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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smine Sep 20. 2020

1. 피해자도, 가해자도 우리 옆에 있다

스토리텔링 시간에 들었던 강렬한 이야기 하나. 여성단체에서 일하던 한 활동가의 초등생 딸이 성추행 피해를 당했다. 평상시 성범죄 피해 여성들을 상담하고 도움을 줘왔기에 그 활동가는 대처 요령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매뉴얼에 따라 침착하게 초기 대응을 해 가해자를 잡는 데 성공했고, 법의 심판을 받게 했다. 성범죄 가해자가 법적 처벌을 받는 것은 사회 정의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피해자의 심리를 안정시키는 데 매우 중요한 요소다. 활동가는 그 지난한 과정을 축적된 경험을 바탕으로 최단기간에 잘 해결했고 그 결과를 딸에게 알려 딸의 심리적 안정을 도왔다.     

 

대부분의 성범죄는 가해자를 법정에 세우는 것 자체가 힘들고, 우여곡절 끝에 법정까지 가더라도 무혐의 처분을 받거나 집행유예 등 가벼운 처벌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무혐의 처분이 나면 가해자는 의기양양해지고, 피해자는 멀쩡한 남자를 무고한 꽃뱀 취급을 받기도 한다. 이럴 때 피해자는 1차 피해에 이어 심각한 트라우마나 외상후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리게 된다. 그러므로 성범죄에서 가해자를 법적으로 처벌하는 것은 피해자의 심리적 건강 회복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 피해자가 범죄 피해 후 10, 20년이 지나 가해자를 찾아 사적 처벌을 한 사례들이 끊이지 않는 이유다. 가해자가 처벌받지 않는 한

피해자의 신체적·정신적 상처는 아물지 않는다. 오히려 시간이 지나면서 더 심각한 상황으로 치닫기도 한다. 그리고 그 수업 때 생각보다 훨씬 많은 여성이 피해를 당하고도

숨죽이며 살아간다는 걸 알게 됐다. 그런 의미에서 활동가의 사례는 모범적인 대처 방식으로 회자되곤 했다.      


활동가도, 딸도 시간이 흐르면서 그날의 기억을 지우고 각자 생활에 충실했다. 몇 년이 지난 후 사춘기에 접어든 딸과 소통에 문제가 생기고 갈등이 깊어져 고민하던 어느 날, 딸이 엄마를 원망하듯 쏟아낸 말의 뒤 끝에 활동가는 자신의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말을 들었다. “엄마가 날 보호해주지 않았잖아? 나만 남겨놓고 일하러 가버렸잖아?” 그 말을 들은 활동가는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딸은 몇 년 전 ‘그일’이 일어난 날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다른 성범죄 사건과 달리 신속하게 범인도 잡고, 그에 따른 응징도 했기에 활동가는 딸이 잘 극복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딸은 여전히 그날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활동가는 다시 딸을 부둥켜안았다. 그리고 뭐가 잘못됐는지를 찾기 시작했다.     


사건이 일어난 날, 아이가 여느 때와 다른 모습으로 귀가한 걸 본 활동가는 직감적으로 큰일이 생긴 걸 알아챘고, 아이에게 어디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들었다. 활동가는

가해자를 잡아서 벌을 받게 해야만 딸이 그 후유증에서 빨리 벗어난다는 생각에 서둘러 범죄 현장으로 뛰어갔고, 현장에서 멀리 벗어나지 못한 가해자를 잡아 경찰에 넘길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시간, 딸은 ‘일하러 나간’ 엄마에게 버려진 채 혼자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딸은 그때 엄마 품이 절실했다. 딸을 꼭 껴안고 괜찮다고, 네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줄 엄마가 필요했다. 그때 혼자 남겨진 딸은 범죄 피해에 이어 다시 깊은 내상을 입었다. 활동가는 딸을 안고 오열했다. 엄마가 미안하다고, 그때는 그게 널 위하는 거라고 생각했다고, 엄마가 바보였다고 용서를 빌었다.     


이 사연을 듣는데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듯한 무력감을 느꼈다. 나뿐만이 아니었다. 수업을 듣던 수강생 모두가 그랬다. 그 활동가가 딸을 품고 진정시키는 데 집중했다면

가해자를 놓쳤을 게 뻔했다. 그랬다면 모녀에게 이 사건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 현재형이 됐을 것이다. 가해자를 처벌받게 함으로써 ‘그일’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했던 활동가는 이제 또 다른 상황과 맞닥뜨렸다. 이 이야기는 성범죄 피해가 얼마나 질기게 이어지는지, 또 당사자뿐만 아니라 그 가족에게까지 얼마나 폭넓게 확산되는지를 깨우쳐줬다.     


