


우리의 뿌리는 그렇지 않다. 새로움은 시간에 의해 옅어지지만, 그리움은 시간에 의해 짙어진다.


화려한 빙수를 볼수록 우리집 빙수가 떠오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캔모아니 카페베네니 설빙이니 하는 어여쁜 빙수들이 자취를 감출 동안, 우리집 옛날 빙수는 어떠했나. 우리집 빙수에 대한 나의 마음은 어떠한가.


굳건하다.


본래 나였던 사람. 같은 몸, 같은 마음이었던 사람. 우리 어머니, 우리 집에서의 음식은 깊고 깊은 곳에 이미 내재되어 있다. 부정할 수 없다. 어머니의 몸으로부터 떨어져나온 지 수 십 년이 흘렀지만, 그 뿌리는 변하지 않는다. 뿌리를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여름도 아닌데

팥빙수가 먹고 싶다


애도 아닌데

어머니가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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