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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돼지터리언국 총리 Feb 15. 2019

남편이 아내를 이길 수 없는 것에 대한 심각한 고찰

#에세이


    '왜 남자는 여자를 이길 수 없는 것인가'

    최근 나는 부엌을 점령한 점령군이 돼서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손이 느린 와이프는 부엌에 들어가면 3시간이고 4시간이고 나올 줄을 모른다. 

    그렇다고 천신만고 끝에 만들어 낸 음식이 맛있는 모양을 한 것도 아니다. 실제로 생긴 대로 맛도 없다.

    홀벌이를 하는 우리 집에서 와이프의 가사 노동 영역은 상당히 넓은 편인데 체력이 약하고, 손이 느린 와이프에게 전임하다 보니 내가 답답해서 죽을 지경이다.

    이번 설 연휴에 혼자 요리를 해 먹으며 호의호식하고 지내다가 문득 발상의 전환을 한번 해 봤다.

    '손이 빠른 내가 요리를 하면 어떨까'

    조금 힘이 들긴 하지만, 와이프가 부엌에 틀어박혀 보내는 시간 동안 두 아들과 실랑이를 하고, 다른 잡일을 하느니 그냥 손 빠른 내가 요리도 하고, 설거지도 하고 하면 더 효율적인 게 아닌가.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손이 느린 와이프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았던 기억이 사라지고, 오히려 홀가분한 마음이 들었다.

    사실 내가 요리를 안 하는 이유는 군대 때문이다. 나는 군대에서 취사병을 했다.

    남자들은 모두 느끼겠지만, 군대에서 어떤 일을 하든지 그 일은 사회에 나와서 다신 하고 싶지 않다. 

    요리도 마찬가지다.

    먹는 것을 그렇게 좋아하지만, 요리는 정말 하기 싫었다. 트라우마 같은 것이라고 할까.

    결혼생활을 시작하면서는 일도 바빴고, 와이프가 전업주부가 됐으니까 자연스레 부엌에서 멀어졌던 것도 사실이다.

    그래도 썩어도 준치라고, 욕먹고, 맞아 가며 배운 것이라 그런지 간만에 도마 앞에 섰는데 요리 솜씨는 그럴싸했다.

    입맛이야 까다롭기로 치면 한반도에서 둘째가라면 서운하니 간 맞추는 것이며 양념 만드는 것은 의외로 쉽게 고비를 넘겼다. 요리에서 가장 어려운 재료 손질도 군대에서 다뤄본 재료는 웬만큼은 할 줄 알아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았다.

    물론 매일 부엌에 들어가려는 것은 아니고, 집에 일찍 가는 날은 내가 요리를 하기로 했다.

    그렇게 한 일주일이 지났나 와이프가 어제저녁 약속을 마치고 집에 들어가니 할 말이 있다고 했다.    

    와이프 : 오빠. 집에서 요리하니까 내가 좀 미안하네.

    나 : 아냐. 걍 내가 하는 게 편해.

    와이프 : 그래도 밖에서 일도 하고, 집안일도 많고, 좀 미안해서.

    나 : (뭐지? 왜 이래?) 어어. 그그...그래. 너도 좀 도와줘.

    와이프 : 그치? 그래서 나도 전에 오빠가 하던 일을 좀 나눠 하려고.

    나 : (이 거친 생각 꽈~ 불안한 눈빛 꽈~) 뭘 하려고?

    와이프 : 은행 일 번거로우니까 이제 내가 통장 관리할게. 새로 통장도 만들었어.

    나 : ...(이거였냐? 큰 그림?)

    여기까지 대화를 이어오다 보니 논거가 너무 완벽해 반박할 말이 빨리 생각나지 않았다.

    와이프의 논리를 되짚어 보면, 

    '일단 내가 일이 늘었으니 자신이 일을 하나 가져가겠다 → 그중 가장 번거로운 은행 일을 하겠다 → 은행 일을 하려면 통장을 달라'

    뇌가 잔뜩 움크른 비단뱀의 똬리에 걸려든 것마냥 작동하지 않았던 나는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와이프의 최면에 걸려들고 말았다.

    이대론 뭔가 아닌 거 같아서 정신 줄을 부여잡은 뒤 "아냐. 아냐. 걍 내가 할게"라고 겨우 목소리를 뱉어냈지만, 이 아나콘다 같은 여인은 이미 안방으로 사라지고 난 뒤였다.

    뭔가 뒤통수를 제대로 맞은 것 같아 거실에 놓인 애들 공부상에 앉아 가만히 최근 일련의 사건들을 복기해 봤다.

    그러다 문득 소름이 돋았다.

    '어쩌면 저 여자 손이 빠를 수도 있어!'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통장의 주도권을 빼앗기 위해서 여태껏 10년 가까이 연기를 했단 말인가. 그 오랜 세월을 인내하고, 와신상담하면서 때를 기다려 중국 주재원 생활 중에 답답지수를 극대화해서 일을 도모했던 것이구나. 

    나는 피를 토하며 '오호. 하늘이시어 어이하여 이 금진방이를 낳고도, 록수를 낳았단 말인가'하며 가슴을 쳤다.

    그렇다. 남자는 이런 여자들을 도저히 이길 수가 없다.

    결국, 돈 개념이 1도 없는 내 손에서 허구한 날 마이너스로 구멍이 송송 뚫린 월급통장은 오늘 인수인계를 거쳐 와이프의 손으로 넘어갔다.

    나는 이제 용돈 생활자가 됐고, 뭔가 거세를 당한 것처럼 무기력하게 사마천의 심정으로 사무실에서 이글을 쓰고 있다.

    우리 집은 앞으로 많은 생활의 변화를 겪을 것이다.

    나야 워낙 돈을 안 쓰는 편이니 별로 달라질 것이 없겠지만, 아이들은 장난감이 줄 것이며, 외식 횟수도 눈에 띠게 감소할 것이고, 양가 부모님 용돈도 큰 폭으로 삭감될 것이다.

    하지만 교돈삼굴(狡豚三窟·교활한 돼지는 굴이 세 개다)이라 하지 않았던가.

    후후후. 우리의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수당 통장아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단상 #남자가여자를이길수없는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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