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민중이야기-(3) 청년회의 활동과 배경 20230209목
(3) 청년회의 활동과 사회배경
솔뫼학교의 출발은 1990년대 초반 제천 민중사랑 청년모임 ‘처음처럼’(이하 제민청, 초대회장 박성원)의 활동과 관련이 있다. 제민청은 1992년 12월, 지역 대중을 위한 의식화 사업을 목적으로 결성되었다. 처음 결성은 초대 회장을 맡은 박성원을 중심으로 지역문제에 관심을 가진 20대 초중반 청년들이 뜻을 모으며 시작되었다. 이들은 직장인, 대학생, 고등학생 동아리 등 젊은 청년들이 참여했으나 이후 제천 농민회 등 다양한 분야의 일반인들까지 청년 모임에 관심을 보였다.
제민청의 민중운동은 글 모르는 성인들에게 필요한 문해교육이 아니라 노동운동, 농민운동, 민주 통일운동에 대한 행동강령을 기반으로 기존 기득권 세력에 저항하는 강한 정치색을 띤 시민운동이었다. 1990년대 초반 충청북도의 3개 시에서는 청주시 ‘일하는 사람들’, 충주시 ‘충주민중사랑 청년회’, 제천시 ‘제천민중사랑 청년회’가 같은 시기에 활동을 시작하였다.
요즘 신 사회운동, 시민운동, 또는 전문인 운동 등으로 표현하며 정치화의 주요 세력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시민운동 세력이 수혈 세력이 될 수 있지만, 민중운동의 자기 모습을 시민운동의 간판으로 대치시킬 수는 없다(김봉태, 1997).
제민청의 결성과 활동 배경에는 우리나라 민주화 운동의 영향이 있다. 민주화 운동은 ‘독재정권과 권위주의적인 사회구조에 맞서 민주주의를 구현하기 위해 전개한 정치·사회적인 집단활동’으로 정의된다. 우리나라의 민주화 운동에 대한 해석과 규정은 다음과 같다.
첫째, 민주화 운동을 헌법과 국가 중심으로 규정하는 방식이다.
민주화 운동의 법률은 “박정희 정권이 3선 개헌 발의(1969.8.7.) 이후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를 문란케 하고 헌법에 보장된 국민 기본권을 침해한 권위주의적 통치에 항거하여 민주 헌정질서 확립에 기여하고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회복·신장시킨 활동”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는 민주화 운동에 대한 제한적 견해이다.
둘째, 민주화 운동을 형식적 민주주의와 자유민주주의를 중심으로 규정하는 방식이다.
이에 따르면 한국의 민주화 운동은 공정한 선거, 의회에 대한 국가기구의 책임성, 그리고 개인의 권리보호와 자유라는 형식적 민주주의를 침해한 권위주의적 통치에 항거한 활동 및 자유민주주의에 의해 침식된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활동으로, 이승만 정권의 독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1950년대 후반 이후부터 전개되기 시작했다. 이 규정이 가장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견해이다.
셋째, 민주주의를 모든 억압, 착취, 차별과 배제에 반대하는 사회나 상태로 규정하고, 이에 따라 민주화 운동을 규정하는 방식이다. 즉 한국의 민주화 운동은 한국 사회의 모든 억압, 착취, 차별, 배제에 저항한 운동이다. 정치적 영역뿐만 아니라, 경제적·사회적 그리고 일상적 영역에 존재하는 모든 모순에 저항하고 이를 바로잡기 위한 활동으로 민주화 운동을 규정한다면, 작업장에서의 권리 확보를 위한 노동자들의 저항, 남성 중심의 호주제에 대한 여성들의 저항, 장발 단속이나 교복 제도에 반발한 학생들의 저항 등 한국 현대사 전체에 걸친 다양한 영역에서 민주화 운동이 진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렇듯 민주화 운동 정의는 민주주의를 정의하는 것만큼 어려우며 사회운동의 어디까지를 민주화 운동으로 볼 것 인지 다양한 연구가 필요하다(오제연, 역사 용어사전).
우리나라 민주화 운동은 여전히 다양한 해석과 재정립이 필요하다.
1990년대 제민청의 출발과 활동은 지역사회발전과 시민의식 개선을 위한 자발적 활동이었다. 초기 제민청의 활동은 자발적 참여의 ‘필요’와 주체적 활동을 위한 ‘학습’으로 이루어졌다.
청년들의 지속적 참여를 위한 정기학습 내용은 마르크스 레닌주의(Marx-Lenin主義)와 우리나라 운동사였다. 당시 지역사회 운동의 흐름을 레닌, 마르크스, 동학농민운동으로 이해했다. 레닌에 의해 계승되어 발전한 마르크스주의와 동학농민운동으로 시작하여 독립운동으로 이어진 우리나라 운동사에 대한 이해로 이어졌다.
이런 학습 내용이 자연스럽게 채택된 이유는 우리 사회의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해방이 후 남북 간의 전쟁, 사회 전반에 팽배한 갈등과 유신체제는 10·26 사건으로 막을 내린다. 1980년대 ‘광주사태’는 새로운 무력 정권을 탄생시키고 민주주의 탄압, 노동조합과 노동운동의 탄압, 시민운동의 탄압 결과로 1987년 6월 항쟁이 발생한다. 이때의 민중의 요구는 대통령 직선제, 정치인 복권, 언론, 소집, 집회, 학원의 자유화였다.
민주화 운동의 결과는 6.29 선언 이후 김영삼의 문민정부 출범과 함께 활동이 시작되었다.
그 당시 민주화를 부르짖던 세력들은 1993년 문민 시대가 들어서자 자신이 속한 지역사회로 방향을 바꾼다. 이때 등장한 것이 바로 청년단체들이다. 당시 진보민중 청년연합의 지역 구성을 보면 안양 민주화운동 청년회, 인천 새날청년회, 서울 진보 청년회, 중부지역 민주청년회, 부천 민주청년회, 대구 진보 청년회, 사회민주주의 청년연맹 등이다. 이 단체들은 문민시대가 끝난 1997년 이후까지도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하지만 충북지역(청주, 충주, 제천)에서 활동한 청년회는 청주 일하는 사람들을 제외하고 활동을 중단하였다. 지역사회발전을 위한 참여와 필요, 학습을 통해 활동의 근거를 마련했던 청년회는 아이러니하게도 1993년 문민 시대와 함께 출발하여 1997년 정권 말기에 불어 닥친 IMF와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제민청이 지역활동을 하며 중점을 둔 것은 농민운동, 노동운동, 한글교실, 소년 소녀 가장 돕기 등이었다. 제천청년회의 해체는 모든 활동의 중단을 의미한다. 부설로 운영되던 한글학교(문해교육)도 예외가 없었다. 성인문해 학습자들은 어떻게든 배움이 필요하였고 공간이 사라지는 것에 대한 불안과 대안이 시급하였다. 이것은 청년회 부설 한글학교가 아닌 독립된 문해교육전담기관이 탄생해야 하는 명백한 이유가 되었다.
=다음 이어질 이야기는 '솔뫼학교의 태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