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키다리별 May 16. 2020

비일상을 향한 선택, 그리고 선택의 비극적 결말

도서리뷰: 빅픽처

프랑스의 문학가이자 철학자인 샤르트르는 ‘인생은 B(birth)와 D(Death) 사이의 C(choice)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우리는 태어나고 죽기 전까지 수많은 선택의 기로에 서고, 수많은 과거의 선택의 기로에서 선택한 결과는 서로 조합을 이루어 지금의 나를 구성한다. 

그 선택의 결과로부터 발생한 자신의 현재 모습에 대해서 만족하는 사람보다는 과거로의 회귀를 꿈꾸며, ‘그때로 돌아갔더라면 다른 선택을 하여 지금보다 더 만족스러운 삶을 살텐데’라는 아쉬움을 가지는 것이 대부분 사람의 마음일 것이다. 


이 책 ‘빅 픽쳐’에서는 선택의 갈림길에서 내린 한 방향으로서의 선택과, 그 선택의 결과로 나타나는 사건의 발생과, 그 사건 속에서 예기치 못하게 만나는 우연의 조합에 의하여 현재 자신이 그리던 삶을 살아도 그 삶이 전혀 예상하지 못하게 흘러갈 수 있고 더 나아가, 오히려 현실에서 탈주하고자 했던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며, 자기가 벗어나고자 했던 길을 절실하게 그리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사진작가를 꿈꾸던,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사진작가가 된 변호사

이 책의 주인공 ‘벤’은 미국 월스트리트의 잘 나가는 받는 변호사다. 고연봉을 받고, 아내와 두 아이로 이루어진 가족의 가장으로서 남 부러울 것 없이 살아가는 가장이다. 하지만, 그의 직업 ‘변호사’는 자신의 어릴 적 꿈이었던 ‘사진작가’로서의 미래를 도외시하고, 아버지와의 ‘파우스트적 계약’을 맺음으로서 ‘선택’한 사회적 정체성이었다. 

변호사로서 안정된 고수입을 올리면서 가정을 꾸려가고는 있지만, 그의 마음 속에는 어릴 적 꿈이었던 ‘사진작가’에 대한 아쉬움 남아 있었으며, 그 꿈을 버리지 못한 채 변호사이자 아마추어 사진작가로서의 삶을 살아간다. 

하지만, 그의 그러한 삶에 대한 불만족과 아내에 대한 비충실성이 이유가 되어, 그의 아내 ‘베스’는 이웃집에 사는 사진가 ‘게리’와 외도를 한다. ‘벤’은 아내의 외도를 목격하고, ‘게리’와 말다툼을 하던 중 순간의 분을 못 참고, 술병으로 ‘게리’를 쳐 살해하는 순간적인 비참한 ‘선택’을 한다. 

살해 직후, ‘벤’은 자신의 우발적인 살해에 대하여 당황하고 슬퍼하지만, 마음을 다잡고 자신이 꿈꾸었던 사진작가로서의 삶을 살기 위해 자신이 자살한 것으로 위장하여 가족과 다른 사람들을 속이고, 사진작가 ‘게리’로 변신하고, 머나먼 ‘몬태나’주로 떠난다.

몬태나 주로 온 ‘짝퉁 게리’는 주위의 눈에 띄이지 않는 익명으로서의 삶을 꿈꾸지만, 그가 우연히 찍은 몬태나 주의 거대한 산불에 관한 현장감 있는 사진이 지역 신문에 실리고, 그 사진이 미 전역에 화제가 됨으로써, 자신이 절대 원하지 않았던 유명세를 타고, 그의 이름은 매스컴에 오르락내리락하게 되어 졸지에 유명인사가 된다. 

눈 뜨고 보니 스타가 된 그는 그 현실을 도피하기 위해 자신의 비밀을 알아버린 기자 ‘워렌’과 도망가다가 갑작스런 교통사고를 만난다. ‘짝퉁 게리’는 간신히 살아났지만, 까맣게 타버려서 신원도 확인할 수 없는 ‘워렌’의 시신은 ‘게리’의 시신으로 둔갑해 버린다.

그리고, 대중의 입에 회자되던 유명 사진 작가 ‘게리’는 졸지에 인생의 클라이맥스에서 비극적 삶을 마감한 젊은 예술가가 되어 대중의 추앙을 받는다. 사망자가 되어버린 산 ‘가짜 게리’는 몬태나에서 만나 사랑을 키워오던 자신의 여자친구와 함께 LA로 탈출하여 또 다른 이름으로, 그리고 아마추어 사진작가로 아이를 키우며 살아가는 ‘선택’을 하는 것으로 소설이 마무리된다. 

