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뫼학교의 활동 의미(4)

민중이야기-(4) 솔뫼학교의 태동

by 솔뫼 김종천

(4) 솔뫼학교의 태동


제천청년회의 활동 목적은 민중운동이었고 목표는 지역사회의 변화였다. 초기 활동은 지역변화에 중점을 두었지만 별다른 성과 없이 청년회를 지역에 알리는 정도였다. 청년회에 대한 시민들의 반응은 냉랭하였다. 그것은 사회불안정을 조장한 ‘시위, 데모’ 등의 선입관(先入觀)을 가지고 보기 때문이다.

청년회는 지역안착을 위해 새로운 대안이 필요했다. 시민들과 심리적 거리를 좁히고 친숙해져 관심과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선택한 것은 ‘시민참여’ 분과사업이다. 이 사업의 주된 활동은 소년. 소녀 가장 돕기와 성인들을 위한 한글학교를 개설하는 것이다.

분과 회의에서 한글교실 개설을 결정한 것은 당시(1990년) 제천지역에 한글을 모르는 성인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배경으로 제천 남부지역 영천동에 25평의 공간을 임대하여 강의장 3개를 만들고 한글학교를 개설(1993.9.13)하였다.


청년회가 처음부터 문해교육에 뜻을 두고 시작한 것은 아니지만 한글학교 장소 마련을 위한 노력은 적극적이었다. 그 당시 25평 건물 임대에 필요한 전세금은 800만 원이었다. 20대 초반 청년회원 8명이 은행 대출을 받아 장소가 마련되었다. 장소 마련의 주목적이 청년회 운영이었다 하더라도 한글학교가 개설된 것은 많은 의미가 있다. 처음 학교를 열고 학생모집을 위한 홍보는 길거리 전봇대, 또는 아는 지인의 점포 벽면에 모집공고를 붙이고 입소문을 냈다. 한 달간의 준비과정을 거친 첫 입학식에 40여 명의 성인 학습자가 참여했다. 청년회원들은 입학식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보이자 지역 활동을 희망 적으로 내다보기 시작했다. 한글교실의 참여자는 40~50대의 중년 여성들이 대부분이었고 가끔 10대의 남학생들도 있었다. 이들에게 제공된 교육내용은 문자 해득을 위한 기초 국어와 기초산수 과목이었다.

사람들은 누구나 지적 허기를 채우려는 욕구가 있다. 한글학교를 찾은 비문해 성인들은 역사적 배경과 개인적 환경에 의해 배움의 기회를 박탈당한 사람들이고 교육적 혜택을 받은 사람들은 그 욕구를 충족한 사람들이다. 배운 사람들은 지식적 안내와 지도를 통해 여러 분야의 중심에서 자기 뜻을 펼치며 살아온 반면 비문해 성인들은 세상의 가장자리에서 주눅 든 삶을 살아왔다고 볼 수 있다.


청년회 부설로 개설된 한글학교의 초기 운영은 비조직적, 비체계적이었다. 교육의 철학과 원칙, 방향성이나 기준을 깊이 고민하고 출발한 것이 아니어서 글자 깨침, 한풀이 수준의 접근이 전부였다. 참여 학습자들은 청년회가 있는 인근 주민들이 대부분이었고 이들에게 수업을 가르치는 교사들은 전부 청년회원들이 맡았다. 학교조직체계는 청년회 회장이 당연직 교장을 맡아 청년회 임원과 학교 교사의 역할을 병행하였다. 이후 시민참여 분과장이 교장을 맡아 청년회에 한글학교 활동을 보고하였는데 학생들을 위한 학교운영보다 청년회 활성화를 위한 분과(조직운영, 교육정책, 시민참여, 홍보재정 등으로 나누어 활동함) 활동의 일부였다.


