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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다리별 May 16. 2020

 완벽한 지식을 향한 미완의 오디세이

도서리뷰: '로지코믹스'

철학과 과학의 역사는 궁극의 지(智)를 탐구하기 위한 수많은 학자들의 투쟁과 노력으로 점철되어 있다. 인간과 사회로부터 유래되는 온갖 비합리성과 혼란을 극복하고, 그 비합리성과 혼란으로부터 유래되는 모든 문제들의 원인을 분석하고 그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궁극의 분석틀과 솔루션을 찾고자 했던 것이 그들의 목표였다. 


특히 유럽에서는 종교의 암흑시대가 물러가고 계몽주의의 시대가 도래함에 따라서 이성과 과학이 종교가 차지하던 왕좌를 차지하였고, 이성과 과학이 새로운 시대를 열 것이며,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는 믿음은 19세기 빅토리아 시대에 이르러 정점을 형성했다. 


이 책의 주인공 버트런드 러셀 또한, 빅토리아 시대의 학자들이 가지고 있던 특성을 충실하게 반영하던 인물이었고, 그 또한 다른 학자들과 같이, 세계에 대한 완전한 앎을 얻고, 세상의 모든 문제를 푸는 완벽히 논리적인 방법을 발견하겠다는 꿈을 꾸었다. 그리고 그는 그러한 꿈을 수학과 논리학의 결합을 통해서 이루고자 했다. 


광기를 극복하기 위해 논리와 수학의 이론적 세계로 떠난 여정


정신병력이 있는 집안에서 태어난 러셀은, 자신의 피 속에 흐르는 광기라는 실체가 보이지 않은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완벽하고 확실한 진리를 추구하고자 했다. 그는 광기를 허약한 영혼들을 이성의 자연스로운 조화로서 멀어지도록 잡아끄는 병으로 정의하고, 인간과 사회의 비논리적 경향과 특징에 대한 항거로서 이성과 합리로 스스로를 무장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를 위해 진리의 본질이 나아가는 길로서의 수학을 전공하였지만, 증명하지 않고 당연하게 여기는 ‘공리’를 근거로 하는 수학의 불완전성에 대해 실망하고, 그러한 불완전성을 보완하기 위하여 수학과 논리학을 조합하는 길로 나아간다. 그리고, 수학의 방법과 논리학의 언어를 조합하는 방법으로 완전무결한 지식의 극한으로 스스로를 몰아붙인다. 


프레게, 칸토어, 화이트헤드와 같은 수학의 거장들을 만나고, 그들과 지식을 교류하면서, ‘수학원리’와 같은 불후의 명저를 남기고, 후학들에게 추앙을 받으면서 철학사와 지성사에 큰 획을 그었다. 하지만 비트겐슈타인이나 괴델과 같은 열정적인 후학들의 도전에 부딪히고, 그의 외골수적이고 고립된 삶에 지쳐있던 가족들이 그를 떠나는 불행을 겪으면서, 자신 스스로 확실하고 완벽하게 이루고자 했던 모든 것이 실패로 돌아갔으며, 스스로도 끔찍한 불확실성의 소용돌이로부터 벗어나려 몸부림치던 우울한 꼬마에서 별로 발전하지 못했음을 인정하게 된다. 


이론적인 틀 안에 고립되어 세상과 유리되어 살아왔던 자신을 반성하게 된 러셀은 그 이후, 합리와 논리로만 구성되어 있던 이론의 세계를 벗어나, 자유와 평화를 옹호하고, 이러한 인간주의적 가치를 훼손하는 모든 비합리적이고 비정상적인 열광과 폭력에 몸을 내던져가며 항거하는 행동주의자로서의 제2의 삶의 여정을 시작한다. 


이론과 실재를 혼동하는 것에서 나타나는 광기


이론에 의하여 뒷받침 되지 않는 실재는 비체계적이고 즉물적이다. 하지만, 실재에 의하여 뒷받침되지 않는 이론은 나약하고, 공허하다. 이 책의 주인공은 러셀이기는 하지만, 러셀 일 개인의 삶을 그린 것이 아니라, 러셀 및 러셀과 함께한 학자들이 추구하던 삶을 보여줌으로써 이론에 지나치게 치우쳐져 그 이론만으로 세상을 재단하고 해석하는 것이 학자 개인의 인생에게도, 그리고 세상에게도 불행한 것이라고 우리에게 넌지시 알려주고 있다. 