 비일상을 향한 탈주의 꿈, 하지만 이루지 못할 탈주의 꿈 

자신의 꿈을 펼치고, 자신의 잠재적인 능력을 발휘하고자 하는 삶에 대한 우리들의 갈망은 대부분 현실이라는 벽 앞에 자취를 감추고, 우리는 그저 평범한 ‘일상인’으로서의 안전한 삶을 살아간다.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하면서도 우리는 그렇게 산다. 주인공 ‘벤’도 일상적인 권태와 짐의 무거움을 괴로워 하면서도, 그리고 그 비 일상적이며 자유로워보이는 삶을 진지하게 원하면서도 그러지 못한다. 비일상으로의 탈주를 꿈꾸면서도 그 탈주를 감행하지 못하는 이유는 아래와 같지 않을까?

누구나 인생의 비상을 갈망한다. 그러면서도 스스로 가족이라는 덫에 더 깊숙이 파묻고 산다. 
가볍게 여행을 꿈꾸면서도 무거운 짐을 지고 한 곳에 머무를 수 없을 만큼 많은 것을 축적하고 산다. 다른 사람 탓이 아니다. 순전히 자기 탓이다. 누구나 탈출을 바라지만 의무를 저버리지 못한다. 경력, 집, 가족, 빚. 그런 것들이 우리가 살아가는 발판이기도 하다. 우리에게 안정을. 아침에 일어날 이유를 제공하니까. 선택은 좁아지지만 안정을 준다. 누구나 가정이 지워주는 짐 때문에 막다른 길에 다다르지만, 우리는 기꺼이 그 짐을 떠안는다
(P. 117).’

다른 삶을 꿈꾸면서도 탈출을 감행하지 못하고 끙끙대는 ‘벤’에게 그의 친구는 ‘대가없는 선택은 없어, 앞으로 삼십 년동안 다른 삶만 꿈꾸며 살꺼야? 인생은 지금 이대로가 전부야. 자네가 현재의 처지를 싫어하면 결국 모든 것을 잃게 돼. 내가 장담하는데 자네가 지금 가진 것을 모두 잃게 된다면 아마도 필사적으로 되찾고 싶을 꺼야(P.119)’ 라는 진심어린 충고를 한다. 

주인공 ‘벤’이 느끼는 자신이 꿈꾸었던 다른 삶에 대한 희구, 현재의 삶으로 이끌 수 밖에 없었던 ‘파우스트적 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선택에 대한 후회, 탈주를 꿈꾸면서도, 감히 감행할 수 없는 모습에서 일상적 삶을 살아가는, 아니 삶을 ‘살아내는’ 우리의 모습이 투영된다. 

우리 또한 주인공 ‘벤’처럼 지금의 삶에 대해서 만족하지 못하면서도 그 삶의 길에서 이탈하지 못하는 ‘백만 스무 가지 이유’를 갖고 있지 않은가? 자신이 살고자 했든, 아니면 후회하면서 살아내고 있든, 지금 걸어가고 있는 경로에서 벗어날 수 없이 묵묵히 걸어가는 것이 현재 삶의 표현형이라면 갈등하는 ‘벤’의 마음가짐보다, ‘벤’에 충고하는 친구의 마음가짐이 필요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갈등과 번민만으로는 마음이 괴로워질 뿐 외적인 것이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자유로워 보이는 비일상으로의 탈주, 그리고 일상이 되어 버린 비일상. 

일상의 평범한 삶의 관점에서는 ‘비일상’적인 것은 짜릿한 환상이요, 무한한 자유이자 평화로운 휴식이다. 하지만, 그 ‘비일상’적인 것이 일상의 영역으로 넘어오면, 그 속에서도 똑 같은 권태와 외로움과 소외, 그리고 일상사의 구속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휴양지에서의 여행과 그 속에서의 짧은 삶이  우리에게 ‘비일상’적인 환희와 안식, 자유를 주지만, 그 휴양지의 주민에게는 그 속에서의 삶이 일상의 무게로 뒤덮여 있는 것처럼 말이다.  

우발적인 살인이라는 비참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벤’은 ‘사진 작가 게리’의 인생으로 이동한다. 변호사로서의 ‘지금, 여기의 안정된 삶’를 벗어나, 다른 이의 삶으로 살아가기 위한 선택은 그에게 많은 대가와 희생을 요구했다. 변호사로서의 일상의 관점에서는 ’사진작가’로서의 삶은 비일상적이었지만, ‘사진작가’로의 삶으로 이동한 이상, 그가 꿈꾸었던 비일상은 또다른 얼굴을 한 ‘일상’으로 다가왔다.