야간수업을 하려고 학교에 갔다. 그러나 교실로 들어설 수가 없다. 청년회원들이 며칠 후 진행될 행사(농민집회) 준비를 위해 교실로 들어가는 입구를 막고 대자보를 만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부하러 온 학생들도 수업을 못 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이것이 문해학습자를 위한 교육 현장이 맞나? 수업을 못 하게 되면 사전에 교사 회의에서 안내와 협의를 거쳐야 순서 아닌가? 순간 화가 났다. 진짜 학습자의 편에서는 교육 실천이 필요하다. (회상 기록, 1995.5)


당시 1993년도 제천지역에 청년회가 운영하는 한글학교 외에 중·고등 과정을 가르치는 정진야학이 있었다. 정진야학은 1985년에 제천 단양지역 한국방송통신대학교 학생회에 의해 개설된 곳으로 청소년과 성인들의 검정고시를 통한 학력 보완을 목적으로 야간에만 운영되었다. 한글을 모르거나 초등 졸업장이 없는 사람들은 참여 대상이 아니었다.


청년회 부설로 출발한 한글학교는 2년 뒤 명칭을 시민학교로 바꾸었다.

이름은 바뀌었지만 학교 운영은 여전히 청년회 활동이 우선이었다. 뜻을 가진 교사들이 학습자 중심의 운영을 요구했지만 쉽게 반영되지 않았다. 이런 문제의식은 학습자들을 위한 수업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주장과 청년회 중심의 운영을 벗어나면 안 된다는 주장이 대립하였다. 이러한 갈등 해결은 공교롭게도 다른 곳에서 시작되었다.


문민정부의 마지막 해인 1997년 1월 한보 기업의 부도는 IMF(International Monetary Fund) 금융 사태로 이어졌다. 이것은 아직 청년회원들이 경제적으로 독립하거나 사회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상태로 청년회 활동에 걸림돌이 되었다. 여러 번의 긴급회의를 거쳐 결국 청년회는 5년 만에 해체를 결정한다.

우리나라가 IMF 금융위기로 인한 대량 실업이 예고된 상태에서 청년회는 조직을 해체하며 학교의 전세금을 회수해 갔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학교를 맡아 운영할 것인가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었다. 누군가의 용기 있는 선택과 결정이 없으면 학교는 역사 속으로 사라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청년회 해체는 한글학교의 종료를 의미한다. 국가와 학교의 어수선한 분위기는 학생들을 떠나가게 했지만 몇몇 남은 학생들은 수업 지속을 희망했다. 청년회원 중에서도 학교 운영에 애정을 가진 회원들은 학교 해체를 반대하였다. 당시 교사는 두 그룹이었다. 청년회에 뜻을 두고 참여한 교사(박성원, 윤태란, 지영해, 김명옥, 임효숙 등)와 성인교육에 관심을 가지고 참여한 교사(심민경, 송미희, 진영자, 김영미, 황보미, 함은경, 김종천 등)들이다. 1998년 1월 김종천을 중심으로 학교가 새롭게 출발하였다. (일상 기록, 1998)


새롭게 출발한 학교는 명칭(제천솔뫼 야간학교, 이후 '솔뫼학교'로 바꿈)을 변경하고 IMF 사태를 고려한 운영으로 방향을 잡았다. 가장 급선무는 청년회 해체로 인한 학교 건물 보증금 회수에 대한 자금 마련이었다.

전세금 마련 방법은 다양하다. 중요한 것은 새롭게 출발하는 구성원의 단합된 힘이다. 새로 시작한 학교 홍보와 운영 기금 마련을 위한 활동으로 일일주점을 열기로 했다. 1998년부터 시작한 기금마련행사는 여러 해 이어졌다. 장소는 주로 시내에 있는 호프집(파루, 풍차, 겨울 안개 등)을 빌려 진행했다. 대부분 학교 운영 취지를 알고 있어 무료 또는 저가에 장소를 대여해 주었다.(일상 기록, 2001)

IMF 외환위기는 솔뫼학교의 입장에서 양날을 가진 칼과 같았다. 청년회 해체 이후 학교를 독립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기회가 되는 동시에 IMF라는 경제위기는 교사나 학생들의 문해교육 참여를 주저하게 만드는 이유가 되었다. 문해교육에 대한 거대 담론과 함께 문해의 현황, 학습자 실태, 기관 운영, 국가의 관심 등의 현실적인 정보와 다른 문해기관들과 연대를 통한 조직력이 필요하였다. 우리나라는 2000년대까지 문해교육에 대한 전문성과 조직력을 갖춘 민간협의단체가 없었다. 장기적인 운영을 위한 문해 단체들의 연합이 시급해졌다.


= 다음이어질 내용은 (5) 민간협의체 '전문협의 발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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