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연남동 디저트카페
첫 만남도 연남동이었다. 군데군데 초록 잎으로 뒤덮인 통유리창 너머로 훤히 보이는 실내. 예쁘지만 불편한 식탁과 의자. 프랑스어로 뭐라뭐라 써진 간판. 유럽쯤 유학을 다녀온 것 같은 젊은 셰프가 하는 서양요리집. 여자는 먼저 들어가 앉아있었다.
"와, 반가와요. 오셨어요?"
시원하게 뚫린 커다란 창으로 한낮의 햇빛이 비추었기 때문일까. 여자는 환히 빛났다.
소개팅. 둘이 처음 만난 자리. 남자는 분명 표정을 숨기지 못했으리라.
그만큼 여자는 예뻤다. 여자의 미소는 그보다 더 예뻤고, 한껏 상냥한 음성으로 채워진 인사는 또한 더욱 예뻤다.
"ㅇ..ㅏ....안녕ㅎ...하세요....!"
어버버. 남자의 고질병이 도졌다. 마음에 드는 사람 앞에서 얼어버리는 불치병. 내세울 거라곤 말솜씨 뿐인 사람인데, 그마저도 스스로 얼어버리는 거다.
둘은 서양요리집에서 서양요리를 먹었겠지만, 남자는 메뉴를 기억하지 못한다. 여자에게 혼이 나간 탓이고, 애초에 코쟁이들 요리를 잘 모르는 탓이다.
남자가 음식을 가리는 편은 아니었다. 가리는 것 없이 다 잘 먹었다. 남자가 꼬맹이 시절. 어른들은 남자가 먹는 걸 즐겨보셨다. 뭣이든 복스럽게 잘 먹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남자는 한국인이었다. 전형적인 한국 입맛이었다. 스테이크 보다는 삼겹살을 좋아했고, 파스타 보다는 국수를 좋아했다. 스프 보다 죽, 리소토 보다 볶음밥, 샐러리 보다 깻잎이었다. 이탈리안 레스토랑 보다 재래시장 좌판이었다.
게다가 남자는 군것질을 잘 하지 않았다. 전채니 후식이니 하는 것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제 돈 주고 과자를 사먹는 적도 손에 꼽는 정도였다.
음식은 문화다. 먹는 건 습관이다.
남자는 서양 음식에는 문외한일 수 밖에 없었다. 특히 서양 디저트에는 철저히 멍청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여자는 예뻤다. 연애도 적잖게 했고 소개팅은 더 많이 한 남자였지만, 이렇게 예쁜 사람은 손에 꼽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단순한 예쁨이 아니었다. 아름다움이라고 부르는 게 더 어울렸다. 다른 이들에게 뽐내듯 발산하는 예쁨이 아니라, 소음 없이 뭇 사람들을 빨아들이는 아름다움이었다. 고풍스러웠고, 고급졌다. 여자가 구태여 애를 쓰지 않아도, 그녀에게선 아우라가 슬쩍씩 풍겨져 나왔다. 은은하되 무거운 품위였다.
웃음조차 정갈했다. 굳이 스스로를 꾸며내 웃지 않아도, 자연스러운 정제됨이 느껴졌다.
심지어 사람까지 됐다. 된 사람이었다. 상대방을 대하는 여자의 태도에서 느낄 수 있었다. 남자에게 대하는 태도가 그러했고, 음식점 직원에게 대하는 태도가 그러했다. 전봇대 귀퉁이에 쭈그려 울고 있던 고양이에게 내미는 손이 그러했다.
손마저 눈부셨다. 여자는.
"그... 혹시... 어떤 음식 좋아하세요?"
여자를 궁금해하는 남자의 질문. 별 어렵지도 않은 얘기를 잔뜩 긴장한 채 묻는 남자와 달리, 여자는 큰 고민 없이 답한다. 서양 음식들을 좋아하노라고. 그리고 디저트들을 좋아하노라고.
식성이 딱 맞지는 않았지만, 남자에게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 이상으로 여자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남자가 딱히 그런 메뉴를 싫어하는 것도 아니었다. 바지락 칼국수를 더 좋아할 뿐, 봉골레도 괜찮았다.
남자는 여자의 입맛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하지만 여자는 그렇지 않았나보다.
