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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man editor Feb 23. 2022

유모차를 의지한 채 걸었다

유모차 산책일기

걷지 않은 날엔 하루가 무겁다.

기관에 등원하게 된 둘째 덕에 유모차를 끌고 터덜터덜 걷던 날들이 다시 추억이 되어간다.

후련할 줄 알았던, 지난 시간이 아쉬워 남은 시간은 꽉 채워 유모차를 의지해 걷고 또

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2년 동안 짐처럼 느껴졌던 유모차.

난 그 짐 같던 유모차를 의지하고 있었다는 걸 깨닫는다.

자유로이 홀가분하게 걷던 난

유모차를 밀던 어제의 나를 기웃거렸다.

떼쓰는 아이를 노곤히 재우던, 튼튼한 바퀴로 거친 길을 스스럼없이 달려주었던. 든든한 오빠의 두툼한 손을 의지하듯 유모차의 손잡이에 의지한 채 걸었던 시간들이다.


유모차 산책을 시작한 건 백일이 지나고 아이가 유모차에 제법 오래 앉아있게 될 무렵부터다.

홀로 육아에 지쳐갈 때쯤, 유일하게 나의 시간을 허락해 주었던 유모차 산책길. 유모차를 의지해 걷다 보면

혼자 걸을 때보다 오래, 멀리 갈 수 있었다.

자세도 더 안정적이다.(자세 중요함)

오래 걷기로 체중감량, 체력 강화는 덤으로 얻는다.

걷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언제 끝날지 모를 코로나, 두 아이의 육아에 지쳐가던 날들.

허공을 보며 정신을 놓거나, 음악 듣다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곤 했다.

둘째의 통잠, 첫째의 등교 독립으로 몸은 조금씩 편해지는데 이상하게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불안하고, 조급 해지며 살얼음판을 건너는 듯 아슬아슬한 일상의 연속이다.

기분은 매 분마다 가라앉고, 뭔가를 하려던 의욕은 사라진 지 오래다.

안 마시던 맥주를 홀짝홀짝 마시기 시작했다. 커피 믹스는 박스채 쟁겨두면서.


대출 이자에 다시 일을 하고 돈을 벌어야 한다는 부담감

경력 단절로 인한 자존감 상실

이어지는 코로나가 가져온 사회적 고립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불안한 미래

SNS 안의 사람들이 준 상대적 박탈감

호르몬 불균형

엄마가 우울할 이유는 분명했다.


끝없이 나락으로 떨어지고, 우울로 지쳐가던 내게 유일한 휴식 시간은 아이의 낮잠시간.

제법 순한 아이를 곤히 잠에 빠져들게 만드는 방법은 유모차와 아기띠.

아기띠는 '요통'이라는 후유증 때문에 주로 유모차를 이용했다.

오전 11시 30분 이른 점심을 먹인 후 잘 때까지, 답답한 속이 풀릴 때까지 유모차를 밀며 걷고 또 걸었다.

그렇게 난 유모차를 밀며 하루하루를 버텨냈다.


하루에 적어도 1~2시간 이상은 동네를 산책했다.

분유, 기저귀, 간식 주머니 한편에 읽을 책, 다이어리 등을 쑤셔 넣고 걷고 또 걸었다.

걷다가 갈증이 날 때쯤엔 얼음을 가득 채운 아이스커피를 유모차 컵홀더에 끼워 마시고

또 마셨다. 커피를 마시며 걷다 보면 어느새 걸음에 속도가 붙는다. 운동선수의 단련된

몸처럼 그렇게 내 몸은 걷는 몸으로 바뀐다.

걷는 동안 아이는 곤히 잠들고, 가까운 벤치에 자리를 잡는다. 유모차를 단단히 세워둔 채

허기진 내 안의 어떤 공간을 채운다. 가방에 꾸깃 넣어둔 책을 꺼내 미친 듯이 읽어대며.


걷던 속도만큼 읽기에도 속도가 붙는다. 아이가 깨면 다시 돌아가야 할 시간이기에,

제한된 시간을 최대한 낭비하지 않기 위해서 최대한의 집중력을 발휘한다.

몰입해 읽는 것만이 시간을 아끼는 유일한 방법인 것처럼.

튼튼한 바퀴 달린 유모차와 운동화만 있다면 육아에 매인 엄마도 집중해서 책에 몰입할 수 있다.


그때 난 그랬다.

지금도 가끔.

의지할 곳 없던 난 유모차에 의지해 읽고 걷는다.

저벅저벅

걷는 시간만큼 어떤 기쁨이 쌓인다.

사락사락


유모차 산책을 권하는 이유다.




- 유모차 산책을 위한 꿀팁 -

우울할 때, 기분이 다운될 때, 짜증 날 때, 힘들 때. 생각이 많아질 때 일단 유모차를 끌고 나가보자.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유모차 방수 덮개만 있으면 오케이)


유모차는 디럭스가 좋다. 손잡이 높이를 조절할 수 있는 걸로.

(난 동생에게 물려받은 이지워크디럭스유모차를 애용)


바닥이 고른 산책길이 좋다. 흔들림이 덜해 아이도 엄마도 편하다.


  또 곳곳에 마련된 산책코스는 끝까지 완주하겠다는 욕심이 생겨 더 걸을 수 있다.

(난 주로 집 근처 공릉동 경춘선 숲길을 이용했다. 산책길 중간 만나는 카페촌, 재래시장, 숲.. 다양한 볼거리 누릴 거리들이 있어 걷는 재미를 더한다.)


근처 단골 커피집도 만들어 놓자. 지친 엄마에게 커피 한 잔의 소소한 기쁨은 필수.

그리고 조용하고 안전한 벤치의 위치를

파악해 놓는 것도 좋다. 아이가 잠들면 곧바로 벤치에 주저앉아 책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카페에 들어가기도 했지만 소음과 코로나 위험성으로 주로 야외 벤치를 활용했다.)


준비물은 이렇다.

미리 읽고 싶은 책과 필기도구, 다이어리, 아이에게 필요한 용품 등은 가방 넣어 미리 준비해두자.

신호가 오면 아이만 입혀 곧바로 나갈 수 있도록 준비 둬야 빨리. 자주 나갈 수 있다.

여기에 읽고 싶은 소설, 몰입할 수 있는 책들도 몇 권씩 골라두자.

(난 산책하다가 벤치에 앉아 읽기 좋은 책을 따로 구입해뒀다.)


읽고 싶은 날엔 아이가 잠들면 멈춰 앉아 읽으면 된다.

더 걷고 싶은 날도 있다. 그럴 땐 걷다가 보면 내 의지가 아닌 두 발이 자동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온다. 마라토너들이 느끼는 러너스 하이 단계에 이를 때까지 걷기를 반복한다.


일단 유모차를 끌고 걷자, 그리고 유모차를 세워두고 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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