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 무라카미 하루키의 『독립기관』
『독립기관』에서 화자는, 내적인 굴곡이나 고뇌가 부족한 탓에 그 몫만큼 놀랍도록 기교적인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그들은 자신이 얼마나 번거로운 기교를 부리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지 깨닫지 못한다. 기교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이라! 이 책의 첫 단락을 읽는 순간 맨 처음 떠오른 건 엉뚱하게도 선거철 정치인들이었다. 그들에게는 선거철만 되면 자동으로 작동하는 독립기관이 있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주인공인 도카이는 잘나가는 성형외과 의사로 50대 초반의 미혼 남성이다. 결혼에 얽매이고 싶지 않은 그가 만나는 여자들은 대개 유부녀거나, 연인이 있는 여자들이다. 그런 방식으로 그는 30년 가까이 행복한 싱글 라이프를 즐길 수 있었다. 그러나 삶은 모든 인간에게 예상치 못한 순간을 선사한다. 도카이가 유부녀를 ‘사랑하게’ 된 것이다. 그마저도 짝사랑이었다. 이룰 수 없는 사랑 앞에서 그는 병원 일은 고사하고 먹고 자는 일조차 할 수 없게 되면서 결국 죽음에 이른다.
하지만 우리 인생을 저 높은 곳으로 끌어올리고,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마음을 뒤흔들고, 아름다운 환상을 보여주고, 때로는 죽음에까지 몰아붙이는 그런 기관의 개입이 없다면 우리 인생은 분명 몹시 퉁명스러운 것이 될 것이다. 혹은 단순한 기교의 나열로 끝나버릴 것이다. 169쪽
사랑에 빠지기 전 도카이의 삶은 잘 정돈된 기교적인 삶이었다. 그런 그가 중년에 이르러 아우슈비츠에 보내진 유대인 내과 의사의 가족 이야기를 읽은 후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그는 자신이 어느 날 갑자기 번호로 불리는 존재로 전락한다면, ‘나는 대체 무엇이라 할 수 있을까’ 하는 물음과 마주한다. 중년에 마주한 자기 존재에 대한 의문은 그 무렵 만나던 유부녀와의 불투명한 미래 등으로 그를 우울증 상태로 몰아간다. 속수무책으로 유부녀에게 빠져드는데 그전까지는 그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었다.
이 단편을 읽으면서 내 안의 독립기관은 어떤 작용으로 지금의 나를 만들었을까 생각해 봤다. 결혼을 인생의 선택지에 둔 적 없던 내가 어느 날 정신 차리고 보니 유부녀가 돼 있었다. 최근 들어 내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돌이켜봐도 명료한 답이 나오지 않았다. 하루키가 말한 독립기관의 작동 말고는 달리 설명할 수 없었다. 오랜 친구들의 대답 또한 별다르지 않았다. 뭔가에 씐 듯 그가 아니면 안 될 것만 같은 느낌에 사로잡혀 결혼에 이른 것 같다고 했다.
『독립기관』을 읽기 전까지는 한 번도, 나를 ‘지금 여기의 나’로 이끈 게 무엇인지-꼭 결혼만이 아니라-깊이 들여다본 적이 없었다. 도카이에겐 독립기관의 작동에 따른 짝사랑이, 거기에 더해 전쟁 중 아우슈비츠에 보내진 한 내과 의사의 운명이 자신의 삶을 새로운 눈으로 보게 한다. 하루키의 문장은 다시 나를 향한 질문이 된다. ‘나는 대체 무엇인가’. ‘누구인가’가 아니라 ‘무엇인가’라서 더 막막해지는 질문 앞에 한동안 서성일 듯하다. 불가해한 사랑에 대해서도.
#무라카미하루키#여자없는남자들#독립기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