이 책의 저자들은 러셀과, 러셀의 주위에 있던 많은 학자들이 실재를 해석하기 위한 지도를 제작하는 지도 제작자였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들의 문제는 지도 자체를 실재로 착각하고, 실재로 뛰어들지 않은 채 이론이라는 지도의 영역에 고립되었다는데 문제가 있었다. 그리고,저자들은 그러한 실재와 지도 간의 혼동을 광기로 정의한다. 많은 학자들이 그 광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이론의 함정에 빠져 주위로부터 그리고 자기자신으로부터 고립되고 소외되었으며,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불행의 나락으로 빠뜨렸다. 


광기에 빠지 않기 위한 실재와 이론의 균형, 이를 위한 실재에 대한 감각은 결국 행동을 통하여 얻을 수 밖에 없다. ‘행동하는 자는 고통을 겪을 수 밖에 없지만, 우리는 오로지 고통을 통해서 배운다’라는 그리스 속담처럼 세상과 인생에 대한 학습은 실재에서의 행동과 감각에 크게 의존한다. 다만 그 행동과 감각을 체계화 하고 지식화 하기 위해서 논리와 합리로 무장한 이론이 중요한 것이다. 


세상을 바꾼 러셀, 그리고 세상을 바꾸지 못한 러셀. 


러셀은 인간 두뇌의 변연계로부터 유래되는 비합리와 극단성으로부터 유래되는 모든 문제에 대해서 즉흥적으로 해석하고 행동하는 것을 지양하고, 이성과 논리를 이용하여 사안을 해석하고 분석하며, 거기에만 머물지 말고 세상에 대해 행동하고 개입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러셀은 자신의 이론적 체계와 분석, 그리고 자신의 행동을 통해서 비합리로 범벅인 인간과 세상을 바꾸고자 했던, 무모한 도전자였다. 러셀이 제공한 수학과 논리학 조합의 결실은 이후에, 폰 노이만과, 앨런 튜링에게 큰 영향을 주었고, 그들은 이를 통해서 컴퓨터 과학을 발전시켰으며, 그 컴퓨터 과학은 지금의 세상을 러셀이 살았던 세상과 전혀 다른 세상으로 뒤바꿔놓았다. 이러한 의미에서 러셀이 제공한 논리 이론은 세상을 바꿔놓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의 목표는 세계의 외적인 것을 바꾸는 것 뿐만 아니라, 이성과 논리로 인간과 세계의 내적인 부분도 바꾸는 것이었다. 열광에서 냉정으로, 비합리에서 합리로, 억지에서 논리로의 방향전환이라는 참으로 거대하고 이루기 어려울 원대하고 무모한 도전을 했던 것이다. 


러셀이 살던 세상에도, 지금 우리가 살던 세상에도 인간의 비합리적 광기와 폭력에 근거한 혼란과 부조리는 여전히 존재한다. 종교와 물질에 대한 열광, 쇼비니즘와 같은 비합리와 광기가 인간의 유전자 속에 내재되어 있는 한, 러셀이 꿈꾸었던 세상을 이루는 것은 아직도 요원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무리도 아닐 것이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그러한 혼란과 부조리의 영향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은, 열광과 비이성에 동참하거나 그러한 혼란과 부조리에 대해 수수방관하는 것을 지양하고, 그로부터 약간 거리를 두고 냉철한 이성과 논리의 힘을 빌어 세상을 바라보고 행동해야 되는 것이라고 러셀은 주장한다. 인류가 그러한 태도를 견지하고, 비합리적 열광과 폭력으로부터 세상을 보호하기를 멈추지 않는다면 버틀런드 러셀이 하고자 했던 무모한 도전은 과거완료가 아닌 현재 진행형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을 바꾸는 지혜의 의미

 

이 책의 마지막에는 저자들이 ‘아이스킬로스’가 쓴 그리스 비극 <오레스테이아>를 관람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작품 속에는 트로이 원정에 나서는 ‘아가멤논’이 자신의 딸 ‘이피게이아’를 신에게 제물로 바치고, 이에 격분한 그의 아내 ‘클리타임네스트라’가 정부와 함께 딸의 복수를 위해 ‘아가멤논’을 살해한다. 