2020년, 우리는 얼마나 진화했을까. 그 어떤 소설가도 상상하지 못한 일들이 연예계에서 벌어지고, 10대 청소년과 20대 초반 청년이 악랄한 범죄 주모자로 신상이 공개됐을 때

나는 예의 그 무력감을 다시 느꼈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우리나라가 어쩌다 이렇게 됐나 싶은 뉴스가 터져 나오고 그 와중에 성범죄에 연루돼 극단적 선택을 한 유명 인사를 조문하지 않겠다고 했던 최연소 국회의원인 한 여성 의원은 또다시 화살을 맞게 됐다. 그러고 10여 일이 지난 뒤 한 인터뷰에서 자신도 사회 초년생 때 성희롱 피해를 당한 적이 있었다고 했다. 당시엔 ‘이것도 사회생활인가’ 하면서 넘겼다고 했다. 그렇게 잊고 살았는데 한 후배에게서 “피해를 회사에 신고했다. 증언 좀 해달라”는 부탁을 받게 됐다. 그때 그 여성 의원은 너무나 미안했다고 했다. 자신이 침묵했기에 후배가 같은 일을 겪었구나 싶어서였다. 피해자가 침묵할 때 가해자는 더 대담해지고 점점 더 괴물이 돼 간다. 그렇다고 해서 뒤늦게 목소리를 내는 피해자를 공격하는 건 또 다른 가해다.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과 그로 인한 고통을 읽어야 한다.     


나 또한 30여 년의 직장 생활 동안 두어 번 피해를 당한 적이 있다. 첫 번째는 피해인지 아닌지 상황이 너무 알쏭달쏭했다. 그러나 여자라면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와 밤을 꼬박 새운 나는 내 직감을 믿기로 했다. 다음 날 출근해 남자 선배를 밖으로 불러냈다. 갓 입사한 내게 7살이나 많은 선배는 하늘 같았다. 그러나 전날의 그 기분 나쁜 느낌을 혼자 도리질로 내 안에서 몰아낼 자신이 없었다. 선배에게 거두절미하고 물었다. “선배, 나한테 사과할 거 없어요? 난 밤을 꼬박 새웠어요.” 그렇게 또박또박 힘주어 말하며 선배의 눈을 마치 찌르듯이 쏘아 봤다. 선배의 얼굴에서 미세하지만 당황한 표정이

떠올랐고 뒤이어 입술 언저리에 가벼운 경련이 일어난 듯 실룩거리는 게 보였다. 나는 눈에 더 힘을 줬고, 당신이 진실을 말하지 않으면 절대로 고분고분 물러서지 않겠다는 결기를 죽을힘을 다해 얼굴에 실었다. 침묵은 그리 길지 않았다. “○○야, 미안하다. 내가 죽을죄를 지었다.” 그 말을 듣고서야 참았던 숨이 쉬어졌다. 나는 “적어도 선배가 이 직업을 갖고 있는 한 그따위 파렴치한 짓은 하면 안 된다”고 쏘아붙이며 앞으로 나뿐만 아니라 다른 어느 후배에게서라도 이와 유사한 일이 일어나면 그땐 절대 조용히 넘어가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 일 이후 그 선배는 술자리에서 항상 조심하는 모습을 보였고, 나는 그의

진심을 믿었다. 그 회사를 그만둘 때까지 그 선배와는 잘 지냈다. 그 경험은 내가 사회생활을 하는 데 좋은 지침이 됐다. 내 직감이 옳다는 것. 그 영역에 관한 한 여자들의 직감은 항상 옳다는 걸 알게 됐다.


그러고 몇 년 후 다른 직장에서 다시 그와 유사한 일이 일어났다. 회식 자리에서였다. 이번엔 나와 동료 2명이 피해를 당했다. 둘의 느낌이 같았다. 가해자는 직위가 높았다. 다음 날 직속 상사에게 피해 사실을 밝히고 항의를 하겠다고 했더니 상사는 나를 말리기 바빴다. 상사는 자기보다 직위가 높은 가해자에게 내가 항의함으로써 자기에게 있을지 없을지 모를 미래의 불이익을 걱정하느라 이미 일어난 내 피해를 ‘예민함’으로 치부했다. 그러면서 내 회사 생활에 불이익이 있을 수 있다는 둥, 친근함의 표현이라는 둥 말 같잖은 소리를 늘어놨다. 그와 언쟁해봤자 문제 해결은 요원했다. 정공법을 택했다. 가해자를 찾아갔다. 그는 사과할 일 없느냐는 내 질문에 바로 꼬리를 내렸다. 가해자는 그날 우리 부서를 찾아와 모든 부서원이 있는 자리에서 공개 사과를 했다.      


두 번의 경험을 통해 성희롱 가해자들의 성향을 파악하게 됐다. 슬쩍 손을 잡았는데 피해자가 별 대응을 하지 않으면 어깨동무를 하고, 그래도 별 항의가 없으면 허벅지를 만지는 등의 순서로 마치 간을 보듯 가해행위를 키워간다. 나는 가해자들이 나의 즉각적인 항의 덕분에 더 심각한 성범죄 가해로 인한 패가망신을 면했다고 생각한다. 성범죄에 관한 한 관용은 버려야 한다. 나의 침묵이 또 다른 가해, 더 큰 범죄 행위의 불쏘시개가 될 수 있음을 안다면 조그만 싹이라도 보이는 순간 싹둑 자를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 용기가 나를 구하고 후배들을 구할 수 있다고 믿는다. 작은 피해에 용기를 내지 못하면 큰 피해 앞에선 무너질 수밖에 없는 성과 관련한 피해다. 일단 피해가 발생하면 치러야 할 대가가 어마무시한 나라에 살고 있는 한 우리는 어떻게든 범죄로부터 안전거리를 확보해야 한다. 이건 오지랖이 아니다. 바로 생존을 위한 것이다. 피해자도, 가해자도 바로 우리 옆에 있다. 범죄의 스위치가 켜지려 할 때 그걸 끌 수 있는 힘은 그들에게 있지 않다. 나와 후배, 바로 우리들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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