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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장밥 Apr 28. 2021

국수처럼 말아먹었던 인연

37. 잔치국수

누구나 잘못을 저지른다.


각자가 저지르는 잘못의 양과 질은 다를 것이지만, 우리는 타인의 잘못을 완벽히 알 수 없다. 그래서 우리 자신의 잘못이 얼마나 많고 얼마나 큰지 남과 견주어볼 수 없다. 상대적인 정도를 측정할 수 없는 것이다.


다만 스스로를 돌이켜 생각컨대, 그 크기는 차치하고서라도 빈도는 적지 않은 것 같다. 아침에 일어나 샤워를 할 때, 점심을 먹고 사무실 복도를 걸을 때, 퇴근 후 집안일을 하고 자리에 누울 때. 과거의 잘못들은 시시때때로 불쑥 튀어나와 낯을 뜨겁게 달군다. 그 잘못들 중 일부는 먼 과거의 일이지만, 또한 일부는 가까운 과거의 일이다.


그렇게 많은 잘못을 하고서도, 다시 또 잘못을 저지른다니. 이 역시 낯 부끄러운 일이다.



대학교 3학년 쯤인 것 같다. 지금과 같이, 당시에도 불쑥 불쑥 튀어오르는 잘못의 기억 탓에 하루에도 몇 번씩 스스로가 창피했다.


그러다 문득 든 생각. 이렇게 수많은 잘못 중에서, 나는 무엇을 반성했는가. 사람에게 저지른 잘못에 대해, 사과를 하고 용서를 구한 일이 있던가.


잘못노트는 그래서 만들어졌다.


하나의 페이지에는 하나의 잘못이 적힌다. 사람에 대한 잘못이다. 어떤 잘못을 누구에게 언제 했는지를 기록한다. 이 잘못으로 인해 무엇을 누구에게 사과해야 하는지 쓴다. 여기까지, 대강 반 쪽 정도가 채워진다.


잘못노트의 핵심은 나머지 반 쪽이다. 실제로 용서를 구할 상대를 찾아가 사과를 한 뒤, 상대가 사과를 받아주면 그 기록을 나머지 반 쪽에 남기는 것이다. 몇 날 며칠에 어디서 누가 사과를 받아주었다고. 그 당시를 담은 사진 한 장과 함께.



이 이야기는 반성노트의 첫 번째 페이지에 기록된 사람의 이야기다.


대학교 과 후배였다. 경상도 어디가 고향이랬던가. 말투에 살짝 남아있는 아랫동네 억양이 귀여웠다. 완벽하게 서울말을 쓰지 않냐고 물어보는 그 모습이 또 귀여웠다.


여자로 느껴진 적이 없다면 거짓말이다. 예쁘장했고, 착했으니까. 그렇지만 고백을 할 생각은 없었다. 우리는 서로 연인으로서 궁합이 잘 맞는 성격이 아니었고, 친한 선후배로 훨씬 괜찮을 사이였다. 딱 그 정도 관계까지 우리는 케미가 좋았다.


후배는 언니와 같이 둘이 자취를 하고 있더랬다.



게다가 그 사람에게는 이미 좋아하는 남자가 있었다. 그 사람에게는 과 선배였고, 내게는 동기였다.


우스운 건, 그 동기도 그 후배를 좋아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동기는 내게 그 후배를 좋아하고 있노라고 털어놓았고, 후배는 내게 그 선배를 좋아하고 있노라고 털어놓았다.


별로 얄궂지는 않았다. 이미 말했듯이, 그 후배를 이성적으로 크게 좋아하던 건 아니었으니까. 순간순간 여자로 보일 때가 있긴 했으되, 그건 그저 야트막한 호감 정도에 불과했다. 한창 호르몬이 왕성하던 시절이었으니, 호감 가는 사람이 한둘도 아니었다. 우리는 좋은 선후배 사이였다.