‘아가멤논’의 아들 ‘오레스테스’는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어머니 ‘클리타임네스트라’를 살해한다. 그 ‘오레스테스’를 응징하고자 하는 ‘복수의 여신들’과, ‘오레스테스’를 보호하고자 하는 ‘아테나’ 여신이 등장한다. ‘아테나 여신’은 피의 복수의 연속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오레스테스’에게 면죄부를 주고 ‘복수의 여신들’에게 자신과 함께 아테네를 다스리자는 제안을 하고, ‘복수의 여신들’은 그 제안을 받아들여 아테네를 정의로 다스려, 아테네에 피와 복수를 부르는 싸움과 전쟁이 촉발되지 않도록 노력할 것을 약속한다. 


아테나 여신은 ‘지혜’를 상징한다. 지혜는 지식과 동의어가 아니다. 지식은 이론적인 것에만 국한되는 반면에, 지혜는 실재와 맞물리고, 실재를 반영하며, 실재에 솔루션을 주는 지식과 융통성을 의미한다. 저자들은 <오레스테이아>가, 지혜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통상 지혜가 아니라고 배제되는 부분, 즉 완벽한 이론이 아니라고 생각되는 부분도 허용하고 수용해야 한다는 교훈을 준다고 서술한다.


젊은 시절의 러셀에게 실재에 대한 지식과 감각은 완벽한 지혜가 아니었다. 하지만 노년의 러셀은 그러한 자기 자신의 태도를 반성하고, 실재와 이론의 혼동에서 벗어나 실재에 대한 경험지식을 수용하고, 자신의 이론지식과 경험지식을 조합한 지혜의 구도자로서 세상을 보다 나은 방향으로 돌리기 위해서 몸소 실천하는 모습을 보였다. 


역사의 천사 


파울 클레의 작품 중에 <Angelus Novus(새로운 천사)>라는 그림이 있다. 발터 벤야민은 그의 저서 <역사철학테제>에서 이 그림을 보면서 아래와 같이 이야기 한다


‘ 이 천사는 마치 그가 응시하고 있는 어떤 것으로부터 멀어지려고 하는 것 처럼 보이도록 묘사되어 있다. 천사는 눈을 크게 뜨고 있고, 입은 벌어져 있으며, 날개는 펼쳐져 있다. 역사의 천사도 이렇게 보일 것임에 틀림없다. 그의 얼굴은 과거를 향하고 있다. 우리 앞에서 일련의 사건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그 자리에서, 그는 단 하나의 파국만을 본다. 잔해 위에 잔해를 쌓이게 만들고, 그 잔해들을 그의 발치에 내팽개치는 그런 파국을. 천사는 머물고 싶어하고, 죽은 자들을 깨우고 싶어하고, 산산이 부서진 것들을 다시 하나로 만들고 싶어한다. 그러나 천국으로부터 폭풍이 불어와 그의 날개를 옴짝달싹 못하게 만든다. 폭풍이 너무 강해서 날개를 접을 수 조차 없다. 이 폭풍은 그가 등을 돌리고 있는 미래를 향해 불가항력적으로 그를 떠밀고, 그의 앞엔 잔해의 더미가 하늘까지 치솟고 있다. 우리가 진보라고 부르는 것이 이 폭풍이다. ‘ 
 

젊은 러셀은 새로운 천사에 나오는 눈과 머리가 큰, 하지만 몸과 날개가 허약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노년의 러셀은 자신 앞에 파국을 막고, 죽은 자들을 깨우고 싶어하고, 산산이 부서진 것들을 다시 하나로 만들고자 힘차게 날개를 흔든 새로운 역사의 천사의 모습을 가졌으리라고 생각한다. 이 책을 통해서 러셀은 우리에게 합리와 논리의 눈과 머리를 갖고 폭풍에 저항하는 강한 날개를 지닌 천사가 될 것을 메시지를 던지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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