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 ‘우리 둘에게 큰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by 김상혁 시인
친정엄마를 떠나보내기 전엔 그동안 내가 얼마나 무탈하게 살아왔는지 알지 못했다. 그동안 큰일인 듯 소스라쳤던 일들이, 누구라도 겪을 수 있는 일이었다는 걸 이제야 받아들이는 중이다. 뒤돌아보니 시 수업 덕에 힘든 시간을 잘 건너올 수 있었다. 분기마다 편성되는 수업 외에도 단발성으로 이뤄지는 시 수업도 있었다. 지인이 알려준 덕에 지난해 여름 김상혁 시인의 수업을 들을 수 있었다. 시원시원한 발성과 청년처럼 보이는 외모 덕분에 중년의 내가 가진 ‘시인’에 대한 선입견은 순식간에 깨졌다.
내가 가져간 시집에 김 시인은 ‘당신이라는 아주 아름다운 큰일!!’이라는 문장을 써주었다. 오늘 책장에서 꺼내든 그의 시집 제목 ‘우리 둘에게 큰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아들이 독립한 뒤 둘만 사는 우리 부부에게 건네는 덕담 같았다. 게다가 그가 쓴 ‘시인의 말’을 읽는 순간 다시 한번 시인과 같은 마음이 됐다.
‘목욕 끝낸 아이의 복사뼈와 뒤꿈치에 로션을 발라준다. 아이도 이제 익숙한지 까치발 하고 기다린다. 나 죽고 나서 언젠가, 다 늙어서도 매끌매끌한 저 발을 누군가 알아봐주면 좋겠다.’ 2023년 5월 김상혁
이보다 더 지순한 사랑의 말이 있을까 싶다. 시인의 아들이 부럽고, 그 아들이 얼마나 사랑스럽게 커갈지 궁금하다. 시인은 1년 전 구상문학상을 수상한 소감을 신문에 이렇게 밝혔다.
“제가 행운을 뽐내거나 자신을 기특하게 여기지 못하는 까닭은, 행운과 행복을 놓쳐버린 수많은 '나'들이 만져지는 책처럼 눈앞에 놓여 있어서입니다. 전쟁통에 총알이 자기를 비껴갔다고 기뻐하는 건 시가 아닙니다. 총알을 겨우 피한 순간에도 총탄에 맞아 쓰러진 '나'의 얼굴을 떠올리는 것이 시입니다. 그래서 시는, 정말로 총에 맞아 쓰러진 이웃의 얼굴을 제 얼굴처럼 바라볼 수 있습니다.”
40대의 시인이 나보다 한참 어른 같게 느껴지는 문장들 앞에서 잠시 숙연했다. 불행이 나를 비껴갔다고 가슴 쓸어내릴 줄만 알았지, 나를 비껴간 불행이 내 주변의 누군가를 넘어뜨릴 수 있다는 건 미처 생각지 못했다. 이런 마음 밭에 시가 싹을 틔울 수 없는 건 당연한 일인데 내게 다가오지 않는 시에 등을 돌리기도 했다. 총에 맞아 쓰러진 이웃의 얼굴에서 내 얼굴을 떠올릴 수 있다면 시는 제 발로 나를 찾아와 줄 것이다.
시집 제목 ‘우리 둘에게 큰일은 일어나지 않는다’에는 어린 자녀를 둔 부모의 마음이 순정하게 담겨 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시인 부부를 응원하게 된다. 간혹 무릎이 깨지는 일은 있어도 아이에게 큰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는 믿음 도장을 찍어주고 싶다. 그 마음이 내 부모의 마음이었고, 이제 내 마음이고, 머지않아 결혼하고 아빠가 될 아들의 마음이리라. 그런 순정한 마음으로 다시 시작된 강추위도 겨울의 맛이라고 받아들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