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 『여행의 이유』 중 ‘노바디의 여행’ by 김영하
대학을 졸업한 후 조금 이른 퇴직을 하기까지 나는 33년가량 조직에 속해 있었다. 1988년부터 시작된 직장생활은 2022년 여름 뜻하지 않게 끝이 났다. 무직자로 지낸 지난 3년 6개월은 때론 여유로웠지만, 수시로 나는 누구인가, 아니 무엇인가 하는 내 안의 물음과 자주 마주쳤다. 직업인으로 지낸 기간이 학생, 주부였던 기간보다 길었다. 이제 나를 소개할 땐 이름 석 자가 전부다. ‘섬바디(Somebody)’에서 ‘노바디(Nobody)’가 된 것이다. 우리는 일상에서 직함, 회사라는 외투를 걸치고 살아간다. 사회생활이 시작되면 가족관계 안에서의 역할보다 어떤 회사의 과장, 부장이라는 정체성이 더 크게 자리를 잡는다. 물론 그에 걸맞은 성과를 내야 하는 현실은 우리를 숨 막히게도 한다. 그런 순간을 위한 게 여행이다.
김영하 작가는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디세이아』 속 오디세우스 이야기를 전한다. 트로이 전쟁의 영웅 오디세우스는 부하들과 함께 모든 것이 풍족한 무인도에 도착하지만, 그의 마음엔 또 다른 욕구가 고개를 든다. 인정욕구에 사로잡힌 오디세우스는 굳이 외눈박이 거인족인 키클롭스가 사는 섬으로 간다. 키클롭스가 자리를 비운 거처에서 그의 염소와 양을 잡아먹으며 그가 돌아와 자신을 ‘영웅’으로 환대해주길 기다린다. 키클롭스에게 영웅 즉 ‘섬바디’로 추앙받고 싶은 욕망이 위험을 자초하게 한다. 여행이 주는 가장 큰 선물은 나를 정의하던 모든 관계와 사회적 지위가 지워진 새로운 공간에서, ‘실적 압박’이나 ‘승진 누락의 걱정’에서 해방된 순수한 존재로 거듭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디세우스는 그 여행에서 ‘노바디’가 아닌 ‘섬바디’로 대접받으려다 죽음의 위기에 처한다.
작가는 여행자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사치는 ‘현재에만 집중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일상에서는 과거의 후회와 미래의 불안이 끊임없이 우리를 괴롭히지만, 낯선 여행지에서는 당장 눈앞의 풍경, 처음 먹어보는 음식의 맛, 길을 찾는 행위 자체에 몰입하게 된다. 여행은 우리를 오직 현재에만 머물게 한다. 이것은 단순히 노는 즐거움을 넘어선 삶의 지혜이기도 하다. 우리가 느끼는 일상의 고뇌는 대개 ‘이미 일어난 일(질병, 이별 등)’이나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노후 걱정, 자식 걱정)’에서 기인한다. 여행을 통해 ‘지금 이 순간’을 살아내는 감각을 익히는 것은, 일상으로 돌아와서도 삶의 파도를 유연하게 넘길 수 있는 단단한 근육이 된다.
그러나 ‘노바디’가 된 여행자는 혼자 힘으로는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없다. 길을 잃기도 하고, 예상치 못한 곤경에 처하기도 한다. 이때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이름 모르는 타인들의 ‘환대’다. 우리는 흔히 세상을 험난하고 믿을 수 없는 곳이라 생각하지만, 여행은 역설적으로 인류가 서로를 돕는 선의에 기대어 유지되고 있음을 깨닫게 한다. 타인의 친절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나 또한 누군가에게 환대를 베푸는 경험은 인간에 대한 신뢰를 회복시켜 준다.
결국 여행은 돌아오는 것으로 완성된다. 우리가 여행지를 떠나 집으로 돌아올 때, 떠나기 전의 나와 돌아온 후의 나는 미세하게라도 달라져 있을 것이다. 나는 긴 직장생활 동안 ‘섬바디’로 사느라 ‘노바디’로서 자신을 객관화해 볼 경험이 몇 번의 해외여행 말고는 없었다. 그 여행들이 다시 ‘섬바디’로 살아가야 하는 버거움을 견디게 하는 힘이 돼주었다. 내가 누구인지 증명할 필요가 없는 곳에서 얻은 자유가, 거꾸로 내가 누구인지 ‘성과’로 증명해야만 하는 현실을 버티게 하는 밑거름이 돼 주었던 것이다.
이제 퇴직함으로써 나를 그럴듯하게 포장해주던 직함은 사라지고 ‘노바디’로만 살게 됐다. 물론 장녀, 맏며느리, 아내, 엄마라는 역할은 여전히 내 어깨에 얹혀 있다. 그조차도 무겁게 느껴질 때, 스스로를 ‘대단한 존재’ 혹은 ‘집을 떠받치느라 고단한 존재’로 규정짓지 말고 스스로 ‘노바디’가 돼 보려고 한다. 낯선 곳으로 떠나 이름 없는 존재로 머물러 본 사람만이, 비로소 아무것도 아닌 자기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제 33년간이나 비워두었던 집의 주인이 돼 창 가득 들어오는 햇살에 등을 맡기고 따뜻한 차 한잔을 나 자신에게 대접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