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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smine Oct 04. 2020

3. Jasmine의 공간충동, 그 기원을 찾아

   

20년 전 트렁크 하나 끌고 상경했을  낯선 곳에 대한 두려움보다 30여 년 만의 독립과 새로운 곳에 대한 호기심으로 들떠 있었다. 뭔가 새로운 삶이 펼쳐질 것만 같은 기대가 꽤 컸기 때문이었다. 2주 정도 외삼촌 댁에 의탁하면서 집을 알아보러 다녔다.


그 당시 들어간 회사가 4호선 충무로에 있었으므로 일단 4호선 자락에서 알아보기로 했다. 그다음엔 북쪽으로 가야 할지, 남쪽으로 가야 할지가 막막했는데 회사 사람들 대화 분위기를 보니 남쪽(강남)에 집을 얻는 건 시골(그 당시 회사 사람들은 내가 부산 내려간다고 할 때마다 시골 잘 다녀오라고 인사를 했다)서 올라온 내겐 오르지 못할 나무 같았다. 그래서 충무로를 기점으로 북쪽으로 한두 정거장마다 내려 주택가 가까운 부동산을 찾아 들어갔다.    

  

동대문역에선 지상으로 나갔다가 바로 지하철을 타러 내려와야 했다. 상업지역이라 내 형편에 맞는 주거지는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혜화역은 이름에 이끌려 내렸다. 그 지역에 대한 배경지식 없이 내 출신 학교와 이름이 같다는 이유로 무작정 내려 부동산에 들어갔다가 원룸 전셋값에 입이 쩍 벌어진 채로 다시 지하철을 탔다. 그렇게 한성대입구, 성신여대입구 등에도 내렸으나 대학가 근처여서인지 혜화역 주변만큼은 아니지만 내가 가진 돈으론 어림도 없었다. 그렇게 더 북쪽 지역을 헤매다 겨우 내 주머니 사정과 딱 맞는 방을 찾았는데 도무지 마음이 내키질 않았다. 다음 날 다시 오기로 하고 집으로 돌아와 3, 4년 먼저 서울로 와 자리를 잡은 후배에게 전화를 했다. 마침 그 후배는 부동산 관련 월간지에서 일하고 있었다. 동네 이름을 말했더니 후배가 기겁을 하며 말렸다. 그 일대가 집창촌에, 점집들로 유명한 동네라고 했다. 그래서 집값이 저렴했구나 싶어 다음 날엔 더 북쪽으로 한 정거장씩 올라갔다.  

    

그렇게 수유역 근처에서 처음으로 나만의 공간(집)을 구했다. 주방 분리 구조의 7평 원룸이었다. 반지하 위의 1층이었지만 앞쪽 건물이 높지 않은 데다 남향이라 햇살이 들어 환하고 따뜻한 기운이 느껴지는 방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이 집이다’라는 느낌이 강렬해 바로 계약서를 썼는데 그때의 확신은 훗날 집을 살 때도 느껴졌다. 어느 날 지인들에게 그런 경험을 말했을 때 그게 바로 나와 인연이 있는 집이어서 첫눈에 그런 느낌이 드는 것이라고 했다. 남녀가 첫 만남에서 ‘이 사람이다’라는 운명적 느낌으로 초스피드 결혼을 하듯 나는 남자가 아니라 그 원룸에 첫눈에 반했고 사랑에 빠졌다.  

    

그렇게 사랑스럽고 아담한 공간에서 서울살이가 시작됐다. 문 2짝짜리 장롱 한 통과 싱글 침대가 제공되는 원룸에 14인치 TV를 사서 3단짜리 책장을 눕히고 그 위에 올렸다. 새로 산 작은 원목 서랍장과 저렴한 직사각형 거울은 화장대로 변신했다. 살림이라고 해 봐야 부산에서 가져온 정사각형 밥상과 주방 살림 몇 개가 전부였지만 하루하루가 행복했다. 회사에서 퇴근하기 전 저녁 메뉴를 검색해 퇴근 후 장을 보고 나만의 공간으로 돌아와 서툰 손놀림으로 1~2시간씩 걸려 겨우 김치볶음이나 달걀찜 등을 만들어 꿀맛 같은 저녁밥을 먹었다. 누군가에겐 초라하고 외로운 일상으로 비칠 수도 있겠지만, 당시엔 그 원룸살이가 미지의 세계에서 한 뼘 한 뼘 나만의 세계를 구축해나가는 과정이었다.   

