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 병도, 약도 사람이 준다

ㅡ 위층에 좋은 이웃이 산다

by Jasmine

며칠 전 같은 아파트의 다른 동으로 이사를 했다. 6년 동안 전세로 살았던 집은 행복과 고통을 한 번에 안겨준 집이었다. 2년마다 세입자가 바뀌었는데 앞선 두 세입자와는 서로 인사하며 지냈다. 두 이웃 모두 이사 갈 때 어디로 옮겨간다며 가족들 근황과 인사를 나누고 떠났다. 정남향의 탁 트인 고층은 내가 선호하는 조건이었다. 집주인이 아이 공부를 위해 강남으로 집을 줄여가면서 6년 동안 살아달라고 했다. 현대판 한석봉 어머니들이 이 아파트엔 많은 것 같다. 새로 이사한 집의 주인도 학원가가 잘 형성된 곳으로 이사가 아이들 모두 대학 입학 때까지 살 예정이라며 우리 부부에게 10년 동안 맘 편히 살라고 했다.

집주인들의 덕담과 달리 나는 그전 집에서도, 막 이사온 집에서도 층간소음의 참맛을 경험하는 중이다. 이전 집에선 아이와 엄마, 외할머니 등 여인 3대가 모두 발망치를 찍는 사람들이었다. 경비실을 통해 연락했을 때, 자기 집은 아니라고 딱 잡아떼는 바람에 2년간 ‘이상한 사람’으로 사느라 힘들었다. 이전 집주인의 아이가 이번 입시에 실패해 2년을 더 살 수 있었는데도 이사비와 중개료를 들여 서둘러 이사한 이유기도 하다.

그런데 며칠 전 이삿짐이 한창 옮겨지는 와중에 이상하게 바로 위층 현관 앞이 궁금했다. 계단을 오르는데 심장이 벌렁거렸다. 아~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아이 자전거며 스카이씽씽 등 미취학 아동의 물건이 현관문 앞쪽 구석에 놓여 있었다. 해가 질 무렵에야 겨우 이사가 끝났다. 예전 집은 집주인이 집을 줄여서 가는 바람에 커튼을 그대로 두고 갔는데 새로 들어온 집은 저층인데다 커튼을 모두 철거해 거실 통창이며 안방 등 집안의 모든 창으로 외부 풍경이 쏟아져 들어왔다. 지나다니는 사람과 눈이 마주칠 것만 같았다.


6년 동안 세탁소 비닐이 씌워진 채인 커튼과 커튼 봉은 찾았는데 봉을 걸 지지대가 보이질 않았다. 때맞춰 위층 아이는 소파에서 뛰어내리는 것 같기도 하고 거실 끝에서 주방까지 대각선으로 달리기라도 하는 듯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이튿날 저녁 다시 아이의 건강한 움직임이 고스란히 전해져 경비실에 전화했다. 잠시 뒤 경비실에서 위층과 통화한 내용을 알려줬는데 이번엔 너무 감동적이어서 눈물이 났다. 아이 아빠가 죄송하다며 아이에게 주의시키겠다고 했다는 전언이었다. 너무나 상식적인 답변일 수도 있지만, 지난번 집에서 겪은 젊은 부부의 ‘강력한 부인’에 놀랐던 가슴은 새로운 이웃의 인정과 조심하겠다는 말에 금세 감동 모드로 돌아섰다.

이사한 지 사흘째 되던 날 저녁 무렵, 올 사람이 없는데 벨이 울렸다. 인터폰 화면을 보니 젊은 남자였다. 아무래도 위층 아이 아빠 같았다. 문을 열었더니 선한 인상의 남자가 큰 딸기 상자를 들고 서 있었다. 이사 온 지 한 달도 채 안 됐고 아이가 세 살인데 가르치는 중이라며 거듭 죄송하다고 고개를 숙였다. 아이가 그렇게 어린 줄 몰랐던 나는 저녁 9시 이후에만 뛰지 않으면 된다며 딸기는 받을 수 없다고 했다. 그러자 아이 아빠는 자기들 먹으려고 사면서 한 상자를 더 샀다며 아이는 계속 주의시키겠다고 했다. 지난번 이웃이 던진 거짓말에 데인 상처를 새로운 이웃이 다독여주는 것만 같았다. 아이 아빠의 진심 어린 표정과 말투에 가슴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듯하던 통증이 사라졌다. 병도, 약도 모두 사람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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