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완벽한 날들은 우리 가까이 있다
이 영화는 히라야마를 연기한 야쿠쇼 고지의 표정으로 완성됐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히라야마는 바람에 일렁대는 나뭇잎 사이로 언뜻언뜻 비치는 햇빛(고모레비 · こもれび)을 자주 올려다본다. 우리가 일상에서 아무 생각 없이 흘려보내는 고모레비의 순간들을 히라야마는 놓치지 않고 매일 필름 카메라로 찍는다. 이 영화 덕에 우리말 ‘볕뉘(작은 틈을 통하여 잠시 비치는 햇볕)’를 알게 됐다.
도쿄 시부야의 화장실 청소부인 히라야마의 일상은 언뜻 어제 같은 오늘, 오늘 같은 내일로 보인다. 그러나 찬찬히 들여다보면 단 하루도 같은 날은 없다. 그는 아침 출근길 차 안에서 그날 기분에 따라 카세트테이프(The House of the Rising Sun, Pale Blue Eyes, Brown Eyed Girl …)를 골라 노래를 튼다. 우리 일상에서 오래전 사라진 카세트테이프에서 재생된 노래는 우리를 1970, 1980년대의 정서로 슬그머니 데려다 놓는다. 출근 후 히라야마는 자기가 맡은 화장실 변기 안쪽까지 꼼꼼히 닦는다. 걸레질하는 그의 얼굴은 우리가 먹고사는 일에서 경험하기 어려운 몰입의 순간을 보여준다. 아들뻘의 동료(다카시)에게 뭘 그렇게까지 하느냐는 말을 듣고도 그의 온화한 표정엔 변화가 없다. 그런 그도 잠시 엄마를 잃은 아이와는 따스한 눈빛과 미소로 소통한다.
영화는 그의 과거를 보여주지 않는다. 오전 일을 마친 후 점심시간엔 공원 벤치에서 샌드위치를 먹으며 수시로 하늘을 쳐다보는 그의 얼굴은 밝고도 맑다. 나뭇잎이 바람에 일렁이는 사이로 햇빛이 비쳐 눈이 부시는 순간이 그에겐 가장 충만한 순간인 듯 보인다. 퇴근 후엔 공중목욕탕에서 씻고 단골 가게에서 하이볼을 마신다. 매일 밤 잠자리에 들어선 문고판 책을 잠이 드는 순간까지 읽는다. 주말이면 자전거를 타고 코인빨래방에 가고 헌책방에 들러 100엔짜리 문고판 책을 산다. 그리고 일주일 동안 찍은 사진을 인화해 마음에 드는 사진만 월별로 따로 보관한다. 루틴대로 움직이는 그의 하루는 주중과 주말이 조금 다를 뿐 어느 하나 특별해 보이진 않는다.
그런 그의 일상에도 사소한 듯하지만 변화의 물결이 인다. 조카가 불쑥 찾아온다거나, 동료의 갑작스러운 퇴사로 일이 두 배로 늘어난다거나, 단골식당의 문의 닫혀 있다거나 하는. 조카와 나누는 대화 중 “다음은 다음, 지금은 지금”이라는 히라야마의 문장은 그대로 내 것이 됐다. ‘지금 이 순간’을 손에 잡히지 않는 미래에 양보하지 않겠다는 마음이 느껴져서였다. 조카를 데리러 온 여동생과 집 앞에서 마주하는 장면은 그의 과거를 유추할 수 있는 유일한 열쇠다. 기사 딸린 고급 차를 타고 온 여동생이 떠나기 전 히라야마와 포옹할 때 그의 흐느낌은 어깨의 떨림과 함께 고스란히 전해졌다. 고요히 흐르는 강물과 같은 인생은 없다는 걸 가슴으로 알게 되는 장면이기도 했다.
영화를 그리 많이 보는 편이 아니어서인지 일본 국민배우라는 야쿠쇼 고지를 이 영화에서 처음 만났다. 60대 후반의 배우가 보여주는 비어 있는 듯하지만, 그 여백조차 덜어낼 게 하나도 없는 꽉 찬 일상. 그가 매일 쫓기듯 바쁘게 살아가는 우리에게 말없이 많은 것을 전해준다. 마지막 장면은 출근길의 히라야마가 “새로운 새벽, 새로운 하루, 새로운 인생이야. 나에겐 말이야. … 그래서 난 기분이 좋아”라는 니나 시몬의 ‘Feeling Good’을 들으며 운전하는 장면이다. 이 장면은 무려 4분 가까이 히라야마의 얼굴을 비춘다. 웃는 듯하다가 우는 듯하다가 절망적인 듯하다 희망적인 듯 보이는 히라야마의 표정 연기는 영화를 보고 난 뒤에도 계속 나를 따라다녔다. 우리 인생의 희로애락애오욕을 모두 담아낸 장면이어서 그토록 강렬했던 게 아닐까 싶다.
일본 영화 속 배우가 이토록 궁금하기는 처음이었다. 그가 왜 일본에서 국민배우로 불리는지 이 영화 한 편으로 바로 수긍할 수 있었다. ‘실락원’ ‘쉘 위 댄스’ 등의 주연배우였다. 젊은 날의 그도, 오늘날의 그도 연기에선 우열을 가릴 수 없었다. 반복적으로 보여주는 히라야먀의 일상은 새로울 것도, 특별할 것도 없지만 그 일상성이 바로 우리의 삶이다. 이 영화를 통해 일상 속에서 특별한 순간을 포착하는 건 결국 각자의 몫이라는 걸 깨달았다. 일상이 반복적으로 이어진다는 건 지루해할 일이 아니다. 그만큼 삶이 안온하다는 방증일 테니까. 그래서 글과 씨름하는 지금이 바로 살랑대는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햇살 같은 순간이라는 걸 말이다.