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독서
내가 보는 것이 진짜,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종종 할 때가 있다. 그것이 사물이든, 현상이든, 이야기이든지. 나의 눈과 귀로 보고 들으며 자극을 수용하더라도, 해석하는 건 눈과 귀가 아닌 나의 머리와 마음 속에 쌓인 경험과 기억, 그리고 이를 통하여 만들어진 나만의 주관적인 세계 (이를 심리학에선 ‘현상학적 세계’라고 부르기도 한다.)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가 흔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사실은, 우리가 객관적으로 있는 그대로 보고 듣는 그 자극들 조차도 사실 있는 그대로의 상이 맺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하니 뉴스와 이야깃거리들처럼 쉼없이 변화하고 달라지고 흘러가는 것들을, 얼마나 객관적이고 합리적으로, 편향되지 않고 바라본다는 것이, 그리고 그것들을 전달하는 일이 얼마나 복잡하고 어려운 일인가.
우리는 ‘알고리즘의 시대’ 에 살고 있다. 내가 관심이 있어 잠시라도 다른 정보들보다 더 오래 눈길이 머무른다거나 클릭하는 순간에, 나의 타임라임은 ‘그것’과 관련된 것들로 가득차게 된다. 작가의 말처럼 알고리즘에 갖힌 채, 나는 보고 있던 것들만 보게 된다. 그리고 보고 싶은 것들만, 내 입맛에 맞는 것들만 보고 읽게 된다. 이러한 현상의 밑바닥에는 광고와 시청률, 검색률등의 아웃풋을 검증하는 숫자들이 있다.
작가는 이 밖에도 중앙집권적인 뉴스룸의 시스템의 한계에서 오는 차별적인 언론, 타인의 고통과 범죄에 대해 개인이 단죄해야 하는 사회적인 분위기 등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뉴스의 어두운 면들을 소개하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전달’을 목표로 하는 기자와 언론들이 진실을 효과적으로 전달한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음을 공감하게 된다.
우리가 만든 ‘알고리즘’이라는 성 안에서 나오지 않는다면, 진실의 전체를 보기는 어렵다. 그 성 밖으로 한 걸음씩 나올수록 우리는 진실이 지닌 면모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보고 듣고 고민할 수 있게 된다.
‘뉴스는 세계의 수수께끼들을 보여주지만, 모든 해결책을 가지고 있지는 못한 불완전한 매체다. (중략) 언론의 독해를 다시 독해하여 어떻게 문제를 개선할 수 있는지를 논의하는 것은 공동체의 몫이다.’
원래 뉴스란 불완전한 것이었다. 뉴스와 그 이후의 이야기를 완성하고, 행동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우리가 만들어 낸 울타리 안의 정보들에서 진실을 찾아내려하고, 옳고 그름을 지적하고, 판단하려하기보다, 우선 울타리 밖으로, 내가 만들어낸 성 밖으로 나오는 것이 우선임을 기억해야 할 것 같다.
p. 34
우리가 고통을 보는 이유는 다른 이의 아픔에 공감하기 위해서 이기도 하지만, 연대를 통해 느슨한 공동체를 일시적으로나마 가동하여 비슷한 아픔을 막아내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우리의 시선이 어디에, 얼마나, 어느 정도의 섬세함으로 머물러야 하는지, 어느 방향으로 옮아가야 하는지까지가 이야기되어야 한다. 기자의, 미디어의, 카메라의 윤리가 결정되는 것도 이러한 지점에서다.
p. 53
편향은 온라인에서 우리가 드러낸 자기 정체성과 취향의 결과물이다. 우리가 엉망이기에 우리의 소망 역시 엉망일 수 있다는 걸 잊고, 자신의 엉망이 반영된 볼거리를 편하게 즐길 수 있게 하는 기술이 완성형에 가까워졌다.
p. 120
보도란 ‘누군가의’ 고통과 어려움에 대해 말하는 일이고, 그 하나하나의 고통 역시 누군가에게 속한 것이기에, 취재를 통해 고통에 침범하는 일은 결국 누군가의 삶에 침입하는 일이었다. 어떤 고통이 문제라고 말하는 건, 고통이지만 끝내 당신의 것인 무언가가 잘못됐다고 지적하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p. 260
파편으로밖에 남을 수 없는 외로운 사적 애도를 위해 공동체가 함께해 줄 수 있는 일은, ‘왜, 무엇을, 어떻게’와 같은 구성성분이 제자리를 찾도록 하여 이야기를 완성시키는 것 정도다. 공적 애도에서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이 자주 화두가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