부유하던 변호사로서의 삶을 살던 그에게 몇 푼 안되는 돈으로 하루하루를 연명하고,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신의 사진의 고료를 가지고 흥정할 수 밖에 없던 상황은 빈곤과 배고픔이라는 예술가적인 일상의 삶 속으로 내던져졌다는 것을 알려준다. 

오히려, 선택 이전의 윤택했던 일상적인 삶보다 더 어렵고 외로운 삶을 살면서 많은 것을 잃어버리게 한 자신의 선택에 대한 감정은 후회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고, 그 후회를 잊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피사체에 렌즈를 향하고, 손가락을 셔텨에 올리는 것 밖에 없었다. 


도망자에게 다가온, 행운을 가장한 불행, 그리고 그 불행으로부터의 또 다른 탈주


우연히 만난 거대한 산불, 그리고, 산불을 진압하기 위한 소방관들의 악전고투와, 그 와중에서의 어느 소방관의 숭고한 죽음. 이 우연적인 모든 상황이 ‘짝퉁 게리’의 카메라 속에 담겨지고, 그 사진이 신문에 실리면서, 그는 생각치 않았던, 아니 전혀 원하지도 않고 절대 일어나지 않기를 바랬던 명성과 인기를 얻는다. 우연한 순간에 사진작가가 되고, 우연한 기회에 찍은 사진이 전혀 예상하지도 못했던 나비효과를 불러온 것이다.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 찾아오고, 그 기회를 잡아서 성공과 행복에 이를 수 있다. 하지만, 그 성공과 행복을 누릴 자격 조차 없는 ‘도망자’에게는 누구나 갈망하는 성공과 행복조차 거대한 불행으로 다가온다. 자신을 쫓아오는 행운을 가장한 거대한 불행의 그림자를 벗어나기 위한 탈주를 감행하고, 그 탈주의 와중에, 다른 의미의 자신의 죽음을 목도한다. 


그리고, 그 죽음을 통하여 그는 신원세탁을 통해 또 다른 사람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도망자’ 또는 ‘탈주자’로서의 삶을 살아간다. 그 와중에 자신이 처절하게 벗어나고자 했던 삶에 다시는 이르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그 곳을 향해 달려가고, 다시 탈주한 일상의 삶으로 돌아온다. ‘탈주자로서의 일상’으로 복귀 할 수 밖에 없는 처지에 스스로 할 수 있는 선택은 회한의 눈물 밖에 없음을 절실히 느끼면서 말이다. 


탈주는 또 다른 탈주를 불러오는 탈주의 연쇄반응을 불러올 수 있다. 거짓말이 또 다른 거짓말을 낳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 연쇄반응 속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이 무엇을 원했는지,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망각하고, 결국에는 탈주 이전의 평범한 삶을 그리워할 수 있다. 


더 나아가  그 평범함의 영역속으로도 편입되지 못하는 무자비한 현실에 절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이 인생이라는 좌표 속에서 나타나는 비선형적 변동 함수의 결과물이다. x값에 무엇이 들어가든지 간에 y값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메피스토펠레스적 함수 말이다. 


선택 속에 은페된 비극적 함정의 가능성


우리는 내가 꾸었던 화려한 삶과 지금의 비참한 현실의 모습을 끊임없이 비교한다. 내가 꿈꾸었던 삶을 현실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다른 사람의 모습 앞에서 자신의 일상적 삶은 왜소해질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에 대한 반동작용으로 자신의 꿈과 자유를 향한 무분별한 탈주를 꿈꾼다. 

하지만, 그러한 상대적인 비교와 자기비하, 그리고 무분별한 탈주는 스스로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 뿐이다. 


비일상적인 삶을 꿈꾸면서, 자신이 가진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무분별하게 자유를 꿈꾸면서, ‘파우스트적 계약서’에 선택의 도장을 찍은 후, 어느 새, 자신이 벗어나고자 했던 그곳으로 처절하게 편입되고자 몸부림치는 자신의 아이러니한 모습을 발견할 수도 있다는 역설적인 가능성이 우리 삶에는 은폐되어 있다. 


그리고, 작가는 그러한 역설적인 가능성의 존재와 그 가능성이 눈에 띄지 않게 우리의 인생경로에 은폐 있다는 점을 어느 한 인간의 연속적인 선택과 그 선택으로부터 유발된 비극을 통하여 우리에게 드러내고 있다. 

삶의 갈림길에서의 특정 방향을 향한 선택의 결과는 알 수 없다. 그 결과가 좋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선택 속에 낙관에 들떠 우리가 보지 못하는 함정이 있을 수도 있다는 점은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작가의 이전글 인생을 구하는 것은 행동과 경험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