첫 번째 만남. 연남동 레스토랑. 약간의 쎄함은 있었지만, 큰 무리 없이 둘은 헤어졌다.
두 번째 만남. 이번에도 연남동. 여자의 집이 연남동이었던 까닭에, 남자가 나름 배려한 셈이다. 문제는 장소가 아니었다. 첫 만남에서 느껴졌던 쎄함이, 두 번째 만남에서는 보다 명확한 균열이 되었다.
"ㅈ...지난 주말에 뭐 하셨어요?"
"친구들이랑 디저트 카페 갔어요. 저번에 갔던 까눌레 집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또 갔지 뭐에요."
"네..? 까... 뭐요...?"
"까눌레요."
"까몰.... 네?"
"까눌레 안 드셔보셨어요? 벌써 몇 년 전에 유행한 건데?!"
"어... 저는 아예 처음 듣는데요? 그게 뭐지?"
남자는 어디에서 덜 떨어진다는 이야기를 듣는 편은 아니었다. 오히려 똑똑하다는 이야기를 왕왕 듣는 편이었다. 남자는 잡스러운 지식을 워낙 많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여자의 눈에 남자는 바보였다. 똥멍청이였다. 여자는 그저 일상을 말할 뿐인데, 남자는 알아듣지를 못했다.
남자는 크게 깨달았다. 서양 음식 쪽으로는 자신의 앎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걸 말이다. 이전에는 알아차리지 못 했던 사실이다.
"우리, 아예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것 같아요."
여자가 말했다.
세 번째 만남. 여자를 따라 까눌레 카페에 갔다. 역시 연남동이었다.
요즘 유행하는 인스타 카페 같은 외관. 분위기 있게 예뻤다. 꼭 여자를 닮은 듯 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낯선 고소함이 풍겨왔다. 이게 까눌레 냄새인가. 남자는 생각했지만, 오래 생각할 겨를은 없었다. 카페 벽 한쪽에 진열된 구리빛 장식품들이 시선을 빼앗은 터다. 격자를 그리며 가로 세로로 잘 짜여진 나무틀. 네모난 공간에는 로마제국 어느 장수의 투구처럼 광택이 나는 금속 물품이 가지런히 들어차 있었다. 한 공간에 하나씩. 깔끔하게.
시선을 조금 내리자 사면이 유리로 된 진열장이 보였다. 진열장 안에는 손글씨로 적은 메뉴 뒤로, 처음 보는 음식이 나란히 늘어서있었다. 나무틀에 진열된 구리빛 장식품과 똑같은 크기. 똑같은 모양. 아하, 얘네들을 만든 틀이 저 장식품이었나보다. 남자가 얼추 때려맞춘다.
그런데 장식품에서 느껴지는 무게와 다르게, 정작 유리 진열장 안에 줄지어 선 음식은 그리 세련되어 보이지 않았다. 로마 장군의 투구는커녕, 진흙탕 전투를 하고 돌아온 패잔병의 맨발 같은 느낌. 차라리 투박하다고 표현하는 게 더 맞았다.
전체적으로는 원통형 사다리꼴 모양이다. 윗면의 동그라미가 아랫면의 동그라미보다 작다. 옆면은 까눌레 동 틀의 물결무늬가 그대로 남아있다. 색깔은 거무튀튀하다. 질감도 까끌해보인다. 현무암 같달까. 아니다, 이거 완전 연탄같다.
그게 까눌레였다.
생전 처음 보는 음식. 그리 좋아보이지도 않는 음식. 입에 딱 맞지도 않는 음식. 남자에게 까눌레는 그랬다.
여자는 아니었다. 갔던 곳을 또 찾아갈만큼 좋아하는 음식. 그게 까눌레였다.
어쩌면 여자는 남자에게 공감을 바랐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취미를 함께 즐겨주기를 바랐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남자는 그러지 못했다.
문제는 그 뿐만이 아니었다. 세 번을 만났음에도, 남자는 긴장을 풀지 못했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여자에게 보여주지 못했다. 만남이 거듭될 수록, 두 사람의 차이점을 느끼게 할 뿐이었다. 까눌레 같은.
