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가을밤, 스무 살의 그녀와 만나다.

고마워요, 엄마

by 베로

중학교 때부터 반 1등을 거의 놓친 적이 없었고, 전교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등수에 들었었다. 그땐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잘하는 것이, 공부하는 학생으로서의 도리이자, 부모님께 할 수 있는 최선의 효도라 생각했다.


엄마는 항상 말했다.


"얘는 밥만 배불리 먹이면, 알아서 잘해."


실제로 그랬다. 엄마는 한 번도 나에게 '공부해라.' 소리를 한 적이 없었다. 수학학원이며 과학학원이며 인기 있는 수업과 선생님이 있는 곳, 하지만 저렴한 수강료인 곳을 찾아내어 엄마에게 알려주었었다. 한때 유행했던, 들으면 머리가 좋아진다는 모차르트 CD도 내가 먼저 사달라 하였다. 엄마가 적당히 하고 자라고 할 정도로 나는 공부에 몰두했었다. 가끔은 나의 학업에 관심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는 엄마의 태도가 서운할 때도 있었다.


마치 수능을 치르듯 새벽까지 공부를 하여 들어갔던 비평준화 지역의 고등학교에서도 우여곡절 끝에, 나는 우리나라에서 둘째라면 서러워할 흔히 말하는 명문대에 입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하고 싶었고 선망했던 일을 하기 위한 전공도 갖게 되었다.




2학년 때부터는 실습이 이루어졌다. 새벽 6시까지 실습지에 가야 했었고, 어떤 날은 늦은 밤에 실습이 끝나기도 하였다. 집과 학교가 1시간 20분 거리에 있었지만, 일주일에 삼일 이상을 실습을 해야 했던 시기에는, 집에서의 통학이 무척 힘들었었다. 다른 과에 비하여 기숙사의 자리가 여유로웠던 덕에 나는 운 좋게도 실습을 시작할 무렵부터 기숙사 생활을 시작했다. (사실 실습 외에도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이미 한 개도 아닌 세 개의 동아리에 열의를 다해 몸과 마음을 바치고 있던 나에게는 꼭 필요한 선택이었다.)


대신 금요일 수업이 끝나면 5일 사이에 그리워진 집으로 돌아갔다. 못다 한 빨래까지 들쳐 메고 말이다. 그리고 주말 내내, 엄마가 해주는 밥을 먹으며 놀고 자고 공부하고 일요일 저녁에는 기다렸던 성당 청년회 활동을 하였다. 그리고 일요일 밤 10시가 넘으면, 피곤하다는 이유로 엄마가 차를 이끌고 학교 기숙사까지 바래다주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대학 한번 갔다고 그렇게 엄마를 부려먹으며 그런 호사를 누렸나 싶다.


어김없이 그날도, 나는 조수석에 앉아 엄마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편하게 늘어진 채 학교로 향했다.


늦은 일요일 밤이어서 그랬는지, 학교 앞 널찍한 6차선 도로는 가로등 불빛만 반짝인 채 참 조용했다. 그리고 예뻤다.


캠퍼스 안으로 들어가면, 정문에서부터 널따랗게 펼쳐진 웅장하면서도 고풍스러운 담쟁이 덩굴의 학교 건물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가을이 되면 노란 은행나무들이 캠퍼스 주변을 에워싼다. 꼭 가을이 아니어도, 캠퍼스의 밤길을 올라갈 때마다 창문을 내리고 냄새를 맡아보면, 참으로 싱그럽고 짙은 무르익은 냄새가 난다. 시원한 바람까지 곁들여질 때면, 두 눈을 감았다 떴다 하며 기숙사에 도착할 때까지 그 바람의 감촉과 소리를 즐기며 갔다. 이 곳에서 공부를 한다는 것이, 이 학교에 재학 중인 학생이라는 것이 참 감사하고 기뻤고 뿌듯했다.


창 틀에 기대어 나의 감정에, 바람에 취해 갈 때쯤, 갑자기 엄마가 입을 열었다.



"엄마가, 네 덕에 **대학교에도 와 보는구나.

이렇게 내 집 드나들듯 왔다 갔다 할 수 있다니.

엄마가 고맙네."



갑자기 가슴속이 무엇인가로 가득 차올랐다. 그리고 그것이 목젖까지 올라와 목을 메이게 했다. 코끝이 시큰거리며 눈 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뿌옇게 흐려진 캠퍼스 길 위로 한 소녀가 걸어간다. 가지런한 단발머리에, 찰랑거리는 살구색 치마를 입고 품 안에는 호밀밭의 파수꾼(엄마가 좋아했다는 고전이다)을 안고선 두 눈을 지그시 감아본다. 그 가을밤의 바람을 흠뻑 맞아보려는 듯 얼굴을 들어 올리며 미소를 짓는다.





우리 엄마도 참 공부를 잘했다.

대부분의 우리네 부모님들이 그러했듯이, 엄마는 가난한 집안 사정 때문에 외삼촌들에게 대학교에 갈 수 있는 기회를 양보했다. 그 기회를 만들기 위해, 엄마는 당시 우리나라에서 최고로 여기는 여상(여자상업고등학교)에 들어갔고, 졸업하기도 전에 은행에 취직을 하였다.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대학에 들어갈 것을 권유받기도 했지만, 엄마에게는 엄마의 꿈보다 더 절실히 필요한 것들이 있었다. 엄마가 원하든지, 원하지 않았든지 말이다.


중학교 때까지, 수학과 영어 문법을 공부하며 모르는 것이 있을 땐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는 내가 알기 쉽게 설명을 해주었다. 그땐 엄마라면 당연히 다 아는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런데 이제 와서 보니, 모든 엄마들이 그 모든 걸 알려줄 수는 없었다는 걸 알았다.


엄마는 공부를 잘했다. 그리고 어쩌면 일이 아닌 '공부'를 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으로, 내가 공부를 하는 것이 미안했다.

엄마 아빠의 좋은 딸이 되고자 공부해왔던 내게 (사실은 나를 위함이었다), 그 날의 엄마의 말 한마디는 엄청난 반전이었다. 이제껏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말이었다.


이 곳에서 공부를 하게 된 것이 미안했다.


하지만 이후 졸업을 하고, 직장을 다니고, 결혼을 하고, 나와 같은 딸을 낳고 보니 알게 되었다.


내가 아니어도, 나의 딸이 공부를 하면 좋겠다.

그게 공부가 아니어도 좋다. 내 아이가 좋아하고 하고 싶었던 일, 그게 공부이든지,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일 이든지. 아니 모든 걸 떠나서 그 아이가 좋아하는 것을 할 수 있게 된다면 좋겠다. 그리고 내가 그 길에서 도움이 되길 바란다. 그 길을 막지 않고, 보이지 않던 길까지 보여 줄 수 있는 엄마가 되어 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한 삶이 될 것 같았다.





그 가을 늦은 밤, 부러움 섞인 엄마의 말 한마디는, 이제 와서 보니 내가 알고 있던 그 부러움이 아니었다. 한 때는 가족들을 위해 포기도 해야 했었고, 소중했던 삶의 한 조각을 자식들에게 바쳤던 애씀에 대한 보답, 기쁨이었다. 자식을 향한 엄마의 헌신과 사랑이 절대 헛된 것이 아니었음을, 그때의 엄마가 보여주었던 나에 대한 믿음과 주어졌던 자유가, 지금의 건강한 나로 성장할 수 있게 했음을.


엄마, 그래도.

나 혼자 공부하게 돼서, 이 곳에서 공부를 하게 된 것이 미안했었어요.

그리고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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