누군가에게 선배 취급을 받는다는 건 묘한 일이었다. 끽해야 한두살 차이나는 이들이 나를 따른다. 뭘 모른다며 자꾸 물어보고, 내 얘기를 경청한다. 나보다 훨씬 잘난 사람들인 거 같은데, 내게 존대한다. 중고등학교 때 선후배들과 어울렸던 경험이 없었던 터라, 신기하고 새로운 일이었다.


다짐했다. 좋은 후배들에게 더 좋은 선배가 되어주자고.


그래서였다. 그 사람에게도 좋은 선배가 되고 싶었다.



다짐은 실패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다.


후배. 그리고 그 후배가 좋아하는 동기. 둘은 서로에게 마음이 있었고, 나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선남선녀. 나름 잘 어울리는 커플이었다.


그들을 도와주고 싶었다. 둘 사이에서 슬슬 바람 불어넣기를 몇 번. 서툰 바람짓에도 둘은 서로를 향해 갔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아무 문제 없이 둘이 사귀게 될 거였다. 중매쟁이의 역할은 여기까지였다.


문제는 술이었다.


친구들과 술을 양껏 마시고 취한 날. 군데 군데의 기억이 도려내져버렸을 만큼 많이 마신 날. 하필 술을 마신 곳이 그 후배네 집 근처였다.


술은 술을 불렀다. 이미 취해있었으나, 몸은 술을 더 부어넣으라고 나를 보챘다. 하지만 현실은 파장. 마실대로 마신 이들이 이제 그만 헤어지자고 하는 분위기였다.


불행히. 생각났다, 그 후배가.


친구들과 헤어지고 나서, 후배네 집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전화를 했다. 맥주 한 잔 하자고. 어김없다. 착한 후배는 기꺼이도 나와줬다.


그 뒤로는 흔한 술주정 얘기다. 평소와 달리 수수한 차림으로 나온 후배를 보고 마음이 동했고, 술을 마시던 입으로, 덜컥, 사귀자고 이야기를 해버린 거다. 당연히 후배는 당황했고, 많이 취했냐며, 내일 기억은 할 수 있겠냐며 자리를 급히 정리했다.



여기까지만 해도 수습 가능한 일이었다. 술에 취해서 못 할 소리 했다며 사과를 했어도 됐고, 비겁하지만 기억이 나지 않는 척을 해도 그만이었다. 그렇지만 바로 다음 날. 수습하지도 못 할 만큼 일을 터트리고 만다.


다음 날 아침. 머리 맡에서 울리는 진동 소리에 잠에서 깼다. 어찌어찌 집에는 들어온 모양이었다. 전화를 확인하니 그 후배다. 후배에게서 전화가 걸려온다.


전화를 받았다. 잘 잤느냐는 인사. 어제 기억은 나냐는 물음. 일단 만나서 얘기하자는 제안. 우리는 혜화동 로터리 국수집에서 만났다.


국수집은 2층에 있었다. 덧발라지지 않은 콘크리트 계단을 몇 개 밟고 올라가면, 그리 크지 않은 문이 하나 나온다. 내부 역시 화려하지는 않았다. 회전율을 높이려는 듯 편치 않은 의자들이 얼기 설기 놓여있었고, 한 쪽에는 혼자 온 사람들을 노린 것인지 벽을 마주보는 자리가 몇 개 만들어져 있었다.


메뉴 역시 짙은 맛은 아니었다. 잔치국수. 허여멀건한 국물에 그 보다 더 허연 국수. 듬성듬성한 고명. 간장 앙념을 더하지 않으니 간이 슴슴하니 국물 먹기 딱 좋았다. 전날 술을 잔뜩 먹은 선배를 배려한 후배의 마음씀이었다.


후룩. 국수를 넘기는 나에게 후배가 물어보았다. 어제 그거 장난이었죠? 진심 아니었지? 언제나처럼 친근하게. 이미 어제 일은 다 이해했다는 듯이. 웃는 얼굴로.


수습하지 못 할 일은, 여기서 벌어진다.


"아니? 나 진심이었는데?"


