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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smine Sep 21. 2020

2.자기구원으로서의 공부


연암 박지원(1737~1805)의 ‘열하일기’ 학교 문턱만 넘었으면 들어봤을 테지만, 그 열하일기를 재미나게 설명해준 사람을 만난 기억은 없다. 그 열하일기에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이란 이름을 붙인 작가 덕에 그 유쾌한 시공간이 뒤늦게야 궁금해졌고 그 궁금증은 고전평론가 고미숙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먼저, 그녀가 서술한 ‘열하일기’는 연암 박지원에 대한 선입견을 깨기에 충분했다.
 

박지원은 책상물림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에게는 길이 곧 글이었고, 삶이 곧 여행이었다. 그가 청나라 건륭제의 칠순을 축하하기 위해 조선 사신단의 비공식 멤버로 열하로 향해 한양으로 돌아오기까지 1780년, 5개월가량 기록한 내용이다. 하룻밤에 강을 9번이나 건너기도 하고, 무박나흘 동안 이동하기도 했다. 천재 연암은 왜 과거를 통한 입신양명의 길을 한사코 거부하고 길 위의 삶을 택했을까? 그때나 지금이나 주류 가문의 자제가 밟아야 할 코스는 크게 다르지 않다. 그 또한 청년시절 산사에서 과거 준비에 몰두하지만 불면증과 거식증을 동반한 중증 우울증을 앓게 된다. 귀신까지 쫓아버릴 정도의 양기를 타고난 ‘태양인’이,

그것도 한창때인 청년기에 우울증이라니? 그 당시 과거는 부패할 대로 부패해 있었고 우울증은 청년 연암의 내면과 부패한 과거제도와의 격렬한 마찰로 인한 것이었다.     


이 지점에서 나의 고교 시절이 떠올랐다. 약사가 되기를 원하는 부모님 뜻에 따라 나는 인문계가 아닌 자연계를 선택했다. 고2가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체증과 편두통이 반복됐다. 언제나 그렇듯 질병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을 살라는 몸의 신호다. 그러나 내 마음을 제대로 읽지 못했던 그 시절, 나는 엄마 손에 이끌려 내가 살던 도시의 대학병원을 순례하기 시작했다. 뇌파 검사 등 온갖 검사를 해도 병명이 나오질 않았다. 고3이 됐을 때 내 병은 그 무렵 막 규정된 병명인 ‘고3병’으로 간주됐다. 지나고 보니 내 병은 적성에 맞지 않는 공부와 나 사이의 불협화음으로 인한 것이었다. 청년 연암에게 우울증으로 나타난 것이 소음인인 내게는 위장 무력증과 편두통으로 나타난 것이었다. 그때는 의사도 엄마도 나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를 몰랐다. 어서 빨리 고3 시절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그때 내 어리석음의 극치는 나를 공부와는 상극인 사람으로 오해한 것이었다. 그렇게 고교 2년간 조퇴와 결석을 거듭한 끝에 나는 약학과가 아닌 식품영양학과에 입학했다. 그 당시의 선택으로 내가 원하는 일을 하기까지 참 먼 길을 돌고 돌아야 했다.     


어리석고 무기력한 나의 대응과 달리 연암은 아주 독특한 방식으로 우울증을 해결한다. 저잣거리에 떠도는 이야기들을 채집해 글로 옮기는 것이었다. 글쓰기를 치료의 방편으로 삼은 건 훌륭했으나 그 내용이 의아했다. 성인들의 말씀이나 지혜를 집대성하는 게 아니라 주로 시정의 풍문,

그것도 익살스럽고 우스꽝스러운 야담들을 모아서 쓰는 것이다. 도저히 그 시절 양반가 자제의 선택이라고 믿긴 힘들지만, 그게 열하일기의 씨앗이 된다. 박지원은‘민옹전’ ‘김신선전’ 등의 이야기에서 다양한 괴짜 혹은 기인들을

주인공으로 불러들여 자신의 우울증을 치료하는 소재로 삼는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세상의 주류적 가치에서 벗어나 세상을 떠도는 마이너들은 결국 박지원의 또 다른 모습이다. 제도권에서 벗어난 만큼 그들은 자유롭다. 박지원은 그들의 발자취를 찾아 전국을 떠돌면서 우울증을 스스로 치유한다.

순양(純陽)의 기운을 타고났다는 태양인 박지원은 항상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의 친구들은 재야 지식인, 서얼 등 소수자 또는 비주류였다. 연암그룹은 단순히 교양과 사교의 모임이 아니라 지리, 국방, 천문, 음악, 문자학 등

많은 것을 포괄하는 지식인 집합체였다. 그들은 열하로 가는 길에도 연암과 함께한다.     


이 부분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연대하고 어울리는 연암의 ‘관계의 기술’에 혹했다. 그 무렵, 나는 공동체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마음공부 친구, 고전공부 친구, 여행 친구 등 몇 개 그룹의 절친들과 노년에 서로 연대해서 살 수 있는 방법론에 대해 얘기를 나눠 오던 차였다. 서로 다른 분야에서 일하는 다양한 층위의 싱글들이 독립성을 유지하면서

각자 잘 아는 분야에 대해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한 건물에서 사는 형태가 오스트리아 등 유럽에선 잘 꾸려지고 있다는 방송을 본 뒤이기도 했다. 연암은 자기 자신을 제대로 볼 줄 알았다. 오늘날 많은 사람의 눈과 입과 손가락은

언제나 타인을 향해 있다. 나 또한 그 시류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사유하고 성찰하는 법을 잊은 지 오래인 우리들은 타인의 사사로운 실수나 잘못에는 득달같이 달려들어 눈을 흘기고 비난하고 손가락질한다.      