  

그렇게 1년여를 살았을 즈음 같은 건물 2층에 조금 더 넓은 북향의 원룸이 비었다. 그동안 모은 돈으로 전세금을 올려주고 친구와 남동생을 불러 이사를 했다. 7평에서 10평 원룸으로의 이사는 마치 내 집이라도 장만한 듯한 뿌듯함과 넓어진 공간 이상의 행복감을 느끼게 했다. 처음으로 침대를 사고, 그때 한창 유행하던 테두리를 두른 흰색 장롱도 들였다.  그렇게 2년쯤 살다 스토킹 때문에 이사를 가게 됐다. 서울에 자리를 잡은 남동생 부부는 내게 원룸이나 주택은 위험하니 아파트로 이사해야 한다고 강력히 조언했고, 아파트를 얻기엔 턱없이 부족한 돈을 들고 저렴하지만 안전한 아파트를 찾아 나섰다.


그 무렵 옮긴 직장이 5호선 자락이었으므로 이번엔 회사에서 가까운 역부터가 아니라 먼 역에서부터 아파트를 보러 다녔다. 그렇게 찾아낸 아파트가 지은 지 20년이 훌쩍 넘은 18평 아파트였다. 재건축 심사를 통과하기 위해 외벽 페인트칠 시기를 한참 넘긴 5층짜리 아파트 외관은 심란했지만 빚내지 않고 들어갈 수 있고, 회사까지 50분이면 갈 수 있으니 나로선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실내는 방 하나를 없애고 거실을 넓게 쓸 수 있게 리모델링돼 있었고 도배, 장판도 새로 해서 아파트 외관과는 다르게 깔끔했다. 게다가 꼭대기 층인 5층에 남향이어서 겨울에도 햇살이 가득해 집 안으로 들어서면 절로 행복감이 샘솟았다. 처음으로 양문형 냉장고와 식탁을 들여놨던 날의 기쁨을 잊을 수 없다.     


그 아파트에 살면서 내 집 마련의 꿈을 키우게 됐다. 계약서를 쓸 때 보니 집주인이 나와 동년배였는데 그녀는 작은 연립주택에 살면서 재건축을 기대하고 투자 목적으로 오래된 아파트를 사서 내게 세를 준 것이었다. 계약서를 쓰는 잠깐 동안이었지만 그녀의 검소한 옷차림과 거친 손을 보면서 같은 나이에 누군가는 집이 2채인데 나는 이 집, 저 집을 떠돌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에서 계속 직장 생활을 할 거라면 꼭 서울에 내 집을 마련해야겠다는 다짐이 불쑥 일어났다. 2년 후엔 전세 재계약이 아니라 아파트를 사서 옮기겠다고 마음먹은 후 백화점 나들이를 접었다. 그리고 매일 밤 잠자리에 들 때마다 내 꿈을 이미지화했다. 내가 꿈꾸는 아파트 평면도를 천장에 눈빛으로 그리고, 가구 배치를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가며 실제로 내 아파트를 장만하고 곧 이사를 들어간다고 생각하면서 2년을 지냈다.


그러고 2년 후 진짜 나는 꿈을 이뤘다. 신도림역 근처의 지은 지 10년쯤 된 17평 아파트를 샀다. 회사를 통해 적지 않은 돈을 빌리긴 했지만, 생애 처음으로 내 명의의 아파트를 갖게 된 것이다.  일주일간 리모델링을 해서 입주한 24층 내 집 창을 통해 보이는 풍경은 지상도, 하늘도 아름다웠다. 고층이다 보니 지상의 지저분한 건 내 시력의 한계를 벗어났기에 아름다워 보였고, 하늘과는 좀 더 가까워지니 구름이 흘러가는 모습이며 시시각각 변하는 하늘의 색깔이 마치 나를 위한 미술 쇼 같은 기분까지 들었다. 엄마와 함께 아파트를 방문한 이모의 한 문장은 그 집을 떠난 지 10년이 다 됐는데도 내 가슴에 남았다.  “어쩌면 집이 금방 톡 떨궈놓은 달걀노른자 같네.”


