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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로 Apr 16. 2020

남편의 금일봉

일명 '면도기 사건'

지난 연말, 남편이 업무평가에서 좋은 결과를 거두었다. 항상 자신의 이야기보다 다른 사람의 말을 더 경청하고, 윗사람 아랫사람 가릴것 없이 배려하고 들어주는 사람이였다. 그래서 매번 자기 것을 잘 취하고 있는지가 걱정될 때가 많았었는데, 내 걱정은 기우였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 부부에게 또 다른 중요한 전환점이 된 일명 '면도기 사건'의 발단이 되었다.




코로나19가 발생한 이후, 남편은 잠시 며칠동안은 재택근무를 하기도 했으나, 곧 새로운 콘텐츠를 기획하게 되어 3주가량 거의 매일 야근을 하게 되었다. 퇴근 시간은 새벽 두세시가 기본인 날이 많았다. 남편도 좋아하는 동료들과 마음을 다해 열심히 준비하는 듯 했지만, 계속 되는 새벽 퇴근은 남편에게도 무척 힘든 일이였다.


나 또한 어쩔 수 없이 어린이집에 등원하지 않는 지용, 지안을 아침부터 잠들때까지 돌보며 하루종일 독박육아를 해야했다. 매일은 아니였지만, 일주일에 겨우 이틀 출근하던 일도 잠시 쉬어야만 했고, 이후 출근하지 않고 집에서 아이들과 매일 똑같은 일상을 반복하는게 쉽지만은 않았다. 남편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질 때도 있었지만, 곧 이 생활도 자연스레 적응이 되어가기 시작했다.


그 무렵, 남편의 업무평가 결과 인센티브가 들어왔다. 힘든 시기였기에 더욱 반갑고 뿌듯하였으며, 고생한 남편에게 무한 칭찬을 보내며 격려했다. 그리고 모처럼 생긴 여유에, 맛있는 식사를 하고, 아이들 옷을 사고, 남편이 예전부터 갖고 싶다 했던 면도기도 샀다. 그런데 그 면도기가 꽤 비싸다는 것이였다. 하지만 리미티드라는 둥, 따뜻하게 면도를 할 수 있도록 히팅시스템이 있다는 둥 하길래, '한번쯤은 누려보고 싶은 사치, 남자들의 로망'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흔쾌히 알겠다고 하였다.


더군다나 작년 한 해, 그리고 지금 이 엄청난 업무량도 성실히 잘 해내오고 있는 사람이 아니던가, 내가 사라마라 할 처지는 아니라고 생각이 들었다. 남편이 결제버튼을 누르며 말했다. 같이 고생한 동료들에게도 선물을 하고 싶다는 거다. 난 비싸봤자겠지 하며 대충 듣고 넘기며 알겠다고 했다.  


그런데 며칠 후, 함께 카드비를 훑어보던 중 뜻밖의 목돈이 출금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남편은 내게 무얼 샀던 건지 기억해보라고 했으나, 난 도통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알고 보니 남편의 그 면도기 값이였다. 근데 그 금액이 내가 상상하던 그 조그만 면도기 값이 아니였던 거다.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져오며 눈물이 핑 돌았다.


'아니, 왠 눈물, 이게 무슨 감정이란 말인가.'


나 또한 밀려오는 감정에 당황스러웠다. 이런 나의 모습에 당황스러운 건 남편도 마찬가지였다. 남편은 선물할 만한 사람들이였다며 그걸 이해하지 못하는 듯한 내게 서운함을 느꼈고, 그 와중에 난 내가 왜 이렇게 속상하고 눈물이 나는지를 알고 싶었다.


억울함. 그 감정은 억울함, 그리고 부러움이였다.


나의 장보기 영수증과, 남편이 구매한 면도기 금액 간의 차이는 표면적이 이유였다. 나의 남편도 평소 사치스러운 사람이 절대 아니였기 때문이다.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나 또한 아무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나의 계획대로 몰입하며 일하고 싶었다. 내가 몸담아 온 그 곳에서 좋은 평가와 인정을 받고 싶었다. 나의 커리어를 개발하기 위해 집중하여 공부하고, 치열하게 고민하며 일하고 싶었다. 하지만 임신과 출산을 반복하고 육아를 해오는 동안 나는 다른 워킹맘들처럼, 아직 미혼인 또는 아기가 없는 동기들에 비해 쉼의 시간이 많아졌고, 이미 다다랐을 단계를 넘지 못하고 그 앞에서 멈추어 있는 것 같았다.


아이들의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양육하는 것도 나에게는 정말 소중하고 귀한 일이였다. 그리고 그것을 좋아하고 잘 해내고 싶었기 때문에 난 기꺼이 나의 공부와 근무일을 줄이기도 했다. 하지만 왜 나만 나의 '일(job)'을 멈춰야 하고 늦춰야 되는 것인지가 이제서야 억울했다. 반면 나와는 다르게 점점 힘차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남편이 부러웠다.  


한편으론 남편이 그렇게 나아가고 있는 동안, 나는 지금 나를 필요로 하는 곳, 내가 있어야 할 곳 에서 엄마로서 아내로서 최선을 다해 오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 마음맞는 동료들 못지 않게 나의 공도 크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다. 억울한 나를 위해서, 나도 인센티브를 받아야만 할 것 같았다. 그게 금일봉이든지, 내가 하고 싶은 일이든지, 공부든지 말이다.  


남편에게, 단지 비싼 금액의 면도기 선물을 이해하지 못하는 쪼잔한 아내로 남고 싶지 않았다. 이러한 나의 감정의 이유들을 전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어, 장문의 메세지를 보냈다. 잠시 후 남편은, ‘그 동안 너를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잘 알지 못했던 것 같다. 너의 감정의 이유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며, 동료들보다 먼저 생각해주지 못한 것에 대해 미안해하였다. 그리고 다음날 따뜻한 포옹과 함께, 내게 금일봉을 보내주었다. 평소였다면 생활비에 넣으라며 타박 줬을테지만, 이번에는 받아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그 금일봉으로 일년 전 그만 두었던 뜨개질 수업을 다시 신청하였다. 이번에는 취미반도 아니고, 6개월 수업료가 거금으로 들어가는 입문과 수료 과정으로 말이다. 그리고 이 쉼의 시간들을 건강하게 채우기 위해 규칙적으로 다시 책을 읽기 시작하였고, 나의 생각들을 정리하고 기록하는 시간을 갖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지금 이루어낼 수 있는 또 다른 꿈들을 꾸기 시작했다. 이것저것 할 것들이 많아진 바쁜 일상으로 지치기보다 예전보다 활력이 넘치고 흥분이 되었다.


사실 지금의 이 시간들은 나의 길에서 멈춰있거나 후퇴하는 것이 아니었다. 단지 가는 길의 모양이 달라지고 느려졌을 뿐, 또 다른 빛나는 것들로 채워지고 있었다.




그렇다, 난 사실 겸손하지도 않고, 나의 것 하나도 포기하고 싶지 않은 욕심 많은 사람이였다.


그래서 더더욱 나의 감정과 욕구들에 대해 너무 인색해지지 않기로 했다. 그러다가 또 이렇게 엄한 곳에서 화풀이하고 터져나오지 않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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