후배의 얼굴에서, 웃음이 빠져나갔다.


변명컨대, 술이 채 깨지 않았던 탓이다. 정신이 말짱했다면, 당연히 거기서 수습을 했겠지만, 아직 어제 마신 술이 머리를 어지럽히고 있던 탓에,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또 일을 저질러버렸다.


좋은 선배가 되어주자고 다짐한 지 불과 한 달 남짓해서 벌린 일이다.



재작년. 아는 형이 결혼을 했다. 공무원이 되고 나서 알게 된 형이다. 같은 학교 출신 공무원 선배라며 소개 받았었다.


결혼식장에는 아는 얼굴들이 많았다. 함께 공무원 시험을 공부했던 사람들이었다. 웨딩홀에서는 결혼한 형을 축하해주었고, 사진까지 다 찍고난 뒤에는 자연스레 우리끼리 모여 근황을 주고 받았다. 피로연장 앞에서 둥글게 서서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때였다.


"저기 혹시... 오빠...?"


우리 무리가 아닌 한 사람이 뒤에서 다가오더니, 나를 툭툭 친다. 그리고는 말을 건넨다.


세상 참 좁다. 좁다고 말하기 민망할 정도로 정말 좁다. 내가 관계를 망쳐버렸던, 바로 그 후배였다.


그 날, 아는 형과 결혼하신 분. 그러니까 형수님이 되신 분은, 알고보니 그 후배네 언니였다. 함께 자취했다는, 그 친언니였다. 후배는 아는 형의 처제였다.


국수집에서, 국수처럼 뚝 끊겨버렸던 인연.

국수 먹는 날에, 국수처럼 다시 이어졌다.


꼭 10년 만이었다.



잘못노트에는 여러 잘못들이 적혔다. 그에 따라 여러 이들의 이름이 적혔다. 잘못한 자들의 이름이 아닌, 잘못을 당한 자들의 이름이다. 내가 반성하고, 내가 사과해야할 사람들의 이름이다.


모든 잘못에 대해서는 반성했으되, 모든 이들에 대해 사과하지는 못 했다. 때로는 타이밍이 안 맞았기 때문이지만, 결국에는 용기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잘못노트의 첫 번째 페이지 역시 그러했다. 차마 당사자에게 연락할 용기가 나지 않았던 탓에, 아주 오랫동안 반 쪽이 비워져 있었다. 미처 완성되지 못했었다.




잘못노트의 첫 장을 마저 채워준 건, 결국 그 후배였다.


다시 이어진 인연. 십 년만에 함께 하는 저녁 자리. 술을 한 잔 기울이며, 드디어 후배에게 사과했다. 술이고 뭐고, 많이 어렸고, 많이 어리석었다고. 좋은 선배가 되어주지 못해 미안했고, 배신감을 안겨주어 미안했다고. 신뢰를 깨트려 미안했다고.


"괜찮아요 오빠~ 다 지난일인데 뭐~"

세상 쿨하게 후배가 말했다. 고마웠다.


"나 그 오빠랑 쫌 사귀다 헤어진 거 알죠? 이럴 바에 그냥 씨씨 하지말고 오빠랑 계속 친하게 지낼걸 하면서 얼마나 후회했다고~"

술잔을 내밀며 후배가 말을 잇는다.


"이렇게 다시 만나서 반가워요 오빠! 진짜 신기하다. 그쵸."


짠-

부딪히는 술잔 소리가 청명하다.



누구나 잘못을 저지른다.


각자가 저지르는 잘못의 양과 질은 다를 것이지만, 스스로를 돌이켜 보건대 결코 드물지 않게 잘못을 저지르는 것 같다.


후배와의 일은 가까스로 마무리 되었다. 다행한 일이고, 감사한 일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 다시 새로운 잘못들을 하는 것 같다. 한동안 잘 해온 것 같은데 말이다.


삶. 이거 정말 하면 할 수록 어렵다. 정말 어렵다.


잘못노트를 다시 꺼내야하나 싶은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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