그 문장 덕분이었는지 공간에 대한 사유가 그 집에 살면서부터 더 깊고 넓어졌다.  그 집은 내게 그런 충만함을 주기에 꼭 맞춤한 집이었다. 보통의 소형아파트와는 전혀 다른 구조로 집 전면으로 길게 창이 나 있어 주말에 종일 집에서 뒹굴대며 하늘만 보고 있어도 전혀 지루하질 않았다. 그 집에 사는 5년 동안 나는 주말마다 떡을 찌거나 떡케이크를 만들곤 했다. 가족들의 생일 땐 단호박떡케이크나 약밥케이크를 만들어 조촐한 파티를 하기도 했고, 가끔은 여동생 부부가 조카를 데리고 놀러도 왔다. 그 집에서 요가명상학과에 편입해 명상에 입문하면서 내 삶이 육신의 삶에만 머물지 않고 마음의 삶, 정신의 삶 등 영적 삶에 한 뼘쯤 다가설 수 있게 되기도 했다.      


그렇게 5년쯤 살았을 무렵, 책이 많아진 데다 공부방이 필요해지면서 좀 더 넓은 집으로의 이사를 꿈꾸게 됐다. 처음 상경했을 때와는 달리 살림꾼의 면모를 갖추게 되면서 융자금은 다 갚았고, 그러고 나니 회사에서 좀 더 가깝고 넓은 집으로 눈을 돌리게 됐다. 점심시간 때마다 회사 주변 아파트를 물색하러 다니다 안산을 거실 창 가득 품은 아파트를 만났다. 태어난 지 백일 된 아이와 부부가 사는 집이었다. 3월 말쯤이었는데 집 안의 생기와 창밖의 풍경이 나를 매료시켰다. 그렇게 그 집은 내 생애 두 번째 집이 됐다. 그 집에선 정말 많은 친구와 후배들이 내가 차린 밥상 앞에서 웃음꽃을 피우고, 때론 밤을 새우며 나와 한 시절을 함께했다.      


그렇게 4년쯤 살았을 무렵, 짜증이 많기로 소문난 회사의 좌장과 갈등이 깊어졌고, 그 스트레스에다 과중한 업무로 눈(眼) 상태가 급격히 나빠졌다. 그 좌장과는 1년 전 이미 한 차례 사직서를 내는 등 우여곡절을 겪은 터라 더는 그와 마주하고 싶지 않아 질병을 이유로 사직서를 냈다. 그러자 좌장은 병가도 있고, 휴직도 있는데 왜 사표부터 먼저 내느냐며 병가든, 휴직이든 원하는 대로 해주겠다고 했다. 그만두더라도 몇 개월 쉰 다음 한 번 더 고민해보라는 절친한 선배의 조언대로 나는 6개월 휴직을 하게 됐다. 병가 대신 무급휴직을 택했던 건 6개월 후 사직할 때 먹튀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사직을 염두에 둔 상황이었기에 나는 회사 코앞에 있던 집을 반전세로 내놓고 40분 거리의 좀 저렴한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당장 수입이 없는 상황이었고, 6개월 후 사직하고 다음 직장을 잡기까지 얼마간의 공백이 있을지 알 수 없었기에 주거비용이라도 아껴야 했다. 금전적으로는 적지 않은 손실이 있었지만 그 6개월간의 휴직은 내 삶에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좋은 쉼표가 됐다. 휴직하기가 무섭게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고, 고전 수업도 더 열심히 들었다. 지인들도 더 자주 집으로 초대했고, 그동안 소홀했던 지인들과도 마음을 나눴다.     


휴직 후 수입이 끊긴 동안 살았던 연신내의 아파트는 정남향의 10층이었는데 앞쪽이 2, 3층짜리 단독 주택가여서 먼 산에 둘러싸인 서울 시내 전경이 시원스레 펼쳐져 거실에 커튼을 칠 필요가 없었다. 오래된 아파트이긴 했지만 거실 소파에 누워서 보는 하늘은 그 어떤 고급 아파트에 뒤지지 않았다. 그렇게 그림 그리는 재미에 빠져 지내는 사이 휴직기간 6개월이 끝나가고 있었고, 그 사이 회사 후배들은 인력 부족에 따른고충을 늘어놓으며 나의 복귀를 졸라댔다. ‘대략난감’했다. 좌장에겐 다시 돌아가지 않을 뜻을 이미 밝혔는데 사직을 했다간 15년 가까이 ‘동고동락’ 해온 후배들과의 관계가 서먹해질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다.      


