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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다리별 May 16. 2020

플라톤이 세상을 망친다??

도서리뷰: 블랙 스완

‘역사를 아는 자는 무너지는 담장에 기대지 않는다’.  예전에 출간되었던 역사 소설 ‘정관 정요’의 표지에 써있었던 글귀이다. 역사에서 배우는 현상적인 이야기들은 그 때 그때 달라진다. 하지만 그 현상의 이면에 숨어있는 본질적인 흐름은 반복된다. 역사를 에피소드의 나열로만 생각하면 그 본질의 흐름을 놓친다. 역사적 본질은 어찌 보면 사람의 가장 기본적인 본능적 성향에서 유래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블랙스완>은 과거와 현실에서 되풀이되는 반복되는 개인과 사회가 저지르는 어리석음의 원인을 흥미롭게 분석한다. 저자의 전작 <행운에 속지마라>에서 금융인의 시각에서 무작위성의 놀음 속에 나타나는 운과 성공을 혼동하는 어리석음을 소재로 삼았다면, <블랙 스완>은 철학자적 관점으로써 금융분야를 포함한 여러 분야에서의 인간 본능적 오류를 꼬집고 있다. 


서양 철학의 역사는 ‘플라톤의 주석에 불과하다’라는 말이 있다. 현 세상을 지배하는 사상은 서구의 사상이고, 그 사상의 핵심에 플라톤의 사상이 있다. 따라서, 플라톤적 사고 방식은 지금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실은 이데아의 모방이라는 플라톤의 사상은 보편적인 법칙을 중심에 두고, 현상적인 것을 설명하라는 기본적 태도를 견지한다. 비트켄슈타인의 말 처럼 “설명할 수 없는 일에는 입을 다물고 있어야”하지만, 플라톤은 설명할 수 없는 일에도 여러가지 인과적 법칙을 이용하여 입을 열어 친절히 설명할 것이다. 


이러한 철학적 태도는 인간의 본능인 ‘이야기 짓기’와 ‘패턴 찾기’와 결합되어 인간의 인식 피안에 있는 것 조차도, 인식과 설명의 영역으로 끄집어 낸다. 이러한, 인간의 노력은 일상적 해프닝이 지배하는 ‘평범의 왕국’에서는 유효하다. 하지만, 그러한 유효성에 대한 자만은 일시적으로, 또는 어쩌다 한번씩 일어나는 ‘극단의 왕국’에서도 위와 같은 방법을 이용하여 인과성의 잣대를 들이대는데 기여한다. 


거대한 쓰나미나, 무자비한 금융위기는 '합리'라는 이름의 폭력과, 어설픈 '인과법칙'과, 정규분포의 도표 안에서, 100년에 한번 올까말까한 것으로 과소평가된다. ‘언젠가는 올 수 있지만, 지금은 아니야’라고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잠재된 거대한 위험 앞의 사람은 마치 ‘달려오는 폭주 기관차 앞에서 공기놀이하는 어린이’와 같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매스 미디어의 발달로 인하여, 위험은 확대 재생산되고, 폭주 기관차 앞에서 신나게 공기놀이하는 아이들은 점점 늘어간다. 어떻게든 현상을 원인과 결과로 나누어 설명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자들과, 그렇게 설명된 것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해주는 ‘지식은 있되 지혜와 소양없는 전문가’와, 그 내용에 대해서 무장해제된 상태로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수용자의 삼위 일체 속에서 파국은 계속 반복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파국의 중심에는 ‘부재의 증거’와 ‘증거의 부재’ 사이의 혼동이 있다. ‘검은 백조가 있다는 증거를 발견하지 못한 것’은 ‘검은 백조가 없다’라는 결론을 쉽사리 이끌어 낸다. 하지만, 뒤 결론은 한 마리의 검은 백조의 발견만으로 허무하게 무너진다. 이 검은 백조는 검은 쓰나미가 될 수도, 검은 금융 위기가 될 수도, 검은 폭주 기관차가 될 수 도 있다. 다만, 우리는 그 검은 쓰나미, 검은 금융 위기, 검은 폭주 기관차를 아직 발견하지 못하였을 뿐이다. 매사를 확정적으로 예측하려는 태도와, 정규 분포와 선형성에 입각한 관점은 예측하지 못한 것과, 정규분포를 벗어난 것과, 비선형적인 것에, 무력할 따름이다. 


저자는 예측과, 해석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중요한 태도는 매사에 회의주의적 태도를 견지하는 것이라고 반복하면서 주장한다. 1000일동안 먹이를 꾸준히 받아 먹다가 1001일째 먹이를 주는 주인의 손을 믿고, 추수감사절 음식으로 목이 잘리는 칠면조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자기가 처한 상황에 대한 회의주의적 태도가 필요한 것이다. ‘인간은 보고 싶은 현실만 본다’는 카이사르의 주장은 2000여년이 지난 지금에도 유효하다. 보기 싫어도 봐야 하는 현실을 깨닫는 것. 그것이야말로, 쟁반위의 죽은 칠면조가 풀밭에서 자유롭게 뛰어다닐 수 있는 살아있는 칠면조가 되게하는 자유의 제1의 전제조건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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