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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다리별 May 18. 2020

수용소에서의 극한적 삶에 대한 위대한 증언

[도서리뷰] 이것이 인간인가(프리모 레비 저)

인류가 찬란한 과학 문명과 이성을 자랑하던 20세기,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이 지구상에서 완전하게 절멸시키기 위한 시도가 있었다. 그 시도의 중심에는 죽음의 수용소가 있었다. 블랙홀에 빨려들어간 것처럼 수용소로 빨려들어간 희생자들에게는 인간이 당할 수 있는, 무엇을 상상해도 상상 이상의 불행의 극한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불행의 극한에서 살아남은 한 사람은 역사의 증언자가 되어 아래와 같은 서문으로 시작하는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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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스한 집에서 안락한 삶을 누리는 당신

집으로 돌아오면 따듯한 음식과 다정한 얼굴을 만나는 당신,

생각해 보라 이것이 인간인지.

 진흙탕 속에서 고되게 노동하며

 평화를 알지 못하고

 빵 반쪽을 위해 싸우고

 예, 아니오라는 말 한마디 때문에 죽어가는 이가.

 생각해보라 이것이 여자인지.

 머리카락 한 올 없이, 이름도 없이,

 기억할 힘도 없이, 

 두 눈은 텅 비고 한 겨울 개구리 처럼

 자궁이 차디찬 이가.

 이런 일이 있었음을 생각하라.

당신에게 이 말들을 전하니

가슴에 새겨두라.

집에 있을 때나, 길을 걸을 때나

잠자리에 들 때나, 깨어날 때나.

당신의 아이들에게 거듭 들려주라.

 그렇지 않으면 당신의 집이 무너져 내리고

 온갖 병이 당신을 괴롭히며,  

 당신의 아이들이 당신을 괴롭히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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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와 평화 속에서 인간은 인간이라는 그 자체만으로 존엄성을 인정받고, 자신의 고유한 “이름”으로 불리운다. 그리고, 인간은 이성과 합리의 바탕 위에서 “희망”을 꿈꾸고, “내일”을 설계한다. 저자도, 운명이 자신을 덮쳐 수용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기 전에는 평범한 삶을 살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폴란드의 수용소에서의 삶을 살기 시작한 다음부턴 이름은 없어지고, 단지 번호만으로 구별되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 “잠재적 사형수”로서 삶을 살면서 강제 노동을 하는 노예의 삶으로 전락한다. “내일”은 “오늘”로, “희망과 꿈”은 “빵 한덩어리과 죽 한그릇”으로 대체되는 목전의 삶만을 추구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목전의 것만 염두에 두는 삶은 수용된 사람들이 의도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전체주의(파시즘)이라는 거대한 괴물이 기획한 설계도에 따라 그러한 삶을 살도록 만들어져가고 있었던 것이다. 


저자는 수용소는 벌을 받는 감옥이 아니라고 한다. 감옥은 출소에 대한 희망이라도 있지만, 수용소 그 자체가 시간 제한 없이 그들에게 부과된 존재 방식이자 하나의 배고픔 그 자체 라고 한다. 끊임없이 괴롭히며 절대로 해소될 수 없는 하나의 실존으로서의 허기짐이 수용소의 삶이라고 하였다. 


저자는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 그리고 주위 환경 변화에 의하여 얼마나 쉽게 허물어 질 수 있는 존재인지를 수용소의 삶에 대한 기억을 통하여 증명한다. 당장의 생존을 위하여, 죽 한그릇과 빵 한덩어리를 얻기 위해서 본능적 욕구에 충실한 동물로 회귀할 수 있는게 인간이다. 


자신을 제외한 만인과의 벌이는 소모적인 전투가 벌어지는 전장이 수용소이다. 그리고, 살아남은 사람은 죽은 사람의 빵과 죽을 차지한다. 그것이 그 전투에서 살아남은 자의 전리품인 것이다. 


살아남은 인간은 그 전장에서 그 나름대로 살아남을 수 있는 심리적인 참호를 만들 줄 아는 사람이다. 그 참호를 만들지 못하고 적응하지 못한 인간은 “선택”된 후 굴뚝의 재가 되어 육체의 옷을 벗고 수용소를 나간다. 하지만, 자신을 수용소에 맞게 바꾼 인간은 하루하루의 생존에 안도하며 끝이 안보이는 터널과 같은 삶을 유지하는 것이다. 


수용소의 삶을 표현하기 위하여 사용한 “절망, 불행의 극한”이라는 단어 자체도 사치스럽고 가벼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만큼 이 책에서 본 수용소의 삶은 무엇을 상상하든 상상 이상이다. 우리는 그러한 삶을 만들어내는 수용소는 특정시대, 특정한 정치상황에서 만들어졌다고 보통 생각한다. 수용소 하면, 2차 세계대전의 “아우슈비츠 수용소”나, 소련 스탈린 시대를 표현한 솔체니친의 “수용소”, 또는 북한의 “요덕 수용소” 같은, 우리와는 무관한 상황과 연관되는 수용소가 쉽게 생각나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이러한 수용소의 삶이 언제든지 우리를 지배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수용소는 타자의 의견을 넘어서 존재 자체를 용납하지 못하는 “전체주의”에서 나온다. 이러한 전체주의는 사회 구성원의 정치적 냉소과 무관심을 씨앗 삼아 새싹을 드러내고, 이후, 비판없는 맹종과 통제되지 않는 열광, 그리고 맹목적인 증오를 먹고 자라 사회를 집어삼킨다. 


독일의 나치즘도 민주적인 바이마르 공화국에서의 사람들의 정치적 무관심과 유태인과 같은 타자에 대한 맹목적인 증오를 먹고 자랐다. 그리고, 그렇게 자란 나치즘은 전체주의 정치체제를 구축한 괴물이 되어 독일, 그리고 유럽대륙 전체를 집어삼켰다. 그리고, 그 괴물이 추구하고자 했던 “타자”에 대한 배제와 공격은 “수용소”라는 물리적인 존재로 나타났던 것이다. 


2020년 지금 우리가 자유 민주주의의 삶을 살고 있다고 해도, 그 와중에 정치적 냉소주의가 퍼져나가서 일종의 사회적 분위기를 형성하고, 그 위에 전체주의가 천천히 그 실체를 잡아가면, 언제 우리 앞에 “수용소”가세워질지도 모른다. 


이 책은 프리모 레비가 우리로 하여금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잃지 않도록, 우리의 문명의 수레바퀴가 지속적으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우리에게 주는 소중한 경고이자 증언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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