그 무렵의 내적 갈등은 1년 전 고전 수업에서 들었던 주역 괘를 떠올리게 했다. 마음을 모아 주역 괘를 뽑았다. 택화혁(澤火革) 괘가 나왔다. 이때의 ‘혁(革)’은 가죽을 뜻하기도 하고 혁명을 뜻하기도 한다. 언뜻 보면 이대로는 안 되니 사표를 던지는(혁명) 쪽으로 해석할 수 있으나 초구의 해석이 의미심장했다. 처음엔 사표를 던지는 게 맞는다고 생각했으나 초구를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데서 뭔가가 걸렸다. 初九(초구)는 鞏用黃牛之革(공용황우지혁)이니라. 공(鞏)은 묶는다, 황우지혁(黃牛之革)은 황소 가죽(가죽 중 가장 질김)을 뜻하는데 황소 가죽으로 묶어야 한다는 건 섣불리 행동하면 안 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혹시나 해서 고전 수업 선생님에게 해석을 부탁했는데 역시나 였다.      


결국 나는 회사로 복귀했다. 후배들이 그렇게 나를 원한 것도 시절 인연이 닿아서일 거라고 생각한다. 1년만 빨랐거나 늦었어도 그들은 나를 원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그렇게 다시 복귀한 후 6개월간 힐링한 내공으로 앞을 향해 무섭게 달렸다. 그 덕분에 연신내로 이사한 지 1년쯤 됐을 무렵 업무와 관련해 큰 상을 받았다. 그러고 한 달 후 지금의 남편을 소개받았다. 집의 기운과 내 기운이 서로 좋은 쪽으로 감응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남편은 주말마다 그 복잡한 연신내로 나를 데리러 오고 데려다주느라 두 번씩을 오갔다. 그 성실함 덕이었는지 우리는 그해 10월 결혼을 했다.     


그리고 다시 남편이 미리 전세를 얻은 지금의 집으로 나는 2주 늦게 입주를 했다. 지금의 집은 두 사람 모두 자금이 묶여 있어 결혼 전에 우리 집을 장만하는 게 여의치 않아 급하게 얻었다. 막상 들어와서 보니 여기저기 하자가 보였다. 언뜻 사소한 하자처럼 보이는 게 실제론 꽤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걸 지금의 전셋집이 가르쳐줬다. 사소한 듯 보이는 하자들은 내 공간충동을 끊임없이 충동질했다. 안방 욕실의 수도전에  문제가 있는 데다 구조상의 문제로 샤워를 할 수 없는 상태여서 거실 욕실을 남편, 아들과 함께 써야 했다. 그 상황은 20년 가까이 혼자 넓은 공간을 누려온 내게는 그 어떤 것보다 힘들었다.  나만의 공간이 없는 집은 내게 휴식처가 되지 못했다. 다행히 남편은 나의 '공간충동'을 이해해줬고 때마침 집을 비워달라는 주인의 통보에 새 집을 찾아나섰다. 그러고 하루 만에 우리 세 가족 모두가 만족할 만한 집을 구했다. 내가 사는 공간을 바꿈으로써 내 마음과 감정까지 새로워질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됐다.     


닷새 후 이사를 앞두고 돌아보니 주거공간은 단순히 먹고 잠자는 곳 이상의 역할을 한다는 게 더 선명하게 느껴진다. 곧 나만의 공간이 생긴다. 안방이 내 공부방이 된다니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다. 거기서 나는 남편, 아들의 동선과 상관없이 나만의 아지트에서 내 마음이 가는 대로 뭔가를 하거나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할 것이다. 내게 공간은, 집은 그래서 중요하다. 비록 옮겨가는 곳이 내 소유의 집이 아니어도 내게 맘껏 뭘 하거나, 하지 않거나 할 공간이 생긴다는 건 더없는 축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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