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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돼지터리언국 총리 Mar 26. 2019

'개혁개방 40년 같은 작품세계' 김일룡 교수를 만나다

#예술 #중국예술


'中개혁개방 40년 같은 작품세계' 김일룡 중앙미술학원 교수와의 만남


    '조선족, 문화대혁명, 극사실주의, 동서양, 설치미술, 그리고 행정가'


    이 일관성 없는 단어들은 모두 한 사람을 표현한 단어다.
    중국 미술계 최고 명문으로 꼽히는 중앙미술학원 김일룡 교수의 작품세계는 그의 인생 흔적이 그대로 담겨 있고, 더 나아가 중국 개혁개방 40년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김일룡 교수를 처음 만난 것은 우연에 우연이 더해진 저녁 자리에서였다.
    그에 대한 첫인상은 '겸손함' 그 자체였다.
    사람을 판단할 때 가장 경계하는 것이 그 사람의 직위와 직함이지만, 또 처음 만난 사람을 판단할 길이 그 외에는 잘 없는 것도 사실이다.
    김일룡 교수의 태도와 말은 그의 직함과는 정말 어울리지 않았다.
    그가 중국 예술계에서 가지는 무게감과 존재감에 비해 그의 언행은 너무나도 겸손했다.
    가식적인 겸양이 아니라 삶에서 우러나는 그의 말과 행동은 왜 그가 행정가로서도 성공의 길을 걷고 있는지 알기에 충분했다.
    그런 매력에 끌려서였을까 정말 만난 지 며칠 되지 않은 때에 그를 찾아가기로 결심했다.
    그를 만나기에 앞서 그가 관장하는 중앙미술학원 미술관에 들렀다. 이곳의 전시는 공복도 잊게 할 만큼 멋지고, 황홀하기까지 했다.
    전시를 보고 나니 이곳을 관리하는 그가 더 만나보고 싶었다.


    이미 전시를 보기 전부터 한국에서 온 막내 기자에 불과한 나를 미술관 앞까지 나와 맞아주고, 친절히 설명까지 해준 그의 호의에 몸 둘 바를 몰랐지만, 이 기회가 아니면 언제 그의 사무실을 가보겠나 싶어 염치 불고하고 무작정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그의 사무실에서 건네받은 지난해 개인전 도록은 나를 또 한번 탄복시켰다.
    조선족 출신인 그가 그린 한국적 정서가 가득 담긴 초기 작품들은 한국에서 온 나의 눈을 바로 사로잡았다.
    흰 저고리와 검은 치마를 두르고 광주리를 이고 가는 여인들의 모습, 뒷짐 지고 달을 바라보는 노부부, 보름달 아래 강강술래를 하는 여인네들. 막 대학을 졸업한 뒤 초년 작가가 그렸다고 보기에는 심오한 깊이가 느껴졌다.


    인사나 할까 해서 찾아갔지만, 그의 목소리로 작품과 예술 세계를 듣고 싶었던 나는 바로 휴대전화의 녹음 버튼을 누르고 인터뷰를 시작했다.
    물론 우리 회사 기사로는 나갈 수 없지만, 내가 가진 공간에는 꼭 그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싶었다.



    Q. 초기 작품과 중기, 그리고 현재의 작품이 매우 다르다. 정확히 전공이 무엇인가.
    - 내 전공은 유화다. 서양화라고 할 수 있다. 내가 대학에 입학해 처음 들어간 1화실은 프랑스 사실주의 그림을 그리는 곳이었다. 나의 스승이신 진샹이(靳尚谊) 선생은 중앙미술학원 원장을 지내셨고, 그의 스승 우줘런(1908-1997) 선생은 중국 사실주의 화가의 1세대시다.

    Q. 중앙미술학원 1화실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 우리 학교에는 5개의 화실이 있다. 1화실은 사실주의, 2화실은 중국식 유화(혁명화라고도 한다), 3화실은 러시아 유학파, 4화실은 개성파, 5화실은 완전한 추상화를 주로 작업하는 화실이다.
    

석정스님의 초상화(오른쪽)


    Q.서양화를 전공했다고 하는데 초기 작품부터 서양화와는 결이 다른 느낌이 든다.
    - 처음에는 사실주의 그림을 그렸었다. 한국 석정 스님의 초상화도 내가 그렸다. 작품세계가 바뀐 것은 유학길이 막히면서였다. 서양화를 전공했지만, 대학교 2학년 때까지 내 눈으로 서양화를 본 적이 없었다. 렘브란트 등 유명 화가의 작품은 교수님들이 자료로 보여준 게 다였다.
    - 당시만 해도 해외에 나가는 것은 무척 어려웠다. 나 같은 경우도 이민 성향이 강하다는 이유로 번번이 유학 신청이 거부됐다. 그래서 동양 쪽으로 진로를 바꿨다. 그러면서 주목한 것이 둔황석굴의 불화였다. 초기 작품에 한민족의 생활상을 그린 것은 둔황석굴의 화풍을 따라 선을 따고, 내 전공과 달리 사실주의가 아닌 개념화한 그림이었다. 불화에서처럼 후광을 등장시키고, 색 역시 석굴의 벽화처럼 약간 바랜 느낌으로 칠했다. 이게 주목을 받게 됐다.

     Q. 1986년 작품들이 교내 학술지는 물론 중국 유명 미술 잡지 등에 실렸는데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 일단 이색적인 느낌이 있었을 테고, 화풍이 독특한 것이 원인이지 않았을까 싶다. 내 전공이 서양화지만 진로를 틀면서 동양적 요소가 많이 담긴 그림을 당시에 그렸다. 그게 당시 그림들이 주목 받은 이유 같다.