세 번째 만남의 끄트머리. 남자는 여자에게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는다. 당신이 마음에 든다고. 앞으로도 계속 더 봤으면 좋겠다고. 다만, 그 욕심이 너무 앞선 나머지 세 번의 만남을 모두 망쳤다고. 다시 몇 번의 기회를 주었으면 좋겠다고. 분명 나아질 거라고. 지금 느끼는 것보다, 자신은 훨씬 더 괜찮은 사람이라고.
여자가 답했다. 조금만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남자는 알겠다고 했다.
며칠 뒤, 여자는 남자에게 이별을 고했다. 아무래도 우리는 너무 다른 것 같다는 말과 함께.
남자는 한스러웠다. 크고 크게 아쉬웠다. 얼마만에 만난 괜찮은 사람인데. 찾아온 기회를 본인이 날려먹은 것 같았다.
남자는 생각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왜 평소처럼 굴지 못했을까. 왜 그렇게 긴장하고, 왜 그렇게 부자연스러웠을까. 만약 새로운 기회가 또 다시 주어진다면, 어떻게 하면 놓치지 않을 수 있을까. 그 때는.
한탄과 고민을 반복하기를 수 일. 불현듯 남자가 깨달았다. 돈오.
남자는 여자의 맵시가 자신보다 훨씬 괜찮다고 생각했다. 마음씨도 자신보다 괜찮다고 생각했다. 솜씨도 자신보다 괜찮다고 생각했다. 즉, 남자는 자신이 여자보다 못 하다고 생각했다.
남자에게 여자는 난이도가 너무 높은 시험이었다. 실제로 어땠는지는 차치하고서라도, 어쨌든 남자의 마음 속에서는 그러했다.
언제 다시 찾아올지 모르는 기회. 자신보다 훨씬 괜찮은 사람. 아득히 높은 난이도.
그래서 남자는 긴장을 한 거다. 자신이 못났다고 여겼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문제를 찾아낸 뒤, 답을 찾는 건 쉬웠다. 남자 본인도 좋은 사람이 되면 되는 거였다.
간단한 이치였다. 좋은 사람이 좋은 사람을 만난다. 스스로가 못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어떻게 월등히 잘난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그걸 바라는 건 막연한 욕심이었다. 그 욕심을 부리고 있었다. 남자가.
겸손함과 열등감은 한 끗 차이이지만, 그 한 끗은 아득하다. 자신감.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있는 사람은 겸손할 수 있으나, 스스로를 불신하는 사람은 겸손할 수 없다. 자신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믿을 때, 비로소 겸손함이 갖추어진다. 역설적으로.
자신을 믿는 것은 무게중심을 내리는 것과 같다. 주변의 요동이 심해져도, 스스로를 잃지 않는다. 이로부터 여유가 나오고, 평상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일찍이 남자는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조급한 마음에 긴장을 하고, 평소와 같이 행동하지 못했었던 거다.
내가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하는구나. 그래야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겠구나. 남자는 깨달았다.
그래서, 남자는 운동을 시작했다. 스스로에게 떳떳한 몸을 갖기 위해서. 그리고 서양요리에 대한 책을 읽기 시작했다. 덜 채워진 부분을 채우기 위해서.
여자에게는 꽃가루 보다도 작은 인연이었을 거다. 하지만 남자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작지 않은 가르침을 준 만남이었다.
여자에게 이별을 당한 며칠 뒤. 그래서 남자는 여자에게 다시 연락을 했다.
곧 기억도 나지 않으실 만남이었겠지만, 덕분에 많은 걸 배웠습니다. 감사하다는 말을 드리고 싶어서 다시 연락 드렸어요. 늘 행복하시길 바라겠습니다. 답장은 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답장은 오지 않았지만, 남자는 속상하지 않았다. 고백을 거절당하고 또다시 연락을 한 꼴이었지만, 남자는 민망하지도 않았다. 남자는 여자에게 고마웠다. 그 고마움을 꼭 전하고 싶을 정도로.
고마움을 전했으니, 그것으로 충분했다.
한참 뒤, 남자는 여자의 소식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어느 방송국에서 아나운서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 당시에 여자도 남자에게 호감이 있었었다는 말과 함께.
남자는 아직도 까눌레를 즐겨먹지는 않지만, 연남동에 빼곡한 디저트 카페들을 보며, 가끔씩 여자를 떠올린다.
지금도 자신의 일에 열심이고 있을 고마운 그녀에게, 남자는 감사와 축복의 마음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