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 지옥도, 천국도 사람이 만든다

― 구의 집: 갈월동 98번지(성해나 지음)

by Jasmine

성해나 작가의 소설집 『혼모노』에 실린 단편 ‘구의 집: 갈월동 98번지’을 읽는데 오래전 봄날 서대문형무소에 다녀온 기억이 떠올랐다. 입구를 찾아 한산한 담장 밖을 걷는데 때아닌 한기가 느껴졌다. 일제강점기엔 항일 독립운동가들이, 해방 후에는 독재정권과 군사정권에 저항했던 민주화 운동가들이 갇혔던 곳. 화창한 날씨와 달리 형무소 안은 깊은 그늘이 진 듯 어두웠다. 유관순 열사가 갇혔던 옥사와 사람이 겨우 서 있기도 힘들 정도로 작은 거푸집 같은 1인 형틀, 갖가지 고문 도구 등을 보고 돌아온 뒤 온몸을 두들겨 맞은 듯 며칠을 앓았다.


그날의 기억 때문에 갈월동 98번지 남영동 대공분실이 ‘민주화인권기념관’으로 바뀌었어도 가볼 엄두는 나지 않는다. 서대문형무소에서 느꼈던 한기가 9월 한낮에 다시 나를 에워쌌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람의 야욕이 한데 뭉쳐져 만들어진 건물. 그 공간이 저절로 머릿속에 그려진다. 눈이 가려진 채 급경사의 나선형 계단을 오르는 피조사자가 자신이 끌려가는 곳이 몇 층인지 가늠할 수 없는 공간, 매일 정오에 단 10분만 빛이 들어오는 좁은 수직 창이 있는 방. 그렇게 정교하게 만들어진 조사실(이라기보다 고문실)이 우리의 일상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는 사실에 진저리가 쳐진다. 인간에게 가장 잔인할 수 있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라는 걸 그 공간은 증명한다.

야망에는 수많은 불쏘시개가 필요한 법이었다. 건축가로서의 철학, 숭고한 사명은 물론이거니와 이에 더해 야망을 구현해줄 부모의 재력과 명성, 위를 향한 끝없는 열망…… 그러니 어떤 이들은 욕망의 불구덩이에 온갖 쏘시개를 던져넣다 스스로 땔감이 되기도 하는 것 아니겠나. 163쪽


돈과 권력을 위해서라면 어떤 야만도 감수하는 사람들. 그들은 항상 자신이 목적하는 바를 이루는 데 쓸 땔감으로 누군가를 이용한다. 때로는 스스로 땔감이 되기도 한다는 문장에 오래 머물게 된다. 권력에 가까운 사람이 눈앞의 이익, 일신의 영달에 눈멀 때 그건 개인의 일탈로 끝나지 않는다. 크고 높은 의자에 앉는 사람이 그에 걸맞은 지혜를 가진 사람이기를 바라는 마음만으로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걸 그 공간이 알려준다.


2025년, 오늘도 권력과 재력을 향해 부나방처럼 달려드는 사람들의 날갯짓은 여전히 요란하다. 그들은 책임질 일에는 재빠르게 숨거나 변신하는 데도 뛰어나다. ‘악의 평범성’은 시대가 바뀌어도 여전히 유효하다. 그러나 그 민낯을 영원히 가릴 수는 없다. 아픈 역사를 되새기는 일은 고통스럽지만, 그런 악몽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그날을 기록하고 생생히 기억해야 할 것이다. 목숨 걸고 민주화를 지켜낸 사람들 덕에 우리의 오늘은 안온하지만, 내일도 그러리라는 보장은 없다. 누군가에게 크고 무거운 열쇠를 쥐여줄 땐 더없이 신중해야 한다는 걸 우리는 지난겨울 이미 경험했다. 지옥도, 천국도 결국 사람이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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