     Q. 작품에 노부부가 자주 등장한다.

     - 사실 어려서 할머니 할아버지 손에 자랐다. 문화대혁명 시기에 부모님이 모두 붙잡히셔서 고초를 당하셨다. 나중에 복권이 됐지만, 요양차 상하이에 머무르셨고 조부모님이 계속해서 나를 돌보셨다.

     - 한국과 수교가 된 뒤 한국에서 내 그림으로 달력을 만들자고 찾아온 적이 있다. 그때 그림을 수정해 달라는 요청이 있었는데 나는 그럴 수 없었다. 웃지 않는 표정이 당시 우리 가족을 비롯한 조선족의 삶이고, 내가 느낀 그들의 인생이었다.


     Q. 중기로 넘어오면서 약간 추상적인 느낌으로 그림이 단순화했다.
    - 추상화라는 표현을 싫어한다. 이건 추상화한 것이 아니라 내가 마음속으로 대상을 떠올려 구상한 뒤 단순화해서 표현한 것이다. 어떻게 보면 추상화처럼 보일 수 있지만, 다른 개념이다.
    - 이런 화풍은 불교의 수행과도 같다고 생각하면 된다. 사실 대상을 보고 그리는 것과 내가 온전히 이해해서 표현하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솔직히 말하면 후자가 훨씬 화가로서 어렵다.


    Q.도록에 보면 갑자기 설치미술이 등장한다. 이건 또 어떻게 된 연유인가.
    - 설치미술을 시작하게 된 건 한국의 유명 예술가인 백남준 작가를 만나게 된 것이 계기가 됐다. 그를 1997, 1998년 쯤 호암미술관에서 만났는데 구두를 꺾어 신고 자리에 나왔다. 말 그대로 파격 그 자체였고, 이게 예술이구나 싶었다. 그래서 평면을 놓고 설치미술을 시작했다.
    - 회화란 것이 사실 당시의 재료를 활용하는 것 아닌가. 나는 비전이 현대의 재료라고 생각했고, 이를 활용한 작품을 만들었다. 한동안 이와 같은 작품 활동을 이어 갔다.


    Q.그런데 최근 작품을 보면 다시 평면으로 돌아왔다.
    - 나는 작가이자 현재는 학교의 일을 맡아하는 행정가다. 학교 전체의 인사 부문을 맡고 있다. 행정 일을 시작하면서 작품 활동을 이전과 같이 할 수 없게 됐다. 그래도 사무실에 카메라를 설치하고 사무실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기록했다. 작가는 작품을 손에서 놓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 이런 절충책을 고안해 냈다.
    - 그러나 생각만큼 양쪽의 일을 병행하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사무실 건물 맨 위층에 작업실을 마련하고 다시 1990년대 중반의 작품 스타일로 돌아가 평면에 작업하기 시작했다.


    Q. 요즘의 작품 주제는 무엇인가.
    - 동양과 서양의 비교. 그리고 단순화. 이런 점에 주안점을 두고 활동하고 있다. 당연히 학교 일도 병행하면서 하고 있다. 사무실에 올 때 엘리베이터 앞 바닥에 놓인 작품이 지금 내가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틈틈이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원래 작업실이 있지만, 학교 일이 바쁘기 때문에 왔다 갔다 할 시간이 없어 고안해 낸 방법이다.
    -이 건물 맨 위층 복도에도 내가 작업하는 작업실이 있다. 최근 작품은 대부분 이곳에서 그리고 있다. 아까도 말했지만, 작가가 손을 놓아서는 안 된다. 그러면 금방 망가질 수 있다.
 

'동'이란 작품. 색감과 하향하는 폭포의 이미지로 동양을 표현했다.
'서'라는 작품. 색감과 상승하는 이미지로 서양을 표현했다.
중앙미술학원 1호관 맨 위층에 마련된 김일룡 교수 작업실.


    Q. 도록에 보면 중앙미술학원 원장인 판디안(范迪安) 선생이 당신의 작품세계를 중국 개혁개방 40년과 비교했다. 왜 그런 표현을 사용한 것 같나.
    - 글쎄. 내가 조금 파격을 주고 앞서가는 경향이 있었던 것도 있고, 내 작품세계가 지나온 흔적을 보면 마치 중국의 개혁개방과 같기도 하다. 나는 처음엔 사실주의 그림을 그렸고, 뒤에는 동양의 정서가 느껴지는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관념적인 그림으로 넘어왔다. 이후에는 한발 빨리 설치미술을 시도했고, 최근에는 다시 관념적인 그림을 그리고 있다. 나의 예술 여정이 역동성있게 변화해 온 중국의 개혁개방과 닮았다고 판디안 원장은 생각한 것 같다.


    Q. 앞으로 계획이 있다면 소개해 달라.
    - 올해 중국 선전(深천<土+川>)에 중국에서 가장 큰 미술관이 완공된다. 거기에 초대 작가로 초청을 받아 작품을 그리고 있다. 아마도 최근에 주제로 삼은 동양과 서양에 관한 작품을 내놓을 것 같다. 동서양의 차이를 색감과 방향성으로 표현하는 것이 특징인데 이 주제를 계속 발전시켜 나갈 계획이다.



    인터뷰하는 동안에도 그의 사무실에는 용무를 보러 오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다. 그래도 그는 대단히 고요하고 차분하게 사람들을 맞았다. 그때마다 나에게도 공손히 양해를 구했다. 그의 행동과 말은 고요한 호수와 같았다. 하지만 그 안에는 강한 뚝심과 예술가로서의 감성이 묵직하게 느껴졌다.
    그의 작품이 왜 중국 예술계에서 환영받는지 그가 어떤 자세로 작품을 그리는지 그의 행동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중앙미술학원 1호관 옥상. 김일룡 교수의 작업실에서 문 하나만 열면 만날 수 있는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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