그러나 연암은 달랐다. 시대를 탓하지 않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그것도 아주 유쾌한 방식으로. 과거제도의 타락상에 편승하지 않았던 그는 청 건륭제를 만나러 가는 대장정에 올라 잠시 머무르던 곳곳에서 그 지역의 다양한 비주류들과 밤을 타서 교유하고 그들에게서 들은 웃기고 괴이한 이야기들을 열하일기에 기록한다. 비주류의 삶을 자청해 가난한 삶을 살면서도 배꼽 잡을 우스개와 촌철살인의 명문들을 많은 소품과 열하일기에 씀으로써 정통고문체와 소품체를 종횡으로 넘나들며 ‘연암체’라는 시대적 변이형을 만들었다. 연암체를 이야기할 때 정조의 문체반정을 빼놓을 수 없다. 철저한 제왕학을 학습하고 왕위에 오른 정조는 직접 학문을 연마하고 신하를 가르치려고 한 뛰어난 왕이었기에 시중에 까끄라기 같은 글이 떠도는 걸 두고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정조는 ‘열하일기’를 문풍을 타락시킨 원흉으로 보고 패관잡기뿐만 아니라 경전과 역사서까지 중국 서적 금지령을 내렸는데 패관잡기는 소설이나 잡다한 에세이류 내용이 문제가 됐고,

경전과 역사서는 종이가 얇고 글씨가 작아 누워서 보기에 편하다는 게 금지령의 이유였다. 성인의 말씀과 역사 기록을 누워서 볼 수 있는 책의 스타일을 문제 삼은 것이다. 그 시대다운 규제이나 지금의 관점으로는 어이가 없다.     


연암이 5개월가량의 대장정에서 열하에 머문 기간은 단 엿새였다. 그 기간에 훌륭한 황제로 일컬어지는 건륭제는 조선 사신단을 특별히 배려했는데 그게 예기치 않은 불운을 가져다준다. 호사다마는 시대를 불문한다. 바로 황제가 정신적 스승으로 떠받들던 티베트 지도자 판첸라마를 접견하도록 은혜를 베푼 것이다. 그러나 그 은혜는 조선사신단에게는 날벼락 같은 일이었다. 유학자가 불교, 그것도 사교에 가까운 티베트 불교의 지도자에게 절을 할 수는 없는 일. 그러나 황제가 베푼 영광을 거절할 수도 없어 이런저런 변명을 둘러댔으나 결국엔 판첸라마를 만나야 했다. 그러나 조선 사신단은 판첸라마를 황제의 정신적 스승으로 공손히 접견한 게 아니라 어쩌지 못해 만나 불공을 범하는 바람에 황제를 노하게 했다. 결국 북경으로 돌아가라는 황제의 명령으로 돌아오게 됐으니 호송 신하도 없는 그 여정은 고달플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연암의 마음은 몸의 고단함과 달리 뿌듯했다. 그의 봇짐은 긴 여정 동안 각 지역 사람들과 나눈 필담과 초고 뭉치로 가득했으니까.     


현재 우리나라는 중국과의 외교 관계를 위해 달라이라마의 방문을 거부하고 있는 극소수 국가 중 하나라고 한다. 연암의 시대에는 청황제가 만남의 장을 마련해줘도 뻗대더니 지금은 중국의 눈치를 보느라 달라이라마의 존재를 묵살하고 있다. 유교적 틀에 갇힌 조선 시대와 정치적 상황에 묶인 현재의 상황이 슬픈 코미디 같다. 또한 부에 대한 연암의 메시지는 200여 년이 지난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아무런 까닭 없이 갑자기 돈이 앞에 닥칠 때는

천둥처럼 두려워하고, 귀신처럼 무서워하여

풀섶에서 뱀을 만난 듯이 머리끝이 오싹하여

뒤로 물러서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인용)


잊을 만하면 보도되는 로또 당첨자들의 행운과 그에 따른 불행이 저절로 떠오른다. 이명과 코골기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에 대한 연암의 비유는 유쾌하다.     


자기가 혼자 아는 것(이명)은

언제나 남이 알아주지 않아 걱정이고,

자기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것(코골기)은

남이 먼저 앎을 미워한다.

이명은 병인데도 남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안타까워하고

코골기는 병이 아닌데도 남이 일깨워주는 것에 성을 낸다.

그러므로 이명을 듣지 않고 내 코골기를 깨닫는다면 공작관(연암)의 뜻에 거의 가까워질 것이다.(인용)    


고미숙이 읽어주는 연암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200여 년 전의 연암이 내 옆에서 숨 쉬는 듯한 착각이 든다. 너무나 작은 나란 존재의 모자람을 그에게 기대 채워보려 한다. 살면서 맞닥뜨리게 될 무수한 고비의 순간, 그를 부르기만 하면 연암은 잠들어 있다가도 싫은 기색 없이 내게로 와 친구가 돼 줄 것만 같다. 연암이 우울증을 극복하고 유쾌하게 살았던 이유로 친구들과의 교유를 빼놓을 수 없듯이 내가 내 몫의 역할을 하며 사는 데도 절친들과의 우정을 빼놓을 수 없다. 나를 일으켜 세워준 많은 인연들에게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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